# 103.
“폐하!”
집사가 놀란 얼굴로 로잘린을 불렀다.
보가트 저택은 성채가 아니어서 애초에 침입자를 막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사병들 역시 무기를 다룰 줄 안다는 것뿐, 정식으로 훈련받은 근위대와 같은 수준이 될 수도 없었다. 길게 버틴다고 해 봐야 내일 새벽을 넘길 수 없으리라.
걸어 잠근 잠금쇠를 부수고, 창살을 통과한 근위병들은 서슴없이 사람을 베었다. 사용인들이 다급하게 달음박질을 쳤다. 전달받은 한 가지의 명만 상기하는 근위병들은 그들을 지나친 채 본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도망치셔야 합니다. 지금이라면 뒷문으로 말을 타고 나갈 수 있습니다.”
집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언했다.
“아니. 폐하께 여기 있겠다고 약속했어.”
로잘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 뜻은 명백했다.
“하지만 그대는 가도 좋아. 나를 위해 목숨을 걸라 하지는 않을 테니.”
로잘린이 집사를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진심이었다. 그에게는 어떠한 유감이나 악감정이 없었다.
막 보가트 가문에 들어왔을 때, 그때도 집사는 드마셸을 보좌하고 있었다. 드마셸은 그 어미가 죽어 차마 모른 척할 수 없는 딸을 집사에게 떠넘기고 본체만체했다.
집사 역시 로잘린을 귀애하거나 아가씨로 대우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배곯은 아이가 유령처럼 복도를 헤매고 있을 때 그 손에 눅눅한 빵 조각이라도 쥐여 주는 자비는 가지고 있었다.
‘살아남는 사람이 강한 겁니다.’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식구들이 먹다 남은 빵 조각을 쥐여 주면서 했던 그 말 한마디가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살아남기만 한다면, 오늘의 기억쯤은 모두 추억으로 희석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대는 이미 과거에 빵 조각 몇 개로 내 인생을 구했어. 두 번 구해 달라 할 수는 없지.”
“폐하.”
“어차피 그 나이면 오래 살 수 있는 목숨도 아니기는 하지만. 남의 손에 죽는 것보다야 자연사가 낫지 않겠어?”
로잘린이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내뱉고 웃어 보였다. 집사는 망설이는 얼굴로 문과 로잘린을 번갈아 보았다.
로잘린은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움직임이 느껴지더니 인기척이 멀어졌다.
문이 닫히고, 로잘린은 홀로 남았다. 멎었던 손의 떨림이 다시 느껴지자 덜컥 겁이 났다.
집사 말대로 도망쳐야 했을까? 지금이라도 그를 따라나선다면…….
“안 돼.”
정신 차려.
로잘린이 고개를 저으며 막무가내로 통제를 벗어나려는 두려움의 고삐를 낚아챘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겁에 질려 막무가내로 도망치려다가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휩쓸리고 말 테니까.
로잘린은 자리에 서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이전보다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근위병들은 사병들과 여전히 대치 중이었으며,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한결 안심이 됐다.
여기서 조금만 더 버틴다면 그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이미 재가 되어 버린 희망이라도 다시 태우고 싶었다.
“……!”
그 순간, 다시 한번 총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에 가려 위협을 위해 허공으로 쏜 것인지, 진짜로 사람을 겨냥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협이 되기는 했다.
대치하던 사병들이 눈에 띄게 흠칫하며 공포에 질리는 모습이 보였다. 칼에 베이면 치명상이 아닌 경우 생존이 가능하지만, 총에 맞으면 그대로 머리통이 터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 근위병들이 바짝 밀고 들어왔다. 무력의 차이에 놀라 도망가는 자들도 속속 생겨났다. 점점 사병들의 저지선이 밀리고, 근위병들이 본채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저지선이라고 할 것도 없이 본채로 향하는 구멍이 뚫렸다. 늘 군사학에 대해 배우고 훈련하는 이들은 그 붕괴를,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로잘린은 2층 창문 너머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절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
로잘린이 허탈하게 웃었다. 자신에 대한 무력감이 온몸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아무리 똑똑하다고, 자신이 잘났다고 코를 세우고 있어 봤자 제대로 된 싸움이나 전쟁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무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자들을 홀로 이겨 내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이미 정신이나 체력이나 한계까지 내몰린 탓에 이성을 붙들고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에 로잘린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한 사내의 인영이 보였다.
“폐하.”
“떠난 게 아니었어?”
집사였다. 10년 전에 비하면야 당연히 나이를 먹었지만, 아직은 정정한 사내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인지 허리춤에 장검 하나를 매달고 있었다.
“집 안을 살피고 왔습니다. 기다리시더라도 이곳은 아닙니다.”
“이곳이 아니면?”
“2층은 너무 공개적이고, 금방 접근이 가능합니다.”
단 한 번도 그가 검을 휘두르거나 사람을 위협하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장검을 가지고는 있어도 휘두르는 것조차 힘겨워하리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숨으셔야 합니다.”
“숨어? 이 한정된 공간 어디로?”
로잘린이 비틀린 목소리로 물었다.
“일단 별채로 가셔야 합니다. 사용인들의 공간이니 바로 접근하지는 않을 겁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1층의 문을 젖히는 소리가 들렸다.
결연한 얼굴을 한 집사가 그 자리에서 아연하게 굳어 버린 로잘린을 보고 다가왔다. 제 구두를 벗어 한쪽에 두고, 무례한 손길로 로잘린의 구두를 벗겨 낸 집사가 그것을 방 안에 내던졌다. 푹신한 카펫 위에 여성용 구두 두 개가 덩그러니 남았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감히 로잘린의 손목을 쥔 집사가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복도의 끝을 향하는 걸음이 다급했다.
로잘린은 그제야 그가 구두를 벗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혹시라도 계단을 통해 올라오는 자들이 구둣발 소리를 듣고 쫓아올까 걱정했던 것이다.
이내 복도의 끝, 숨겨진 문을 민 집사가 등 뒤를 돌아보는 로잘린을 끌어당겼다. 그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났다. 어릴 때 타인의 시선을 피해서 종종 숨어들었던, 별채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긴장인지, 빠른 걸음 때문에 숨이 찬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이쪽으로.”
아직 별채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모양인지, 사용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별채는 고요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가장 끝의 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집사와 로잘린은 중앙 계단으로 향했다.
자신을 추적하는 근위병들의 옷에 달린 장식들이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문이란 문은 죄다 열고 온 사방을 살피는 소리가 선명하게 그 뒤를 따라붙었다. 그 모든 소리와 공포를 뒤로한 채, 로잘린은 부모 몰래 다락방을 오르는 어린애처럼 소리 없이 가장 높은 층으로 숨어들었다.
“여기에 계시면 됩니다. 이런 곳에 계시리라고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요.”
집사가 가장 높은 층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로잘린이 아끼던 마호가니 테이블이 거기에 있었다. 테이블에 왜 여기에 있는지를 짐작하기도 전에, 집사가 그 밑으로 로잘린의 몸을 밀어 넣었다.
로잘린은 볼품없이 그 아래에 몸을 구긴 채, 집사가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는 정말로 혼자였다.
어느 순간, 기묘할 정도로 고요해진 저택 안으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로잘린은 복도를 지나 다가오는 인기척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녀는 몸을 다루는 일에 익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곤두선 오감은 그녀가 있는 방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는 사람의 인기척을 날카롭게 감지하고 있었다.
마주 잡은 두 손이 발발 떨렸다. 삐거덕거리며 목재 바닥 위를 걷는 소리와 함께 가까워지는 대상에 대한 공포심이 뼛속 깊이 일었다. 그런 순간에도 로잘린은 테이블 아래 공간에 몸을 구긴 채,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숨소리조차 새어 나가지 않게 자신을 통제했다.
“……!”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인 공포감에 질린 두 눈이 더 크게 뜨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뜨여 있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마저 들릴까, 로잘린은 침을 삼키는 것도 잊은 채 숨을 멈추었다.
그 순간의 소원은 단 하나였다.
제발 이대로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지나가 주기를. 세상에 홀로 남은 듯 외로울 사람을 남겨 두고 떠나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해 주기를.
하지만 직감은, 무례한 방문자가 이대로 그녀를 지나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바닥마다 눌어붙은 저택 내의 고요함이 점차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걸음을 예민하게 잡아챘다. 하릴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에 고인 눈물이 그대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막힌 테이블의 뒤편에서부터 다가온 걸음이 측면을 돌아, 로잘린이 꾸역꾸역 몸을 구겨 넣은 테이블 아래의 빈 공간까지 다가왔다. 부풀린 공포는 바람이 빠진 채 체념처럼 나동그라졌다. 로잘린은 포기와 설움이 어린 눈동자로 지저분한 구둣발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하늘조차도 내가 행복한 것은 봐 줄 수가 없었나?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해도 좋아.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게.’
생의 마지막에는 살아온 삶이 떠오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이게 마지막일까? 어느 날의 로비엔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말을 하는 내내 울던 얼굴이 생각났다. 날렵한 그의 턱과 볼을 겹쳐 잡은 자신의 손가락 사이사이가 축축하게 젖어 들던 순간도.
‘내가 당신을 좋아해.’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는 얼굴로 좋아한다고 고백하던 로비엔, 그녀의 남자도 떠올랐다.
‘……사랑해.’
처절하고 애절했던 그의 사랑 고백 역시.
붙잡혀 욕당하거나, 그를 협박할 인질이 되느니 죽어 버리겠다는 것은 이미 결심한 바였다. 그게 두려운 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떠나야만 할 줄 알았더라면…….
뒤따른 후회가 만들어 낸 고통에 가슴이 저렸다. 그가 무사히 돌아오면 마음을 전해 주겠다는 안일한 생각이 아니라, 모든 순간에 진심으로 살았어야 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대로 내가 죽어 버리면 당신은 어떡하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도 고백하지 못한 채 떠나 버려서, 이 하늘 아래에 당신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하게 되면 어떡하지.
“흑…….”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참던 울음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입을 틀어막아도 소리가 새어 나갔다.
테이블 앞에 굳건히 선 사내가 테이블 아래 미처 숨기지 못한 드레스 자락을 발견했다. 그가 몸도 제대로 숨겨 주지 못하는, 하잘것없는 테이블 아래 숨은 가련한 계집의 정체를 확인하듯 몸을 낮추었다. 심장이 까마득한 지하로, 눈물방울처럼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