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습기에 약한 머스킷은 누구의 손에 들려 있건 간에 갑작스레 쏟아진 폭우로 사용하기 어려워졌다. 그러한 이유로 칼을 이용한 근접전을 벌이고 있는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머릿수였다.
드마셸의 사병, 그리고 합류한 근위병들. 머지않아 전세가 로비엔의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드마셸의 사병들이 카를로스 백작의 사병들을 포위하고 서슴없이 베었다. 살이 베이고, 몸이 관통당하는 소리가 잔인한 음악 소리처럼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판세의 전환에 허둥지둥 도망가는 자, 항복하는 자, 이미 산목숨이 아니게 된 자들로 뜻하지 않았던 전쟁 역시 매끄럽게 마무리로 접어들고 있었다.
“폐하,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드마셸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다친 곳부터 치료하셔야 합니다.”
동시에 코멧이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는 듯, 로비엔을 향해 몸을 돌려 충언했다.
“스친 것뿐이야. 비께서는?”
그러나 로비엔은 제 안위를 살피기도 전에, 드마셸에게 로잘린의 안전에 대해 캐물었다.
“저택에 머무르시겠다기에 사병을 남겨 두었고, 래비어트에게도 도움을 청해 두었습니다.”
“출발하기 전까지 왕궁에서 별 소식은 들리지 않았나?”
로비엔이 축축하게 젖어 늘어지는 붉은색 망토를 대충 벗어 거두며 물었다. 마치 망토에서 물이 빠진 것처럼, 총알이 스친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붉은 핏물이 배어나 있었다.
“출발할 때까지는 그러하였습니다.”
“그 이후는 모르는군.”
궁에 부관인 밀리언을 남겨 두기는 했다. 명목상으로는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일을 살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혹시라도 궁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거든 재빨리 대처할 사람이 필요해서였다. 밀리언은 로비엔만큼이나 내부의 일에 빠삭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에 맡겨 둔 것이었을 뿐, 로잘린의 안위를 확신할 수 없는 지금 그는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보가트 공작에게 명하건대, 숲에 숨은 역당들을 생포하여 수도로 끌고 와라.”
“예, 폐하.”
“그대들은 나를 따라. 즉시 수도로 돌아간다.”
로비엔이 드마셸, 그리고 코멧과 근위병들에게 명령했다.
“폐하, 적어도 치료라도, 아니 젖은 옷이라도 갈아입고 출발하십시오.”
코멧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로비엔에게 요청했다.
그의 주군은 이상할 정도로 제 안위에 관심이 없었다. 직전까지 그 난리 속에서 허덕거리다 이제야 간신히 벗어났는데 저 꼴로 겨울에 말을 탄다니. 수도까지 무사히 돌아가도 건강 악화로 쓰러질까 걱정이었다.
“보가트 공작, 그대의 말을 빌리지.”
“호위 기사들이 사용할 말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로비엔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받았으니 수도에 홀로 남은 왕비가 걱정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바쁜 일이 있어 돌아가야 하는 사람처럼 몹시 서두르고 있었다. 왕인 그가 이리 굳건한데 그 비에게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
“후미에 사병들을 일부 더하여 보내겠습니다.”
드마셸이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을 로비엔에게 건넸다. 로비엔은 망설이지 않고 그 말에 올라타 고삐를 거칠게 잡아챘다.
“수도에서 보지.”
로비엔이 쏜살같이 말머리를 돌려 사냥터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멍하게 지켜보던 코멧과 기사들 역시 왕이 멀어지는 것을 깨닫고 다급하게 말을 빌려 올라탔다.
왕과 기사들이 지나간 자리, 말발굽이 딛고 지난 땅이 잘게 울었다.
“들어와.”
“왕비님. 왕실 근위대가 왔습니다.”
집사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고한 소식은 예상한 대로, 그리 긍정적이지 못했다.
“그런데?”
“전하를 찾고 있습니다. 모셔 가야 한다고…….”
“이유가 무엇인지는 물어보았나?”
로잘린의 질문에 집사가 당황한 얼굴로 부정의 답을 내놓았다. 왕실 근위대가 와서 왕비를 찾는데 그에 이유를 찾을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손님이 와서 주인을 찾으면 이유를 묻고, 그대의 선에서 쳐 내는 것이 집사가 할 일이 아닌가?”
로잘린이 저택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만 제외하면, 그녀가 하는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왕실 근위대 역시 왕비를 모시러 왔다고만 했을 뿐, 그녀를 데려가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말한 적이 없었다. 로잘린이 왜 여기서 머물고 있는지 잘 모르는 집사가 넘겨짚었을 뿐이었다.
“무슨 이유를 대더라도, 증거 없이는 문을 열 수 없다고 답변해.”
로잘린이 담담한 얼굴로 방문객의 정체를 드러내는 집사에게 명령했다.
“……예?”
“혹시 강제로 문을 열려고 하거든, 그 목을 걸어야 할 거라고.”
시간을 끄는 정도밖에는 되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안다. 그러나 지금은 그마저라도 필요했다. 고작 몇 분의 차이로 로비엔의 소식을 들을 수도, 혹은 그가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은가.
분명한 의사 표명에 집사가 조용히 허리 숙여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그는 일개 사용인으로서 주인의 결정에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집사가 방을 나서자마자 로잘린이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정원을 가로지른 길 끝에 익숙한 복장을 한 근위병들의 모습과 그들에게 다가가는 집사의 모습이 보였다. 예상대로 그들은 집사로부터 말을 전해 들은 이후, 난처한 얼굴로 창살 너머에서 서성거렸다.
‘시간을 끄는 동안 몸을 피할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도망쳐 버리면 폐하와 길이 엇갈릴지도 몰라.’
가라앉은 시선이 말을 타고 궁으로 달려가는 근위병 하나의 뒤를 쫓았다. 이제 로잘린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그가 선왕비의 전언을 전하고 이 저택을 뒤집어엎기 전까지였다.
차분해야지, 담담해야지.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며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길을 지나치는 백성들로부터 보가트 저택을 가리듯 선 근위병들과 홀로 대치하는 기분이 들더라도 그랬다. 그것이 로비엔의 옆자리를 차지한 대가였으므로.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다. 만약 다미안과 결혼했더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마음을 뺏긴 사내를 휘두르며 편안히 살았겠지. 다만 싸움은 잦았을 것 같았다. 다미안은 로비엔처럼 온순한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돌아온 로비엔이 이런 생각을 알게 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상상도 이쯤에서 그쳐야 할 일이었다. 다미안과의 결혼 생활을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것도 한몫했다. 로잘린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희미한 웃음기를 띠었다가, 금세 무표정해졌다.
“근위대에게 전하의 말씀을 전달하였습니다.”
돌아온 집사가 상황을 전달했다.
로잘린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먹구름이 걷히고 드러난 푸른 하늘이 그림처럼 선명했다. 아직은 햇빛이 환했다. 과연 이 밤이 지나가기 전 그가 돌아올 수 있을까.
물론 일이 잘못되더라도,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그의 족쇄가 되지는 않으리라. 스스로 목숨을 버려서라도.
그것은 맹세보다 더 큰 의지였다.
왕이 없을 때는 왕의 권한을 위임받은 자가 우선순위를 가졌다. 그런 의미에서 선왕비는 사실 명령을 내리기에 적합한 사람은 아니었다. 왕은 자신의 권한을 왕비에게 넘기고 갔다.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 왕비는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
근위대로서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왕의 권한을 대행할 자로 꼽은 사람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그 와중에 왕의 모후이자 왕실의 가장 윗전인 선왕비가 왕비를 끌고 올 것을 명했다. 그것도 선왕 시해의 주동자라는 명목으로.
근위대는 왕가를 모신다. 명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보가트 공작가로 향하기는 했으나, 그때까지는 그들에게도 누군가를 해하거나 왕비를 진짜로 끌고 갈 목적은 없었다. 뒷일이 무서워서라도 왕비를 궁에 고이 데려다 놓을 생각만 했다.
‘무슨 이유를 대더라도 증거 없이는 문을 열 수 없다.’
한데 저택의 집사를 통해서 전달한 왕비의 답변이 가관이었다. 증거 없이 문을 열 수 없다는 말은 증거가 있다면 잡아갈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정말로 왕비가 선왕 시해의 주동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그들 내에서도 싹텄다.
‘혹시 강제로 문을 열려고 하거든, 그 목을 걸어야 할 것이다.’
다만, 덧붙인 말이 섬찟했다. 실제로도 그들이 강제로 왕비를 끌어낸다면 감수해야 할 문제기도 했다.
왕은 제 어미인 선왕비와 대립할 만큼 왕비를 사랑한다. 그것은 칼라브리아 내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제 비가, 증거 하나 없이 선왕비가 내세운 죄목으로 근위병들에게 끌려갔다는 말을 들으면 돌아온 왕이 그들을 가만둘까?
그렇기에 사람을 보내어 선왕비에게 다시 한번 확인을 부탁했다. 정확히는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 달라는 것이었다. 왕비가 이렇게 주장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어떠한 해도 없을 것을 약속해 달라는 주장이었다.
‘이젠 하다 하다 근위병들까지 나를 우습게 아는구나.’
제일 처음, 선왕비는 그렇게 대답했다고 했다. 한숨을 폭 내쉬는 얼굴이, 말을 전달한 이를 진심으로 한심하게 여기는 듯도 보였다고 했다.
‘그래.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전달하렴.’
‘…….’
‘그러니 너희는 왕비를, 그 범죄자를 내 눈앞에 끌고 와. 나는 선왕을 시해한 그 계집의 목을 베어야겠으니.’
늘 그랬듯 우아한 몸짓과 웃는 낯이었으나, 씹어뱉어 전달한 말에는 분노와 경멸이 그득했다.
어찌 되었건 근위병들은 확신을 얻었다. 왕비가 궁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면 말이 달랐겠지만, 그녀는 의심스러운 말을 하였고, 선왕비가 책임을 지겠다 하였다. 그들은 명을 받은 대로,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더라도 왕비를 끌고 가기로 결정했다.
“폐하. 앉아서 쉬고 계심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보다 못한 집사가 다가와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로잘린은 고개를 저었다. 초조해서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가 없어서였다.
“보가트 공작이 보낸 소식이나, 폐하께서 전달한 소식은 없나?”
대신 로잘린은 새롭게 전해진 소식이 없는지 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창살 너머에 있었다. 근위대는 여전히 보가트 저택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으나, 어둠 속에서 형체가 잠겨 흐려져 가고 있었다.
마치 국경을 방비하는 병사라도 된 것처럼, 집사는 어떠한 소식도 전해진 것이 없음을 고해 올렸다.
주먹만 했던 희망은 타오르는 불 속에서 그 형체를 잃어 갔다. 이제는 어디쯤에서 타고 있는지도, 어떤 크기인지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작아져 버린 상태였다.
그 순간, 천둥처럼 큰 소리가 어두운 밤공기를 뒤흔들었다. 분명히 총소리였다. 나뭇가지에서 잠들어 있던 새들이 놀라 달아나는 날갯짓 소리가 뒤이었다. 희망이 재가 되고, 종잇장처럼 얄팍했던 평화가 깨어지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