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달칵, 달칵.
두 번의 연이은 달각거림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뜬 피베체 공작의 몸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총을 쥐고 있던 피베체 공작의 손목이 코멧의 총에 맞아 날아가 있었다. 그의 손목에서 흐르는 질척한 피에서는 처절한 피비린내가 났다.
그 꼴을 지켜보던 카를로스 백작이 서둘러 방아쇠를 당겼다. 등 뒤를 호위하던 기사 하나가 옆구리가 터진 채 쓰러졌다.
“폐하!”
다급한 상황에 코멧이 예를 차리지 않고 로비엔의 몸을 잡아끌었다.
멍청하게 피베체 공작의 날아간 손목이나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로비엔이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발을 땅에 디뎠다. 젖은 흙이 발아래에서 엉망으로 뭉그러졌다.
“최대한 빨리 달리셔야 합니다!”
피베체 공작을 지나 달리는 동안 코멧이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내질렀다. 움직이는 상대를 겨냥할 만큼 솜씨가 좋은 자는 없는지 탄환은 그들을 빗나갔다.
“당장 뒤쫓아!”
피베체 공작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몸을 숨기고 있던, 시종으로 둔갑한 사병들이 사방에서 몸을 드러냈다. 빠른 화약 장전에 실패한 자들은 이내 총을 내팽개치고 검을 든 채 달려 나왔다. 그들은 현저히 적은 숫자로 그들을 막는 기사들을 베고 지나쳤다. 카를로스 백작 역시 후미에서 그들을 쫓아오고 있었다.
북쪽, 물이 흐르는 소리. 로비엔은 그저 그 사실만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달렸다. 언젠가 떨림을 느꼈던 다리는 이제 떨리지 않았다. 바람을 스치며 달리는 동안, 등 뒤로 펄럭거리는 망토는 도움을 청하며 흔드는 깃발처럼 보였다.
내가 여기에 있으니, 제발 도와 달라고.
‘어머니가 죽은 이후에 유일하게 제대로 가져 본 가족은 당신뿐이에요.’
그의 비가 기어이 하나, 유일하게 가진 가족을 잃지 않게 해 달라고.
숨이 찼으나 달리는 두 다리는 멈출 수 없었다.
이미 코멧을 포함한 다섯 명의 기사 중, 네 명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여전히 칼을 들고 그들을 쫓아오는 귀족 가문들의 사병들을 생각하면, 죽거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
물론 코멧이 여전히 로비엔 곁에 붙어 있기는 하지만, 그의 곁에 남은 호위가 오로지 코멧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다수의 인원과 겨룰 때 그들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저기 깃발이 보입니다, 폐하!”
코멧이 헐떡이면서도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물안개가 더 짙어지는 공간의 바로 직전에 꽂힌 붉은 깃발이 선명했다. 그것은 이 순간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윽……!”
“폐하!”
그 희망을 저지하기라도 하듯, 측면에서 날아온 총알이 어깨 바로 위로 스쳤다. 타인의 것으로만 맡았던 비릿한 피 냄새. 사냥터로 둔갑한 전쟁터에서 로비엔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로비엔은 앨런이 나무 옆에서 재차 장전하는 것을 스치듯 보았다.
앨런은 로비엔과 달리 사냥을 즐기는 호방한 성격이었던 터라, 총을 다루는 데에는 제법 일가견이 있었다. 다음에는 달리고 있는 로비엔이라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죽이려고 마음먹은 이상 제 형제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테니 더더욱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러니 멈출 수 없었다. 죽을 생각이 없었으니까.
로비엔은 이를 악물고 다시 움직였다. 트라우저 아래의 근육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고, 폐는 칼에 찔려 찢어진 듯 고통스러웠다. 삼킨 침에서는 목이 터진 듯 비릿한 쇳내가 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붉은 깃발을 지나쳤을 때, 로비엔은 정면에서 불어오는 매캐한 화약의 냄새를 맡았다.
“하…….”
다른 곳에 몸을 낮추고 있는 병사들을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다섯 발의 탄이 허공을 갈랐다. 달려온 정예병들이 일렬로 서서 로비엔을 등 뒤로 숨긴 후, 멈칫하는 사병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여기서부터는 빠져나가는 길을 압니다, 폐하. 일단은 자리를 피하시고, 대기하는 근위병들을 불러들여 저들을 생포함이 어떠십니까.”
로비엔의 정면에는 평화롭게 물이 흘러가는 호수가 보였다. 거울처럼 비치는 겨울의 나뭇가지와 수풀 따위가 물 위로 시간처럼 고요히 흘러갔다.
그러나 등 뒤로는 살이 터지고, 몸이 나가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매캐한 탄약 냄새가 지옥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모든 것을 헤치고 다가온 코멧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아.”
총과 장검을 갖춘 정예 기사 열 명이라면 그가 몸을 피하는 동안은 대처할 수 있다. 게다가 곧 다른 지점에서 대기하던 자들도 합류할 테니, 지켜야 할 사람이 없는 편이 더 빠른 마무리가 가능할 것이다.
“모시겠습니다.”
코멧이 로비엔의 등 뒤를 가리며 막 길을 안내하던 때였다. 로비엔은 이마에 닿는 차가운 물방울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길고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시커먼 하늘이 몸을 낮춘 짐승처럼 울었다.
“비겁하게 도망치는 거냐고 물었어, 로비엔!”
산을 울리는 목소리에 로비엔이 몸을 돌려 앨런을 바라보았다. 산으로 이어지는 길에 매복하고 있던 로비엔의 기사들이 달려오는 소리에, 카를로스 백작이 어서 자리를 떠야 한다며 앨런의 팔을 마구잡이로 잡아끄는 와중이었다. 앨런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로비엔을 노려보고 있었다.
억울하겠지. 이대로 놓치면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그래.”
로비엔이 담담히 인정했다. 명분 싸움으로 시작해도 실제로 남는 것은 생존이라는 실리적인 결과뿐이다. 호승심에 말려들 수는 없었다.
“너를 형제로 마주 보는 건 오늘이 끝이겠구나.”
“가장 큰 걸 잡아 보겠다며!”
“전하,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마침내 카를로스 백작과 리만 후작이 소리를 지르는 앨런을 끌고 숲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로비엔의 기사들이 그런 그들을 날래게 뒤쫓았다.
마틴은 어디 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의 사병들마저 모두 이곳에 있었던 걸 생각하면, 그의 존재 유무에 큰 의미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시지요, 폐하.”
코멧이 뒤늦게 나타난 기사들에게 손짓으로 자신들을 호위할 것을 명령하며 로비엔을 이끌었다.
동시에 머리 위가 번쩍이며 빛이 명멸했다. 머리가 울릴 정도로 격렬한 천둥소리가 지나가자,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던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피가 멎지 않은 목덜미의 상처에 차가운 빗물이 닿자, 삽시간에 젖어 버린 몸이 찬 기운에 파르르 떨렸다.
로비엔은 고갯짓으로 코멧에게 움직일 것을 명령했다. 코멧과 기사 두엇이 주위를 살피며 앞장서서 움직이고, 로비엔이 그 뒤를 따랐다. 비는 멎을 줄 모르는 것처럼 우악스럽게 쏟아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시면 됩니다.”
시야 확보가 어려울 정도로 쏟아지는 비에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젖은 흙을 밟고 한참을 걸었다. 흙이 마치 늪처럼 느껴졌다. 말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나무에 묶어 두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폐하, 저기에 파란 깃발이 있습니다.”
흐릿하게 보이는 파란 깃발을 발견한 코멧이 처음으로 웃으며 말을 꺼냈다. 아군이 있는 곳, 모두의 눈에 공개된 장소에 다다랐다는 안도감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혼돈 그 자체였다. 정복을 차려입은 근위병들은 갑작스럽게 달려든 자들과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이미 급작스러운 사격을 당해 죽고 쓰러진 자들의 수가 제법 되었다.
살이 베이고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습기에 젖어 성공보다 불발이 더 잦은 총기는 바닥에 쌓여 낙엽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왕의 위험을 알리는 다섯 번의 격발에도, 그 누구도 그를 찾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폐하, 뒤로 물러서십시오.”
코멧이 내내 어깨에 메고 있던 총을 바닥으로 대충 풀어 던지며 칼을 빼 들었다. 어차피 머스킷이 그리 유용한 무기가 되지 않을 것을 직감한 탓이었다. 로비엔은 망연히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물비린내에도 묻히지 않은 피비린내가 지독했다.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는 가치가 여럿의 죽음과 대응할 수 있는 가치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이 절대로 그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로비엔이 이를 악물었다. 설령 그게 하늘의 의지더라도 그에게는 무사히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저울 위, 그의 목숨 쪽에 무게를 더 놓는 비겁자가 되더라도.
“무의미한 싸움은 허락하지 않는다.”
“폐하.”
“여기서 깃발이 꽂힌 위치를 따라가면 사냥터의 입구야. 최대한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한다.”
로비엔이 명령했다. 주군의 명을 어길 수 없는 코멧은 마지못해 칼집에 칼을 다시 꽂아 넣으면서도, 주위를 예민하게 살폈다. 그것이 그가 맡은 바이기에, 로비엔도 그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로비엔의 무리는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걸음을 재촉했다. 십수 번은 드나들었을 사냥로가 이토록 길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저기 왕이 있다!”
그러나 숲 안쪽과 비교하면 드러난 길은 몸을 숨기기에는 제한적이었다. 결국 붉은 망토를 발견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려 있었다.
“국왕 폐하를 보호해!”
“뚫어!”
그를 보호하고자 저지선을 이룬 근위병들과 그 선을 뚫기 위해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사병들 사이에 완벽한 대치가 이루어졌다. 처음 숫자로는 근위병들이 더 많았으나,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한 수가 제법 많았던 탓이었다.
이대로 입구까지 달린다면 위험을 피할 수 있을까? 별궁에 대기 중인 근위병들은 어떻게 불러와야 하지?
로비엔은 생각을 방해하듯 온 사방에서 울리는 무기들의 마찰음을 넘겨 들으며 주변을 살폈다. 비가 조금씩 잦아들어 사위를 적당히 분간할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
“…….”
입구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말을 탄 인영들이 보였다. 한둘이 아닌 숫자인데, 다가오는 자들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비에 젖은 회색 깃발이 죽은 목숨만큼이나 축 늘어져 있는 탓이었다.
회색 깃발을 배경색으로 하는 가문은 리만 후작과 보가트 공작가.
긴장을 내려놓지 않은 단단한 가슴 아래, 기대감과 절망이 뒤섞인 감정으로 인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로비엔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기를 대충 훔쳐 내며 푸른 눈을 선명히 떴다.
“왕을 호위해!”
드마셸이었다.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이토록 달갑게 느껴진 것이 처음임을 깨달은 순간, 탄식처럼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로비엔은 그제야 제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에게 돌아갈 수 있다.
명료한 그 사실 하나가 이토록 기쁜 일이라는 사실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