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100)화 (100/151)

# 100.

로잘린이 보가트 저택을 찾아가기 전. 클로티 부인이 지옥 같은 진실을 털어놓았던, 막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하던 그날. 로비엔은 마침내 모든 비밀을 목도하기 직전에 있었다.

“로잘린.”

로비엔은 급하게 몸을 굽혀, 쓰러질 듯 무너지는 로잘린의 몸을 품 안으로 당겨 안았다. 이 상태로는 식사를 이어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아이를 안은 모양새로 로잘린을 안고 계단을 올랐다.

로잘린이 얼굴을 묻은 목덜미가 조금씩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보다 오른 체온과 간헐적으로 내쉬는 거친 숨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과 괴로움이 담겨 있었다.

“괜찮으니 천천히 말해요.”

침실로 돌아온 로비엔은 로잘린을 품에 안은 상태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익숙한 방 안, 커다란 손바닥이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리며 진정을 도왔다. 덕분에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 눈시울이 붉어진 채 로잘린이 몸을 떼어 냈다.

언제까지고 격해진 감정을 끌어안고 말을 망설일 수는 없었다. 이건 단순한 배신이 아니었으니까.

“클로티 부인이 사냥제에서, 역당들이 전하께 칼을 겨눌 것이라 했어요.”

“…….”

“그 역모의 주동자는…….”

선왕비와 왕제들.

로잘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사실을 털어놓았다. 로비엔은 언젠가 그가 어렴풋이 짐작했던, 끔찍한 배신의 낌새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렇군요.”

아니, 거짓이었다. 사실 알 수 있는 순간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잠깐의 시간을 두고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로잘린에게만 공격성을 품고 있었다고 하기에는, 이상한 순간들이 아주 많았다.

로잘린을 비로 받아들인 이상, 그녀의 평판은 로비엔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로잘린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는 순간, 선왕비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막무가내로 그의 자식을 해쳐 그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

보가트 공작가에 선왕을 시해했다는, 반역에 준하는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

대놓고 로비엔과 반목하며, 보가트 공작가를 감싸는 모습이 수상쩍다는 뉘앙스를 풍긴 것도 그녀였다.

“역모의 이유로 내세운 것은 보가트 공작가가 이미 선왕을 시해하여 반역을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고, 폐하께서도 알고 계셨으나 묻었다는 것이라고 했어요.”

반역, 반역이라.

보가트 가문이 반역을 저지른 정황이 분명하지만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분에 불과할 테고, 실제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엇일지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본능적인 회피였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요, 폐하.”

로잘린이 실제 이유를 말하기 직전, 로비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눈물에 젖은 애처로운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로잘린과 똑바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해 돌아서고 말았다.

비겁하게도.

“로잘린, 잠시만.”

로잘린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로비엔은 외면하고 싶은 자신을 자조했다. 동시에 회의적인 질문을 곱씹었다.

언제까지 비겁하게 도망칠 수 있을까?

그 순간, 로잘린이 가느다란 두 팔로 등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도망갈 길을 잃어 갇힌 듯 답답한데도, 동시에 그 품에 온몸이 푹 안긴 것처럼 안정감이 일었다. 무서울 정도로 극렬한 양가감정이었다.

“듣고 싶지 않으실 거 알아요. 저도 말하고 싶지 않지만.”

영원히 피할 순 없다.

스스로에 대한 질문은 그를 꼭 끌어안은 로잘린이 대신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던 것도 같았다. 로잘린은 그의 가장 비겁하고 어리석은 순간에, 그가 회피하지 않도록 붙들고 있었다.

“그래도 아셔야 해요.”

로잘린이 울먹이며 그를 설득했다. 당장이라도 도망갈 계획을 세운 사람을 끌어안은 것처럼, 로잘린이 마주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로비엔이 로잘린의 손을 떼어 낼 것처럼, 작은 손등 위를 덮어 잡았다.

“클로티 부인이 말하길, 선왕비는 폐하의 친모가 아니라고 했어요.”

로잘린이 마침내 더 망설이다가는 끝내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할 말을 다급히 털어놓았다. 그 순간, 닿은 온몸으로 가엾을 정도로 뻣뻣하게 굳어 버린 사내의 몸이 느껴졌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그녀가 진짜 당신의 친모라고 했어요.”

로잘린은 지독하게 현실주의자였다. 그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신을 믿지 않았다. 그래 왔다. 그러나 지금 신이 있다면 묻고 싶었다.

신이시여. 진실로 당신이 존재하신다면, 우리의 삶에 고통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이 고통은 우리가 태어난 것 자체로 죄인이기에 주어진 것입니까? 누군가는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주신다고 하지만, 그 삶의 근간까지 흔들어 버리는 것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인 것입니까?

“폐하.”

힘없이 허벅지 옆으로 툭 떨어진 커다란 손. 로잘린은 로비엔의 허리 앞에서 마주 잡았던 손을 풀어 그의 등을 짚은 채, 열없이 뜨거운 이마를 널따란 등에 갖다 대었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혼자 뒀어야지. 그냥 버렸어야지…….”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눈물이 로비엔의 등 뒤로 하릴없이 떨어져 내렸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로비엔의 축축한 등 뒤에서 이마를 떼고 한 걸음 물러선 로잘린이 그의 팔을 잡고 몸을 돌렸다. 미약한 힘이었는데도 그가 흔들렸다. 그러나 달빛을 등진 사내의 얼굴은 물기 하나 없이 건조했다. 오히려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이 비극이 로잘린만의 것인 것처럼.

“…….”

그러나 그게 슬프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제 상처를 보듬는 방법을 몰라, 위로하는 방법은 더더욱 모른다. 하지만 지금이 맞닿은 온기가 소중한 순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로잘린이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성격처럼 곧은 턱을 매만지며 끌어내렸다. 로비엔이 순순히 그 손길에 저를 맡긴 채 허리를 조금 굽혔다. 로잘린의 부드러운 입술이 건조한 그의 입술 위에 닿았다.

어깨와 단단한 가슴팍을 더듬고, 몸을 갖다 대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안겨 드는 부드러운 몸. 그 품에 안기고 싶었고, 그 품을 안고 싶었다.

로비엔은 제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절제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로잘린의 머리를 붙잡고, 어린아이처럼 맞대고 있을 뿐인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두 몸이 푹신한 침대 위로 기울고, 단단하고 조금은 거친 손이 드레스 아래로 스며들었다.

종아리부터 허벅지를 훑어 올라가는 손길은 부드럽다 싶었다가도, 허벅지나 가슴을 꽉 움켜쥐는 우악스러운 손길은 야만스럽기 짝이 없었다. 로잘린은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얼굴로 다시 로비엔의 얼굴을 끌어 올렸다. 그가 애틋하게 부드러운 코에, 볼에 입술을 맞추곤 이마를 비볐다.

“흐윽…….”

동시에 그의 몸이 밀려들었다. 로잘린이 신음하며 목을 뒤로 젖혔다가,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로비엔은 로잘린이 진정할 때까지 그저 몸을 겹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당신을 아프게 하는 것들은 그냥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잔인하다고 해도 좋고, 그악스러운 것이라 해도 좋았다. 제가 가진 유일한 것에 생채기를 내는 것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세상에서 존재를 지워 버리고 싶었다.

로비엔은 희미하게 웃으며 로잘린의 연약한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었다. 무슨 마음으로 내뱉는 소리인지 안다는 것처럼.

“나를 미친 여자라고, 나쁜 년이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태어난 게 잘못은 아니잖아. 나쁜 건, 당신을 해치려는 그 사람들이라고요!”

“…….”

“어머니가 죽은 이후에 유일하게 제대로 가져 본 가족은 당신뿐이에요.”

“로잘린.”

“그러니 이 배신감으로 말미암아서라도 당신은 살아야 해.”

로잘린이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당신은 무너져선 안 돼. 날 두고 죽어서도 안 돼.”

제 비가 이렇게 울보였던가. 로비엔은 저 대신 서럽게도 울어 주는 로잘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약속해요. 날 혼자 남겨 두지 않겠다고.”

까마득한 혼란과 고통, 애틋함, 절망. 모든 것이 혼돈처럼 뒤섞인 그 순간에도 이 여자 하나가 그를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잘린은 자신과 비교하면 너무 작고 가녀렸다. 겉으론 눈에 보이는 건 죄다 물어뜯을 수 있는 야생동물 같지만, 사실 그 속은 비가 온 후 물러진 지반처럼 물렁하기 짝이 없었다.

이토록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것만 봐도.

로비엔의 손이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언제까지고 기대어 있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내 다리로 일어서야지. 제대로 서서 품에 끌어안아 주어야지.

“약속할게.”

뜨거운 숨이 섞인 입술이 로잘린의 이마에 닿았다. 두 사람 모두 옷을 입은 상태라 둘의 몸이 맞닿을 때마다 버석거리며 의복이 스치는 소리가 선연했다.

좀 더 닿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로비엔이 두 팔로 로잘린의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몸을 감싼 옷 위로도 체온이 뜨거웠다.

“약속해.”

그가 다시 한번 맹세하며, 짜디짠 맛이 나는 입술을 베어 물었다. 곧 보랏빛 드레스 자락이 물결치듯 너울거렸다. 고통인 듯 쾌감인 듯, 가슴 안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온갖 것들이 요동쳤다.

사실 눈을 감고 싶었던 것일 뿐, 로비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늘 평화 속에서, 그에게 주어졌던 당연한 것들을 누렸던 로비엔은 부왕이 죽은 날 정신 차렸다. 물려받을 왕좌에 대한 새삼스러운 감상을 내놓던 순간이었다. 그는 황금빛 왕좌가 스쳐 온 시간과 그 형태를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누군가 의도한 듯, 그의 삶에 꾸준히 존재했던 평화가 더 이질적이었다.

“폐하.”

하지만 버텨야지. 숨이 턱턱 끊기는 가운데에서도, 이토록 저를 단단히 붙잡아 주는 사람이 있으니.

“이름, 이름으로 불러요.”

날카로운 듯 예민한 듯, 그러나 숨기지 못한 관심과 애정이 섞인 목소리. 이 부드러운 몸과 체온, 언제나 그를 똑바로 응시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없이 살아왔던 기억은 나지 않았다.

“……로비엔.”

그는 다시 한번, 간절한 애정을 담아 제 이름을 부르는 입술에 잠겨 들었다.

로비엔이 로잘린을 꼭 끌어안은 채 몸의 위치를 바꾸었다. 로잘린은 그의 가슴팍에 늘어진 채 지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틀 뒤에 궁을 빠져나가요.”

“……폐하께서는요?”

“그쯤 동부로 떠날 겁니다.”

로비엔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 어디서도 까마득한 슬픔과 절망에 잡아먹힌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이미 한 가지 분명한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고통마저 언젠가 그의 삶의 일부가 될 것이다.

수많은 날이 있었다. 그는 그 속에서, 절대로 지나가지 않을 것 같은 순간도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교훈을 얻었다.

죽은 자가 아니라면 멈춘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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