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승마 경기에서 명마로 소문이 났던 로비엔의 말은 사냥터에서는 결코 명마가 아니었다.
본래 말은 그 덩치에 비해 겁이 많기도 하거니와, 그의 말은 그가 사용하는 용도에 맞게 사냥보다는 승마에 익숙했다. 갑작스럽게 지근거리에서 경험한 총소리와 피 냄새가 익숙하지 않아 사달이 나고 만 것이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말은 방향을 가리지 않고 무작정 내달렸다. 달려가는 길을 조금이라도 익혀 보려고 둘러보기는 했다. 그러나 늘어진 나무, 축축하게 젖은 이파리, 질척한 흙, 나무껍질 따위들을 제대로 눈에 담을 새도 없이 지나치고 말았다.
고요한 숲의 어딘가. 제풀에 지친 듯 말이 푸르르, 거친 숨을 내쉬면서 멈추어 섰다.
말의 등에서 몸을 낮추고 진정하기를 기다렸던 로비엔이 그제야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등을 세운 그가 유려한 동작으로 말안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진정하라는 듯 평소보다 뜨끈한 말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폐하!”
코멧과 다섯 명의 기사들이 바로 따라붙어 그를 놓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않은가. 로비엔은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코멧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자들이 다급하게 그에게 다가왔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 숲 깊숙이 들어올 요량은 아니었는데.”
“낙마하지 않으신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흥분한 말은 주인이 타고 있든 아니든 날뛰며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로비엔이 낙마하지 않고 무사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다른 자들은?”
“놀란 말을 진정시키느라 뒤를 따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코멧이 주위를 유심히 둘러보며 대답했다.
“길을 멀리 벗어난 모양입니다.”
로비엔의 시선 역시 근처를 훑었다. 말이 대책 없이 아무 곳으로나 달린 탓에, 표시해 둔 길로부터 멀찍이 떨어지게 되었다. 주변에 파란 깃발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파란 깃발이 꽂힌 길에 일정 거리를 두고 늘어서 있을 근위병들과도 역시 멀어졌을 것이다.
“길이야 다시 찾으면 그만이니.”
그러나 그는 여전히 혼자가 아니었고, 그의 곁에 있는 모두가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한 가문만 만나게 되더라도, 데리고 온 수행원의 숫자가 바로 옆에 있는 그의 기사들과 비슷한 규모라는 것은 다소 비극적인 사실이었지만.
게다가 그 수행원들은 모두 시종으로 둔갑한 사병일 것이다. 로비엔이 혼자 남는 일 같은 건 결코 발생할 리 없으니, 고작 한 놈만 총을 다룰 줄 아는 자로 데려왔을 리 만무했다.
“다행히 빛이 잘 들지 않고 안개가 껴서, 기척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원거리에서 겨냥하기는 어려워. 일단은 눈에 띄지 않도록 말을 묶어 두고, 나무나 덤불 뒤에 몸을 숨겨 길을 재탐색한다.”
차라리 그의 근위병들이 오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왕의 안위를 걱정하여 그를 찾아낼 때까지 쭉 숨어 있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역모를 꾀하는 자들이 근위병들이 그를 찾아낼 때까지 가만히 지켜볼까?
확신컨대 아니었다. 그를 고립된 상황에 만들기 위해 이런 상황까지 만들어 두지 않았는가. 차라리 최대한 빨리, 안전한 위치를 찾아가는 편이 나았다.
작은 생채기라도 만들어 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던 로잘린을 생각하면 그래야만 했다. 오직 자신을 이유로, 그 밤처럼 우는 모습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일단 모두 깃발을 찾는 일에 주력해.”
코멧이 명령했다. 일사불란하게 근처의 나무에 말을 매어 둔 기사들이 주변을 조심스럽게 탐색하기 시작했다. 로비엔은 아름드리나무의 근처에 몸을 숨기고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가 몸을 사릴 경우도 이미 경우의 수에 넣어 둔 것이 분명했다. 본래 그는 사냥에 그리 열성적인 유형도 아니었으니, 나서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시간이 얼마나 있지?”
로비엔이 물었다. 여전히 그 곁에 붙어 경계를 늦추지 않던 코멧이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떨어진 이파리들에 가려진 부분들도 있지만, 흙이 드러난 곳은 말발굽이 찍혀 있어 그들을 추적해 오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길어도 반 시간, 그 이상은…….”
코멧이 주저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로비엔은 담담한 얼굴로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 전에 빨간 깃발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하겠습니다.”
고위 귀족. 그것도 선왕비의 가문인 피베체 공작가가 관계된 역모. 증거 하나 없이 그들을 고발한다면 모든 것이 무위로 끝나게 될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귀족의 힘을 억지로 꺾으려 한다며 로비엔이 역풍을 맞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왕의 면전에 직접 총구를 겨눈다면, 고문을 해서라도 역당 모의를 증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까지 흘러오고 말았다.
실제 무대로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라는 건 코멧도 모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런 위험까지 감수하고 있는 그의 주군이 신기했다. 일이 잘못된다면 그는 진실로 이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었으므로.
“폐하께선 겁이 나진 않으십니까?”
코멧의 물음에 로비엔이 희미하게 웃었다.
“왕은 하늘이 내렸다 하지만, 그대도 알지 않나.”
“…….”
“물리적으로 왕의 몸 역시 그 모체로부터 태어나, 언젠가 죽는 인간일 뿐이야. 두렵지 않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이겠지.”
무던한 목소리였다. 왕이 자신이 다른 인간들과 다를 바 없다고 인정하는 순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왜? 왕은 불사신이라는 생각이라도 했나?”
기함한 표정이 드러났을까, 로비엔이 코멧을 보며 비죽 웃었다.
“그랬다면 선왕께서 아직도 살아 계셨을 테니, 내가 왕이 되었을 리가 없지.”
맞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코멧은 마치 아이를 새가 물어다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충격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새삼스러운 그의 충격을 물러나게 한 것은 총소리였다.
다다닥, 몸집이 작은 동물이 쫓기어 달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안개로 시야가 다소 어둡고 청각에 예민해져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바로 근처는 아니었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 사람이 말하는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아, 아군일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폐하,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코멧이 낮게 속삭였다.
동의하는 바였다. 몸을 낮추던 로비엔이 등을 덮고 길게 내려오는 붉은 망토가 거추장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벗을 수는 없었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기사들이 그의 존재를 파악할 방법은 단 하나. 오로지 왕을 상징하는, 이 붉은색의 망토뿐이었다.
“모두 거리를 유지해.”
저벅저벅, 사람이 걸어오는 것이 명백한 소리였다.
“폐하께서 자리를 선점하고 계셨군요.”
뿌연 안개 너머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카를로스 백작이었다. 시종 하나를 동반한 그는 총을 어깨에 멘 채, 로비엔을 공격할 의사가 조금도 없다는 것처럼 무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결에 찾은 곳이 명당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굳이 이쪽에서도 알고 있다는 티를 낼 필요는 없다. 로비엔이 미지근한 온도로 대답했다.
“하하, 뭐……. 어디서든 큰 놈을 잡으면 그게 명당이 되겠지요.”
카를로스 백작이 느긋한 얼굴로 웃었다. 그는 여전히 느슨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코멧은 로비엔에게 몸을 바짝 붙인 채 강도 높은 호위를 지속하고 있었다.
“시종들은 어디 가고 그대 혼자 서성거리고 있나?”
“사냥감을 몰이 하러 갔습니다.”
카를로스 백작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 사냥감이 자신인지, 진짜 짐승인지 가늠할 수는 없었으나 카를로스 백작의 여유로운 태도가 더욱 긴장감을 돋웠다.
“폐하.”
널찍이 펼쳐져 주변을 살피던 기사 중 하나가 가까이 다가와 코멧의 귓가에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코멧은 즉시 그 내용을 로비엔에게 전달했다.
“북쪽에서 무언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숲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고, 그 호수 근처에는 붉은 깃발이 꽂혀 있다. 그리고 깃발이 꽂힌 장소 근처에 그의 사람들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 무대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근처에 호수가 있는 것 같다는군.”
“사르데 숲의 명물로 유명하지요. 수원이니 물을 먹으러 찾아오는 짐승도 많고.”
카를로스 백작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그 순간,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총성이 들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 여럿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코멧이 총구에 화약을 넣었다. 옆을 지키는 두 명의 기사들은 허리춤에 매어 둔 칼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로 이동할 생각인데, 그대는 여길 지키고 있을 건가?”
“시종들이 사냥감을 몰아 오기로 하였으니, 저는 이곳에서 더 기다려 볼까 합니다. 먼저 가시지요, 폐하.”
카를로스 백작이 정중한 태도로 로비엔의 제안을 거절했다. 로비엔 역시 더 권하지 않고 먼저 걸음을 떼었다. 어떤 목적으로건, 이동할 장소를 일러 주었으니 따라올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폐하, 그냥 이동하십니까?”
코멧이 의아하다는 듯 물어 왔다.
“글쎄, 내게 총을 겨눌 자는 이미 정해진 게 아닌가 싶은데.”
“그게 무슨…….”
따라오지 않겠다는 것이 갖는 의미는 여러 개일 것이다. 짐작하건대 그것은, 그에게 총구를 겨눌 자는 이미 정해져 있고, 카를로스 백작의 몫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카를로스 백작의 역할은 몰이, 그리고 후에 로비엔의 칼과 방패들이 그를 찾아올 수 없도록 그의 기척을 지우는 것.
“최대한 빨리 호수 쪽으로 이동하는 편이 좋겠군.”
로비엔에게도 그렇지만, 역적들에게도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숲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그를 홀로 고립시키려는 의도로 보였다.
“모시겠습니다.”
로비엔과 기사들이 이동을 위해 돌아섰다. 두 명의 기사는 여전히 후방을 방비하고 있었고, 코멧과 두 명의 기사들은 정면과 측면을 살피고 있었다.
로비엔은 물소리가 들린다는 북쪽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만일 그의 예상이 맞는다면 아까의 총소리는 이곳으로 모두를 불러들이고자 하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 그에게 총구를 겨눌 기회를 가진 것은 누구인가?
어찌 되었건 간에 호수가 이 근처에 있다. 이전보다야 안전한 곳에 이르렀다는 감정에 다소 안도감이 들었다. 로비엔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재촉했다.
정면에 보이는 나무의 몸통이 유난히 두껍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후방을 방비하던 기사의 발 바로 옆으로 총알이 스쳤다.
모두가 흠칫 놀라 뒤로 시선을 돌린 사이, 로비엔은 총을 장전하는 소리를 들었다. 로비엔의 기사들이 선 자리에서 카를로스 백작을 포함하여 사방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여기서 뵙는군요, 폐하.”
익숙한 목소리에 로비엔이 몸을 돌려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두꺼운 나무의 몸통 뒤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중년의 신사, 피베체 공작의 총구가 똑바로 로비엔을 향해 있었다.
깨달았다. 카를로스 백작과 대화를 나누며 방심하도록 만들 생각이었구나.
피베체 공작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는 아주 짧은 순간!
‘당신은 무너져선 안 돼. 날 두고 죽어서도 안 돼.’
로비엔은 물기에 젖은 얼굴로 자신을 간절히 바라보던 로잘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약속해요. 날 혼자 남겨 두지 않겠다고.’
그러겠노라 약속했는데. 만일 내가 돌아가지 못한다면 홀로 남을 당신은 어떡하지. 그 걱정에 눈도 감기지 않았다.
날카로운 총성이 일그러진 회색빛 하늘을 길게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