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선왕비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뒤로 배열해 있던 하녀들이 라나의 팔을 붙들었다. 라나는 그 앞에서 버티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연약한 귀부인이 여럿의 힘을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호위병들 역시 자신들을 노려보는 선왕비의 날카로운 시선에 못 이겨, 문 앞으로 굳건하게 드리웠던 창검을 거두었다.
성큼 내디딘 구둣발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왕비의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선왕비가 친히 문을 열어젖힌 덕분이었다.
“…….”
아무도 없다. 열린 창문가에 걸린 커튼만 맞바람이 통하며 팔락거렸다.
선왕비의 시선이 고요한 응접실, 텅 빈 침실을 차례로 훑고 지났다.
“직전까지 네 주인의 몸이 편치 않다고 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
“어째서 계시질 않으니?”
선왕비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라나에게 물었다. 선왕비의 하녀들에게 붙들린 라나는 재갈이라도 채운 것처럼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제 주인이 아니라 대답도 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선왕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입을 찢는다고 하면 말할까?”
“죽인다고 하여도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엄청난 충성심이구나. 정작 네 주인은 항상 같이 다니던 그 하녀만 챙겨 나간 것 같은데.”
과장된 목소리가 라나를 조롱했으나, 라나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이었다.
‘라나. 그대 역시 궁을 잠시 떠나 있어요.’
‘저는 이곳에 있겠습니다.’
라나가 로잘린의 침실을 지키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마저 없다면 로잘린이 사라졌다는 것을 모두가 금세 눈치챌 것 같았다.
‘레이첼 후작 부인과 마리만 메르센데티 자작가에 숨기세요. 마리의 존재에는 크게 관심이 없을 테니, 저희 가문에까지 사람을 보내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자신까지 없어지면 메르센데티 자작가에까지 병사들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선왕비는 뜻하지 않게 목숨을 건진 레이첼 후작 부인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다.
그녀의 주인은 아직 레이첼 후작 부인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드러낼 마음이 없었다. 그러니 꽁꽁 감추어야 했다.
“정말 입을 꾹 닫고 있구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벙어리인 줄 알겠어.”
“…….”
“다른 사내와 외도하여 이혼당했다는 추잡한 누명을 벗겨 주었다더니, 영혼까지 바치려는 모양이야. 시녀 하나는 제대로 주워 왔네. 선왕께선 왜 그 재판에 그 애들을 보내셨는지 모르겠구나.”
그렇지만 않았다면 여태껏 시녀 하나 없는 반편이 같은 왕비로 명예로운 삶이었을 텐데. 선왕비가 중얼거렸다.
“제 목숨을 구해 주신 분입니다. 모욕하지 말아 주십시오.”
라나의 대꾸에 선왕비가 고개를 비슥이 기울인 채, 라나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네가 이렇듯 시간을 끈다고 해서, 그 애가 어디로 갔는지를 함구한다고 해서 내가 못 찾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결국, 선왕비는 흥미를 잃은 얼굴로 라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로비엔이 위험한 사냥터에 왕비를 데려갔을 리가 없잖니. 늙은 노부부만 남은 메르센데티 자작가에는 위험하니 가지 않겠다 했을 테고, 제집에나 갔겠지.”
이제는 이 지지부진한 연극 놀이를 끝낼 때가 왔다.
“한데 왕비는 제집으로 왜 도망하였을까?”
왕비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토록 고요히,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리를 비웠다는 것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선왕비 역시 익히 알고 있는, 왕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 빠져나가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구태여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선왕비의 얼굴에 즐거움이 선명한 웃음기가 드리워졌다.
“죄인이 제 죄가 들킨 것을 알고 도망친 모양이야.”
“…….”
“잡아 와.”
비밀 통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선왕비가 명령했다.
“선왕 시해의 주동자인 왕비, 로잘린 보가트 르 칼라브리아.”
다미안의 비서가 찾아왔다. 알아낸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왕비를 마주 대할 수 없었고, 다미안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가 전하기를, 궁에서 왕실의 근위대를 파견했다 합니다.”
그의 비서가 전해 온 소식은 예상한 것이었다. 로잘린의 부재를 알아차린 선왕비가 잡아들이기를 명한 것이다.
다미안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보가트 공작가는 수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 근위병들이 하루 안에 당도할 겁니다.”
“저택 내에 남은 인원과 빌린 사병으로 근위대에게 대적할 수 있을까?”
그의 미간에 파인 주름만큼이나 고민은 심각하련만, 그를 바라보는 로잘린은 담담했다. 오히려 대적할 수 있느냐고 물어왔을 뿐이었다.
담대한 것도 정도가 있지. 다미안은 그 순간 혀를 차고 싶었다.
“어느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
“하지만 영원히는 불가능합니다. 다른 인원을 다시 보내올 테니까요.”
따라서 다미안은 아주 솔직하게, 그의 짐작을 모두 털어놓기로 했다. 물론 로잘린을 절망하게 만들겠다는 마음가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비극적으로 들리더라도, 로잘린은 그것이 현실임을 알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진짜 문제는 다른 것이고요.”
“그게 뭐지?”
“왕실의 기사들에게는 비전하를 연행해 갈 마땅한 이유가 있으리란 겁니다.”
그들에게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로잘린을 붙들러, 왕실을 지키는 이들이 인원을 꾸려 보가트 공작가까지 올 리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대항하는 것은 곧 왕실의 명을 거부하는 것으로,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 마땅한 이유가 무엇인데?”
로잘린의 물음에 다미안이 말문이 막힌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잘린이 알면 알았지, 자신이 그것을 어찌 알까.
“무언가 죄를 지었다 했겠지요. 제가 어찌 자세히 알겠습니까?”
가끔 이런 식으로 질문하여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건 로잘린의 악취미였다.
다미안이 자신이 어찌 알겠느냐고 물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꼴을 바라보던 로잘린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죄가 무엇인지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지.”
로잘린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도 모를 것이고.”
“…….”
“명을 받고 온 근위병들은 알겠으나, 고작 그 명만으로 내가 진짜로 죄를 지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다미안이 곤란한 듯 한숨을 내쉬던 것을 멈추고, 홀린 듯이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를 덧붙였든 나는 확증된 죄를 가지고 있지 않아.”
“…….”
“감히 죄목 없이 칼라브리아의 왕비를 추포하려 하느냐 물을 거야.”
그들은 사냥터에서 벌어질 반역을 알지 못하니 왕이 돌아올 거라 믿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왕비가 왕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돌아온 왕이 불분명한 죄목으로 왕비를 강제로 연행했다는 것을 별것 아닌 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명백한 대답을 얻기 전까지는 로잘린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러고도 그들이 물러나지 않는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러고도 그들이 물러나지 않는다면, 끌려가지 않도록 버텨야지.”
다미안의 물음에 로잘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실 별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어차피 저택 안에서만 버티고 있는 것은 결국 시간 싸움에 불과했다. 로비엔이 무사히 돌아와 자신을 구해 주거나, 아니라면 그도 죽고 자신도 여기서 죽어 버리거나.
“두렵지는 않으십니까?”
“……이제 두렵지 않아.”
로잘린은 자신을 바라보는 다미안의 시선에 섞인 감정을 읽었다. 얼마쯤은 놀랍고, 또 얼마쯤은 감탄스러운 시선이었다. 놀라움, 동경, 그리고 애정. 사실 로잘린을 쫓는 다미안의 시선은 대부분 그랬다.
“그대는 이만 돌아가.”
로잘린의 권고에 다미안이 놀란 눈을 했다.
“지금 돌아가란 말씀입니까?”
“돌아가. 래비어트에게는 위험을 끼치지 않겠다고 했잖아.”
물론 로잘린이 래비어트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기는 했다. 하지만 한 명의 손이라도 더 필요할 시기가 아닌가? 다미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그대의 아비가 그대의 비서를 이리 보낸 것 역시, 상황에 대한 언질도 있겠지만 어서 래비어트로 돌아오라는 의미일 테니.”
그러나 로잘린은 그의 혼란에 말려들지 않았다. 어차피 다미안은 누군가를 지키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운동이라고는 가끔 승마나 하는 정도에 불과한 자. 자기 자신도 지키기 바쁠 터였다.
“약속대로, 빠른 시간 내에 사병들만 저택으로 보내.”
“…….”
“폐하께선 곧 돌아오실 거야. 저택에 같이 머무르고 있다가 괜히 그대의 머리통이 날아갈지도 모르지 않나.”
로잘린의 장난에도 다미안의 눈에 어린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을 끄는 동안 몸을 피할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도망쳐 버리면 폐하와 길이 엇갈릴지도 몰라.”
로잘린은 로비엔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도망칠 순 없다. 여기서 기다리기로 했으니까.
“그리 말씀하신다면,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미안은 로잘린의 명에 따르기로 했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얼굴에서는 어떠한 두려움이나 혼란도 비치지 않아, 로잘린이라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자신을 지킬 수 있으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동의를 구하듯 보는 다미안의 눈동자에, 로잘린은 성의 없이 고개만 두어 번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사실은 로비엔의 무사 안위를 빌며 밤을 새우다시피 한 것이 며칠째라, 이제는 로잘린에게 아무래도 좋은 일이 많았다. 보가트 공작가로 숨어들어 와 지낸 게 얼마나 된 일인지조차 가물가물했다.
“무사하십시오.”
다미안이 방을 빠져나가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로잘린은 동시에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늘어졌다.
무사하라는 게 인사라니.
다미안이 마지막으로 남긴 인사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샜다. 물론 즐거운 웃음은 아니었다.
‘두렵지는 않으십니까?’
어쩌면 그렇게 흔들리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느냐는 의문이 섞인 다미안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이제 두렵지 않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두려웠다. 로비엔의 이름과 왕비라는 그녀의 지위를 들먹여도 근위병들이 물러서지 않을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그가 오기도 전에 머리채가 잡혀 궁으로 끌려간다면…….
다미안 앞에서 드러나지 않도록 숨겼던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런 때일수록 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강한 척 표정을 유지해야 한다. 자신을 지켜보는 이들이 더욱 혼란스러워하도록.
로잘린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외부인을 차단하는 저택 입구의 높은 창살 쪽으로 향했다. 유난히 뾰족해 보이는 그 끝이 자신과 그를 향한 것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이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것이 자신들을 향해 온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