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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97)화 (97/151)

# 97.

다미안이 흐린 눈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달싹거리는 입술을 보고 있는 잠깐 사이에도 심장이 달음박질을 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이에 둔 테이블 위로 한 손을 짚고, 자유로운 한 손으로 다미안의 멱살을 잡아 제 앞으로 끌어당긴 로잘린이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

“내 눈 보고 똑바로 말해.”

“…….”

“무엇 때문에 그리 소스라치게 놀랐느냐고!”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은 아주 끔찍하다. 그의 태생이 사생아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접하는 것처럼 대체로 불러들이는 결과가 참혹했으니까. 그러니 그의 목숨과 관련된 것이라면, 예상할 수 없는 일은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말 안 해?”

“폐하.”

“뺨이라도 갈겨야 그 입을 열겠어?”

멱살을 틀어쥔 작은 손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 기원은 분노인 듯도, 불안함인 듯도 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다미안이 막막한 얼굴로 그제야 입을 열었다.

“최근 카를로스 백작이 래비어트 상단과 연계된 무기상으로부터 총기와 화약을 사 갔습니다.”

“……얼마나?”

머스킷은 고급 기술을 활용하여 제작하는 총기고, 대량 생산이 어려워 생산 수량이 몹시 적었다. 자연스레 판매 가격이 높아서 평민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 살상력과 희소성을 고려해 왕족 및 고위 귀족, 왕실 근위대, 그리고 비상시 소집될 군의 무기로만 용도가 제한되었다.

그나마 규제가 해제된 것은 가장 최근, 행정 제안 기구에서 사냥꾼들과 영지 관리를 담당하는 사병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한 경우뿐이었다. 아직도 총기보다 검의 사용이 우세한 건 그 때문이었다.

사병들?

문득 하나의 단어에서 생각이 멈추었다. 로잘린의 녹빛 눈동자가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연약한 나뭇잎처럼 떨리고 있었다.

“얼마나 사 갔느냐고!”

“머스킷 200자루를 사 갔습니다.”

이번 사냥제에 왕의 수행원은 500명 남짓. 그중에 시중을 드는 자들과 요리사 따위 등을 제하면 근위병들은 그보다 적다. 그나마도 시간마다 반씩 교대를 하니, 사냥터에 주둔하고 있는 자들은 대략 그 숫자의 반절.

그 와중에 근위병들과 대적할 사병들이 다량의 총기를 들고 있다면, 갑작스레 기습이라도 당한다면.

“비밀스럽게 그만큼이나 팔았어? 왜?”

“규제가 완화되어 영지 방비 목적이라 하였습니다. 기회만 생기면 몰래 무기를 갖추는 가문들은 널려 있지 않았습니까.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래비어트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대외적으로 금지된 일이더라도 이런 일은 몹시 비일비재했다. 보가트 가문의 경우 무기상을 가지고 있기에, 아예 저택 내에 생산된 총기의 일부를 보관해 두지 않았던가.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었고, 래비어트 상단은 의도치 않았더라도 반역자들에게 무력적 도움을 준 셈이 되었다.

“하지만 근위대의 규모에 비할 바가 아니니 괜찮을 겁니다. 보가트 공작이 사병을 끌고 갔으니 추가 병력도 있고요. 그들은 근위대처럼 지속해서 훈련해 온 자들도 아니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폐하.”

“누가 제가 죽을 날을 알고 죽어?”

다미안의 멱살을 쥔 주먹이, 꽉 쥐어 피가 통하지 않다 못해 희게 질려 있었다.

“폐하께서 혹시라도 잘못되면.”

로잘린이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이 말하는 소리가 다미안의 귓가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아니, 귀한 몸이 조금이라도 상하신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다는 듯 두 눈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널 죽일 거야!”

이제 로잘린은 숫제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흥분한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반쯤 일어선 몸은 그 분기를 겨누기 힘든 것처럼 흔들렸다.

“내가 직접, 네 심장에 칼을 꽂아 넣을 거라고!”

바락바락 소리를 내지르는 모습은 우아한 왕비라기보다는 악바리 같았다. 추접스러운 방법이라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사용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던 로잘린 보가트처럼. 로잘린도 그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늘 로잘린 보가트였다. 왕세자의 비가, 그러다 왕의 비가 되었으니 겉으로만 우아한 척하며 살았을 뿐이다. 왕관은 로잘린 보가트의 어떤 것도 바꿀 수 없었다.

“내가 직접 죽일 거라고. 알아들어?”

끝내 휘청거리며 테이블 위로 무너지는 몸을 받친 다미안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

“그만 울어.”

다미안의 도움을 받아 힘없는 몸을 간신히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어 앉은 로잘린이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볼에 가져다 댄 손가락 끝이 금세 축축해져서,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 사람은 죽으면 안 돼.”

로잘린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아직 아무 말도 못 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당신 편이라고. 당신이 왕의 적장자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고. 우리가 이토록 애틋한 사이가 된 건, 당신이 왕족이고 내게 왕관을 씌워 준 것 때문이 아니라고.

“좋아한다고도, 나는 단 한 마디도…….”

로잘린이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거친 숨을 터뜨렸다. 돌아올 거야, 그렇게 믿으면서도 제 마음속을 차지하고 앉은 사람의 안위가 걱정되는 마음이 자꾸만 로잘린을 갉아먹었다.

다미안은 난생처음 보는 연약한 로잘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다미안은 그제야 제가 어쭙잖은 마음으로 품었던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깊은 마음을 가졌는지, 자신이 그녀에게 어느 정도의 존재였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돌아오실 거야.”

로잘린에게는 일방적이고 폭력적이었던 이 하잘것없는 마음을, 이제는 확실히 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게 약속했으니까 무사히 돌아오시겠지.”

위로하듯 속삭이는 다미안의 목소리에 로잘린이 눈을 감았다. 현기증이 이는 것처럼 어지러이 뒤섞이는 생각 속, 단 하나의 불안한 믿음을 굳건히 세우려고 노력하며.

그래. 돌아온다 했으니 당신은 돌아올 것이다. 당신은 늘 내게 약속한 걸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니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내 아픔만큼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니까. 당신을 믿고, 당신의 맹세를 믿는다.

하지만 사실.

“맞아, 돌아올 거야.”

“…….”

“돌아와야지.”

맹세하지 않았더라도 돌아와야지, 로비엔. 당신을 잃고 홀로 남을 나를 두고 눈을 감으면 안 되지. 나를 사랑하잖아. 내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조차 듣지 않고 죽어 버리면 안 되지.

로잘린이 젖은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눈동자는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 사랑이 비극일 리가 없다는 믿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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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 안에는 삭막한 평화가 감돌았다.

로비엔이 동부의 사냥터로 떠난 것이 사흘째. 로잘린은 제 침실에서 두문불출하며 나오지 않았다. 대신 선왕비의 거동이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담대해졌다.

새로 이동한 소머 궁에 틀어박혀 귀부인들을 초대하고, 티타임이나 가지며 조용히 사는 것처럼 보였던 선왕비가 밖으로 몸을 내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선왕이 있을 때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던 피베체 가문의 사람들이 궁에 자주 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자들은 모두 왕이 없으니 기댈 곳이 없어진 왕비는 몸을 움츠리고, 선왕비는 기지개를 켰다고 평가했다. 주변인들이 보기에 기 싸움의 승자는 명확해 보였다. 오래도록 왕궁의 주인이었던 선왕비가 고작 평민에게 꺾일 리가 없었다.

“왕비는 오늘도 조용하다니?”

“예. 특별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습니다.”

클로티 부인이 선왕비의 귀에 어여쁜 빛깔로 반짝이는 사파이어 귀걸이를 걸어 주며 대답했다. 선왕비는 여전히 클로티 부인이 로잘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사실을 고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클로티 부인은 이 침묵과 평화가 조금 더 길게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것이 국왕 부부의 안전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대는 보는 눈이 참 좋아.”

선왕비가 거울 너머로 수려하게 보이는 제 외형을 보고 만족스러운지 흡족하게 웃었다. 클로티 부인의 안목과 섬세한 손길을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왕비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하녀들이 황급히 드레스 자락을 정돈해 주었다.

“제 남편이 없으니 침실에 박혀 나오지도 않고, 윗전에 인사 한 번을 할 줄 모르는 괘씸한 며느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사실 궁금하지 않아.”

“당연한 일입니다.”

클로티 부인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선왕비는 제 말에 맞장구를 쳐 주는 게 좋은지, 아이처럼 보드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윗전이니 먼저 대화를 걸어 볼까 해.”

“예?”

“교육도 할 겸 말이야. 언제까지고 그런 예의범절도 모르는 왕비일 수는 없잖니.”

모든 건 핑계에 불과할 뿐이다. 클로티 부인은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이를 구실로 왕비의 궁을 비집고 들어가서 네 남편은 그 사냥터에서 죽고 말 것이라며 그의 비극을 조롱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리고 혹시 로비엔이 살아 돌아온다면, 감옥이나 다름없을 궁에 가둬 두었다가 인질로 삼을 것이다. 오래 함께한 만큼, 선왕비의 생각쯤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클로티 부인은 혹시라도 제 입술이 꿈틀거리며 불안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굳이 그리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몸을 낮출 것을요.”

“으음, 하지만 오랜만에 그 낯이 조금 보고 싶기는 하거든.”

“…….”

“아직도 건방지게 내 앞에서 대거리할 수 있는지 말이야.”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무어라고 말해야 선왕비가 왕비의 궁으로 걸음 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수없이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의 수로도 클로티 부인이 선왕비의 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마음먹은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결국은 벌어지고 말 일이었기에.

“왕비에게 가 보자꾸나.”

선왕비가 우아한 자태로 걸음을 뗐다. 한 걸음 한 걸음 따라 떼는 것이 고역이었다. 왕비에게 이제 와 도망을 하라고 할 수도, 선왕비에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고 말할 수도 없는 제 처지가 우스웠다.

그 누구에게든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될 수 없는 비겁한 라비앵 클로티.

“선왕비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네 주인께선 무얼 하고 계시니?”

차가운 공기에 마음마저 시렸다. 클로티 부인은 애써 태연한 얼굴을 가장했다.

“며칠째 침실에서 나오지 않고 계십니다. 식사도 잘 하지 않으시고요.”

“폐하께서 잠시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것도 견디기 힘든가 보구나. 아주 부부 금실이 좋은 모양이야.”

선왕비가 비꼬듯 중얼거렸다.

“네 주인을 뵈러 왔으니 고하렴.”

약속도 잡지 않고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것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으나, 선왕비는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왕비께서 폐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진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왕비가 직접 들였다는 메르센데티 자작가의 시녀, 라나가 선왕비의 걸음을 막았다.

“이후에 왕비께서 따로 사람을 보내실 것입니다.”

제 주인을 닮아 괘씸하고 건방진 계집이 아닌가. 선왕비의 차가운 시선이 라나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그러나 라나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건방지게 지금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게로구나.”

“몸이 좋지 않으십니다.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선왕비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조용한 한기였다. 클로티 부인은 시선을 조금 내리깔았다.

“비키렴.”

선왕비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라나는 호위병들이 문 앞으로 드리운 창검 앞에 마치 석상처럼 서서 버티고 있었다.

“네가 그리 버티고 있다 하여 내가 들어가지 못하리라 생각하느냐?”

“아무리 선왕비라 하시어도 이는 명백한 무례입니다.”

선왕비가 코웃음을 쳤다.

“끌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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