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96)화 (96/151)

# 96.

사냥제는 일 년에 딱 두 번, 왕이 직접 초대장을 보낸 귀족들만 참여할 수 있는 연례행사였다. 왕이 특정 가문을 얼마나 신임하고 총애하는지에 대한 기준으로 활용되었지만, 실제로는 고위 귀족들만 초대되어 그들만의 행사로 끝나는 경우가 잦았다.

물론 고위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고 곁을 수행하는 역할로 하급 귀족 가문의 일원들이 포함되는 경우도 종종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번에 참여하는 이들은 왕과 근위대장인 코멧, 그리고 왕제들을 포함하여 총 여덟에 불과했다.

목적은 다르나 추구하는 방향이 같은 탓이었다. 로비엔은 왕권이 흔들리는 것을 만방에 알릴 이유가 없었고, 역모를 꾀한 자들은 관리해야 할 입이 늘어나는 상황과 이 이상의 성과 분배가 발생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국왕 폐하 드십니다!”

어깨에 붉은 망토를 두른 로비엔과 근위대장인 코멧이 나타나는 순간, 뿔 따위를 불어 대는 소리가 기묘한 긴장감과 침묵을 덮었다.

로비엔을 밀착 호위할 자격을 가진 자들을 제외하고, 근위병들은 석상보다도 더 단단한 자세로 곧게 난 길의 가장자리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고개 들라.”

로비엔은 예를 거두도록 하고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차분히 설명했다.

“어제 산책을 하며 둘러보니, 최근 비가 많이 와 평소보다 운무가 짙어.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먹구름이 낀 상태니, 숲속으로 들어가면 더 어두울 거야. 시야 확보에 주의하는 편이 좋겠어.”

로비엔의 시선이 비는 멎었지만 여전히 시커먼 먹구름이 끼고 해가 뜨지 않는 하늘로 향했다. 동시에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망토 자락을 휘젓고 어깨너머로 사라졌다.

“또한 파란 깃발이 꽂힌 길이 사냥로를 나타내는 곳이고, 그 밖으로 멀리 벗어났다간 산길로 접하게 되거나 맹수를 만날 수 있으니 조심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명예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을 사냥하면 안 되지 않나.”

조금은 장난스럽게 들리는 목소리, 그러나 미묘한 어투였다. 피베체 공작의 시선이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로비엔의 얼굴로 향했다.

“그대들의 실력을 믿어 보지.”

이 사냥터에서 벌어질 모든 일을 예상한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차분한 얼굴이었다. 물론 알고 있다고 한들, 결국 무릎 꿇게 될 그가 해 볼 수 있는 것도 없겠지만.

“시작해.”

로비엔의 손에 들린 머스킷의 총구가 하늘로 향함과 동시에, 허공을 찢는 단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사냥의 시작이었다.

참여자들이 말에 올라타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로비엔 역시 천천히 뒤를 따랐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광경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 상태였다. 근접한 거리에서 로비엔을 호위하는 코멧과 열댓 명의 기사들 역시 긴장으로 어깨가 바싹 굳어 있었다.

비는 멎었으나, 며칠 내내 쏟아진 탓에 수분으로 무거워진 공기가 녹녹했다.

대지 자체도 넓었지만, 산으로 이어지는 널따란 숲은 일반 사내들의 키보다 두 배 이상 길게 뻗은 나무들이 가득했다. 깊이 들어갈수록 안개가 낀 탓에 빛이 잘 들지 않았고,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잎을 떨어뜨리지 않은 나무들은 녹빛이 짙다 못해 거멓게 보일 정도였다.

“바닥이 질척거리니 조심하십시오, 폐하.”

코멧이 말발굽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흙을 밝으며 경고했다.

‘이곳은 본래 운무가 짙은 편인가?’

‘예, 폐하. 먹구름이 짙으면 숲 안쪽은 빛이 잘 들지 않고, 호수 근처에는 물안개가 자주 끼는 편입니다.’

본격적인 숲으로 접어들수록 시야가 차츰 어두워졌다. 로비엔은 별궁의 시종이 대답했던 것을 떠올렸다. 뭐라도 쏟아질 것처럼 먹구름이 잔뜩 낀 날씨, 온 사방을 희게 메운 물안개. 모든 것이 사방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로비엔의 시선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표시된 푸른 깃발을 따라 움직였다. 그 시선의 가장 끝, 무언가를 탐색하기라도 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카를로스 백작이 눈에 띄었다.

‘최근 이곳을 찾아온 자가 있었나?’

‘따로 찾아오는 이들이 있는 것은 아니고, 카를로스 백작의 영지와 산으로 접하는 곳이다 보니 경비병들이 주변을 순찰하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행정 제안 기구의 귀족 관리자로 포함된 자들 중 하나. 문득, 내내 선왕의 시해에만 관심을 기울여 비소 유통에만 신경 썼지만, 총기 역시 그 회의에서 논의되지 않았던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그때부터 사냥제에서의 반역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왕이 죽기도 전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단순히 최근 선왕비와 자신, 그리고 정통 귀족과 신흥 세력이 대립하는 문제가 아니라면?

문득 로비엔의 걸음이 멈추었다.

“폐하?”

몇 걸음 앞선 거리에서 코멧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세운 계획이라면?

제 남편이 증오스럽고, 사생아는 경멸스러워 그녀의 삶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고 싶었던 것이라면?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기묘한 확신은 찾아들었다.

“…….”

로비엔이 리만 후작과 함께 걷는 피베체 공작에게 시선을 던졌다. 시선을 느낀 듯 돌아보던 그가 제법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편이라는 것처럼. 신뢰를 사고자 하는 자처럼.

‘전하께선 왕이 되실 겁니다.’

‘앨런도, 마틴도 있건만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왕비께서 그것을 원하고 계시니까요.’

귀애하는 조카를 다루듯 다정하게 웃어 보이던 얼굴을 생각하자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러나 로비엔은 성공적으로 헛구역질을 참아 눌렀다. 오히려 부드러이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선왕비께서 원하니 죽이려 함인가?

“코멧.”

“예, 폐하.”

“입구는?”

“분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이곳에서 불명예를 끌어안고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명을 뒤집어쓸 마음 역시 존재치 않았다.

그새 어디까지 움직인 건지, 제법 먼 거리에서 소란한 소리와 함께 총이 발포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에 놀란 듯, 내내 가지에 앉아 쉬던 새가 푸드덕거리며 거칠게 날아올랐다.

쉭쉭 대는 거친 숨소리와 발굽 소리가 땅을 울렸다. 로비엔은 사냥로를 조금 벗어난 자리, 멧돼지에게 총을 겨눈 카를로스 백작을 발견했다. 그 곁에서는 수행원들이 칼을 든 채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카를로스 백작이 데려온 수행원들은 저게 전부인가?”

“총 다섯으로 알고 있습니다.”

코멧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총 넷. 하나는 보이지 않았다.

“뒤를 지속해서 방어해.”

로비엔이 총구에 화약을 넣고, 다리에 총을 엇나가게 맞아 분기에 찬 멧돼지의 목덜미에 겨누었다. 묵직한 발포음이 공기를 흔들었다. 막 앞을 향해 달려들던 멧돼지의 몸뚱이가 충격으로 나동그라졌다.

카를로스 백작이 바닥에 모로 누워 허우적대는 멧돼지의 몸에 재차 총구를 겨누었다. 빗나가지 않은 총알이 심장에 꽂힘과 동시에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허우적대던 멧돼지의 다리는 파르르 떨리며 움직임을 상실해 갔다.

“폐하께서 잡아 주신 것이니, 이 사냥감은 폐하께 바치지요.”

카를로스 백작이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제가 잡은 멧돼지를 로비엔에게 바치겠노라 이야기했다. 제법 호부처럼 보였다.

“공의 성과로 해 두지. 더 큰 녀석으로 사냥할 예정이라.”

“한 방에 한 놈이라. 형님께선 여전하시군요.”

곁을 지나치던 앨런이 그를 치켜세웠다. 능글거리는 왕제 앨런의 얼굴은 긴장 하나 없이 여유로웠다. 선왕비를 비롯하여 이 자리의 모두가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고 믿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사냥이라면 네가 더 잘하는 걸 아는데 괜한 칭찬을 하는구나.”

“그야…….”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오늘은 내가 가장 큰 녀석을 잡아 봐야겠어.”

로비엔이 저를 칭찬하는 말에 으쓱해져 입을 열던 앨런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보통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는 무던한 태도의 로비엔이 이토록 호전적으로, 혹은 경쟁적으로 나오는 경우는 몹시 드문 탓이었다.

“내기해 볼까?”

호탕하게도 대결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앨런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럴까요.”

눈앞에 가장 매력적인 사냥감을 앞둔 두 사내 사이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먼저 돌아선 것은 앨런이었다.

“더 큰 녀석이 있는지 찾으러 먼저 가 봐야겠습니다.”

앨런이 깊은 숲으로 들어가려는 듯 성큼 걸음을 옮겼다. 가장 뒤쪽에 있었던 그의 모습이 빽빽한 나무 그림자에 차츰 가리기 시작할 때까지 지켜보던 로비엔 역시 차근히 뒤를 따랐다.

나무들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이 아니라면 저녁이라고 믿어도 좋을 만큼 음산했다. 비가 온 후 부쩍 추워진 날씨에 풀벌레조차 울지 않는 숲에는 누군가 조정한 것처럼 인위적인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폐하, 근처에 무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코멧이 걸음을 멈추며 고했다.

모두가 이미 깊은 숲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했기에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들어선 샛길. 어딘가에서 숨을 죽이고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코멧이 날 선 얼굴로 몸을 낮춘 채 기회를 노리는 상대를 향해 돌아섰다. 인간의 것보다는 날것에 가까운 숨소리. 그러나 거리가 조금 있었다.

코멧이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사실 생물과 나무 밑동이 구분되지 않았으나, 스삭거리며 스치는 소리가 화들짝 놀란 것이 도망가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종류가 뭐지?”

본 바가 없으니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총알이 근접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나무가 파인 모습이 제법 위협적이어서, 놀라 도망갈 법도 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여우 정도의 크기인 것 같습니다.”

그리 위협적인 짐승도 아니고, 잡아 죽이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지속해서 따라붙는 것 같았던 시선이 짐승의 것이었다는 데에서는 조금 안도감이 들었다. 인간이 아닌 짐승의 시선에 안도하는 자신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그 순간이었다.

요란한 총소리와 동시에 공기가 파르르 떨었다. 퍽 하며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로비엔의 지근거리에 있던 기사의 말이 다리가 꺾여 옆으로 쓰러졌다.

예상치 못한 소리에 놀란 제 주인의 기척과 옆에서 무너지는 동료의 움직임, 피 냄새에 놀란 말이 순식간에 달음박질을 쳤다. 현재의 위치에서 도망치려는 말에게 안전한 길을 확인하려는 이성이야 존재할 리가 없었다.

사냥제에 참여한 귀족들이 모두 숲 깊숙이 들어서는 것을 직접 보고서야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총구를 겨냥한 쪽은 분명히 측면. 총을 겨눈 자의 인영이 나무 그림자에 가려 흐릿했으나, 자격을 가지고 참여한 자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사냥터에 왕, 왕의 호위, 그리고 사냥제에 초대받은 귀족을 제외한 자들은 총을 소유할 수 없다. 법도며 규칙이 그를 해하기 위해 깨어졌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로비엔이 말의 등 위로 몸을 바짝 붙이고, 고삐를 놓치지 않도록 부드럽게 감아쥐었다. 악문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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