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세상의 마지막에 선 사람들처럼 몸을 섞고, 그 체온을 더듬으며 존재를 확인하던 순간들. 불과 며칠 되지 않은 기억이었다. 로잘린은 어쩐지 아득하게 느껴지는 기억을 떠올리며, 붉게 타들어 가는 벽난로에 의미 없는 시선을 두었다.
“폐하.”
노크하는 소리로 드마셸이 온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러나 이름까지 부르는 것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말씀하세요.”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새 드레스로 갈아입었으나, 이미 눅눅하게 젖어 들어 버린 마음은 도통 따뜻해지질 않았다. 로잘린은 어쩐지 오한이 드는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며 대답했다.
“발란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것은…….”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아요. 알고 싶은 건 앞으로 어찌하실 것인지, 그것뿐입니다.”
발란에 대한 변명으로 이야기를 꺼내려던 드마셸의 입이 꾹 닫혔다. 가문의 일원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이 지경까지 된 것도 사실이라, 노기 섞인 로잘린의 목소리에 대거리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변명조차 할 수 없게 된 드마셸이 입을 다물면서 둘 사이로 끔찍한 침묵이 차곡차곡 쌓였다.
“발란의 말대로 저를 피베체 가문에 넘기실 건가요?”
그 꼴을 보다 못한 로잘린의 목소리가 그 침묵의 고리를 끊었다. 불그림자가 드마셸의 얼굴에서 붉게 어른거렸다. 생각의 깊이만큼 깊어진 주름이 더욱 선명히 보이는 불빛 아래, 로잘린은 그의 생각을 가늠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알아요. 고민은 하셨죠. 하나를 죽여 없애는 것으로 끝낼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한 그의 작은 희망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굉장하네요.”
“…….”
“아랫도리 하나 간수하지 못해 부인도 아닌 여자에게서 딸을 보고, 당신을 닮은 머리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아들의 그림자로 일을 돕도록 만들고, 왕족이 되고 싶어 왕실에 팔아넘기고.”
로잘린이 화사한 얼굴로 웃었다.
“고작 사생아 따위를 넘겨 왕의 사돈이 되다니! 남는 장사라 생각하셨죠?”
드마셸은 부정하지 못한 채 시선을 떨구었다. 추악한 그의 진심은 로잘린이 모른 척해 왔던 것이지, 몰라서 까발리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그 목숨 하나로 가문 전체의 구명이 가능하다니, 흔들리실 만하지.”
“로잘린.”
“감히 왕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목숨이 여벌로 있으신 모양입니다.”
로잘린이 싸늘하게 말을 끊었다. 가련한 척 그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건 쓸모없는 일이 될 거라는 걸 잘 알았다. 자신을 선택하는 것이 위험부담이 더 낮고, 승리 역시 자명하다는 사실을 일러 주는 편이 더 나았다.
“발란을, 그리고 클로티 부인마저도 죽이려던 선왕비의 약조를 믿겠다면 원하는 대로 하셔도 좋아요.”
제 사람의 영역에 20년을 넘게 두었던 클로티 부인조차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죽이려던 사람. 선왕비는 계획대로 일이 마무리 지어진대도 팔짱을 낀 채 보가트 가문의 처분에 대해 관조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해 두지요. 클로티 부인이 이미 선왕비와 왕제들의 역심을 고발해 폐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저를 피베체 가문에 넘겨 보았자, 왕께서 무사히 돌아오셨을 때 일을 더 어렵게 만드는 일에 그치지 않아요.”
추접스러워도, 이 순간 드마셸에게 도움을 청하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샜다.
“사병을 끌고 동부로 가려고 합니다.”
일신의 안위만 생각했다면 차라리 혀 깨물고 죽고 말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결국 세상천지에 홀로 남은 자신의 사람을 위하는 일이었다. 자존심이 상하고 눈앞의 사람이 죽도록 미워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는 저택의 방비를 위해 남겨 두고 가겠지만…….”
“…….”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래비어트에 도움을 청해 두었습니다.”
로잘린은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려는 안도의 숨을 삼키며, 저와 똑같이 생긴 눈동자를 직시했다. 이 순간마저도 자신에 대한 애정보다는 도박판에 뛰어드는 심정으로 선택을 내리는 것임이 분명한 눈.
“발란은 어쩌실 건가요?”
“제가 돌아올 때까지 방에 가두어 두고 나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때에도 사람이 붙어 있을 거고, 개별 서신을 주고받는 것도 금지할 것입니다.”
이 이상 허튼짓할 수는 없을 거라는 확답이었다.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까요?”
로잘린이 빈정대듯 물었다. 드마셸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는 감히 그런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나가 보세요.”
드마셸이 옷을 정돈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에는 왕비와 그 아비라고 해도 서로 예의를 갖추던 사이였으나, 이제 예를 갖추는 것은 드마셸뿐이었다. 돌이킬 수 없어진 관계의 증명이었다.
그가 깊은숨을 내쉬며 문고리를 잡은 순간이었다.
“왕께서 조금도 다치지 않고 돌아오신다면.”
“…….”
“발란, 그 배신자의 목을 붙여 두는 것은 생각해 보지요.”
나직하지만 선명한 목소리. 드마셸이 몸을 돌려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아닌 척하지만, 그 애를 사랑하잖아요.”
드마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한번 묵례하고 떠났을 따름이었다. 로잘린은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은 무언이 대답인 순간들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러나 지금은 이 감정에 매몰될 순간이 아니다.
애써 다잡은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무섭도록 쏟아지던 비가 멎어 가고 있었다.
다미안 래비어트의 걸음이 보가트 공작가 앞에서 멈추어 섰다.
“오셨습니까.”
보가트 공작가의 집사가 모습을 드러내 다미안에게 인사했다. 한동안 흉흉한 소문이 돌며 모습을 감추었던 다미안을 만나게 된 것은 몹시 오랜만의 일이었다. 정확히는 몰라도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 듯 이전보다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평소와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공작께서는 이미 동부로 떠나셨고, 왕비님께서는 래비어트에서 손님이 오시면 안으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로잘린, 아니, 폐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집사의 대답에 다미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2층 창문 너머,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로잘린과 시선이 마주쳤다. 올라오라는 듯 가벼운 턱짓을 발견한 다미안이 지체 없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비가 내내 저택 안으로 들이친 것처럼 축축 처지고 가라앉은 분위기가 눅눅한 습기처럼 느껴졌다. 꽉 닫힌, 사용인들이 앞을 지키는 방에서는 발란이 욕지거리를 내뱉고 물건을 집어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가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제가 전달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다미안이 물었으나, 집사는 이렇다 할 대답 없이 로잘린이 머무는 방으로 다미안을 안내할 뿐이었다. 일개 사용인에 불과한 그는 이 복잡한 상황에 대해 함구할 필요가 있었다.
“폐하, 래비어트의 다미안 님이 들었습니다.”
“들여보내.”
로잘린의 대답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인형처럼 소파에 앉아 있던 로잘린의 시선이 다미안에게로 향했다. 고민이 있는 듯 가라앉고 어두워진 얼굴, 그러나 그 점이 더욱 그녀를 고혹적인 분위기로 만들어 주었다.
다미안이 표정을 다잡았다. 흔들려선 안 된다. 이미 한번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 바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갖지 못한, 영원히 가지지 못할 것에 대한 애타는 욕망일까. 참으로 가혹하게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제 괜찮아 보이네. 앉아.”
이제는 명령이 제법 익숙해진 태도였다. 다미안은 눈인사를 마친 후 로잘린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병을 빌리는 이유를 묻고 싶어 찾아왔다고?”
“예. 보가트 공작가에도 사병이라면 차고 넘칠 테니까요.”
어차피 저택 방비를 이유로 사병을 빌려주는 일은 돈이 오가는, 별것 아닌 일일 뿐이다. 꼬리를 끊는 일도 쉬워, 이미 드마셸과 이안 사이에서 협상을 마친 일이었다. 다만 그것이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라면 재고해 봐야 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
다미안이 담담한 목소리로 진실을 요구했다. 로잘린은 회피하거나 빙빙 돌리는 대신, 사실을 털어놓았다.
“선왕비가 역모를 꾀했어. 그리고 발란은 거기에 가담했지.”
“그게 무슨…….”
“보가트 공작께선 그걸 저지하기 위해 가문의 인원을 이끌고 동부로 떠나셨고, 덕분에 저택의 방비가 느슨해져서 사병을 빌리고자 하는 거야.”
이리 단순하게 요약될 내용인가? 다미안이 아연한 얼굴로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발란의 말로는 선왕비가 폐하 앞에서 날 죽일 거라고 했다던데.”
“…….”
“지금이야 모르는 것 같지만, 궁에 내가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바로 저택으로 사람을 보낼 테니까.”
로잘린이 또렷한 시선으로 다미안을 응시했다. 다미안은 마치 그물에 얽힌 무엇처럼 그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심장은 달리는 말발굽 소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돈을 주고 사병을 빌리는 일일 뿐이니 래비어트가 위험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래도 도망가고 싶다면…….”
“전하.”
“감히 나를 끌어내리려 시도하고도 살아 있는 값을 치르는 거라고 생각해, 다미안.”
비록 그것이 선왕비가 약을 이용해 그를 충동질하고 흔든 것이기는 하지만, 질투와 미련, 그리고 집착으로 어두워진 눈을 가진 적이 있었다. 로잘린에게 해가 갈 만한 멍청한 짓을 하기는 했지만, 그가 연심을 가졌던 것만은 진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 역시.
머저리 같은 놈. 멍청해, 멍청하다. 그렇게 조소하면서도 흐르는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로잘린이 단 한 번도 그를 남자로 여긴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랬다.
이 순간을 정말 마지막으로, 모든 감정과 죄를 털어 내자. 결정을 내린 다미안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역모에 가담한 자들은 누구입니까?”
누구로부터 로잘린과 이 저택을 지켜야 하는가? 다미안은 그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선왕비, 왕제들, 피베체, 리만, 그리고 카를로스.”
“폐하께서 비전하를 감싸느라 피베체 가문과 척을 진 탓입니까?”
다미안이 물었다.
잠시 멈칫한 기색이었던 로잘린이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비엔의 약점을 어디에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므로.
“세 가문이나 뭉쳤다니.”
고위 귀족이 세 가문이나. 다미안이 기함한 얼굴로 그들의 이름을 새삼스레 곱씹었다.
“사냥터엔 귀족과 왕의 호위, 그리고 각 가문의 시종들 몇을 제외하곤 출입할 수 없으니 별일 없을 거야. 폐하께선 무사히 돌아오실 테고.”
별일 없으리라 중얼거리면서도 로잘린의 손이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다미안 역시, 그렇다면 별일 없으리라 이야기하려 했다. 예상치 못하게 하나의 기억에서 생각이 멈추기 전까지는 그랬다.
“카를로스 백작 역시 가담하였다 하셨습니까?”
다미안이 기름칠을 덜 한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물었다. 로잘린은 그 기묘한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본능적으로 날카로워진 목소리가 다미안의 대답을 채근했다.
“다미안 래비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