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94)화 (94/151)

# 94.

참을 수 없는 분기에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편지를 바닥에 내던진 로잘린이 차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 발란은 그 기세에 눌려 옴짝달싹도 못 하고 계단의 중간에 멈추어 선 상태였다.

“내가 죽으면 상단이 네 것이 될 것 같았어?”

얼마쯤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팽팽한 긴장감을 깼다. 발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목젖이 오르내리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던 로잘린이 그 멱살을 제 얼굴 가까이 잡아 끌어내렸다. 발란이 반사적으로 계단의 난간을 붙잡아 아래로 쏠릴 뻔한 중심을 잡았다.

“헛된 꿈을 꾸었구나, 발란.”

그 얼굴에 희미하게 떠오른 미소에 스민 한기가 소름이 끼쳤다. 발란이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움켜쥔 주먹을 떨었다.

“내가 지금 여기 왜 온 것 같아?”

“…….”

“역모? 다 짐작하고 계셔.”

너는 나를 못 이겨. 타오르는 초록색 눈동자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네까짓 게 감히……!”

“몇 귀족 가문이 모가지 내놓고 저지른 반역에 질 만큼 해가 낮게 뜨던가?”

약 일 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사이에서 그녀는 로비엔을 지켜봐 왔다. 상처받아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 언제나 자신이 해야 할 책임을 잊지 않는 사람.

태양은 어둠이 펼치는 장막에 잠시 지평선 너머로 몸을 숙여도 매일같이 다시 떠오른다. 그는 강하고,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다. 로잘린은 그렇게 믿었다.

“왕은 돌아와.”

로잘린이 웃으며 멱살을 움켜쥔 손을 놓았다.

“그리고 나는 그 후에, 꼭 네 죗값을 목숨으로 치르고 말 거야.”

늘 서로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지독하게 경멸하고 혐오해 왔던 사이였다. 용서? 그런 단어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물며 발란이 어쭙잖게 노린 것이 로비엔, 유일한 제 사람의 목숨이었음에랴.

로잘린이 더러운 것을 놓듯 발란의 멱살을 놓았다. 이내 몸을 틀어 계단을 내려오는 로잘린의 눈에 1층의 풍경이 낯설게 펼쳐졌다.

매일같이 몸을 뉘었지만, 단 한 번도 내 집이 아니었던 곳.

눈치껏 리리엔의 아이들을 데리고 자리를 비운 시종과 집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흔들리는 눈으로 로잘린과 발란을 번갈아 보는 리리엔,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저 굳은 얼굴로 선 드마셸 뒤로 넓게 펼쳐진, 황금과 돈으로 처바른 거실.

그래, 저 돈이 로잘린에게 왕관을 선사해 주었다. 어쩌면 그녀는 리리엔과 발란이 몇 번이나 언급하며 긁어 댔던 것처럼, 사생아 주제에 보가트 가문에 갚지 못할 은혜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

하지만 그래서, 뭐?

그렇다고 해서 그녀 자신이 발란 발밑에서 기며 살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왕세자비, 그리고 왕비의 관을 쓰고서도 로잘린 보가트 르 칼라브리아로 살았던 순간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로잘린 보가트로 살았던 순간이 더 많았던 것처럼.

“그래, 어쩌면 산 채로 돌아올지도 모르지.”

로잘린이 몸을 조금 틀어 발란을 올려다보았다. 난간을 붙잡고 기대어 선 발란이 키득거리며 미친놈처럼 웃었다.

“그가 죽을 자리는 그곳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발란 보가트!”

희게 질린 드마셸이 노성을 내질렀으나 발란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선왕비께서 꼭 너를 그자의 눈앞에서 죽이고 싶다고 하시기에, 정 그렇다면 내가 기다리겠다고 했지.”

생기나 총기 따위는 비치지 않는 시뻘겋고 혼탁한 두 눈. 로잘린은 그런 눈을 본 기억이 있었다.

“네가 여기 와 있다고 네 몫의 죽음을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로잘린의 시선이 천천히 발란의 몸을 타고 내려와, 허벅지 옆에서 작게 떨리고 있는 그의 손으로 향했다.

“선왕비가 네가 여기 와 있다는 걸 언제까지 모를 것 같아?”

“저지른 일에 겁이 나서 오피움이나 들이켜고 있을 거였다면, 일을 저지르질 말았어야지.”

다미안 래비어트. 거의 중독까지 갔던 그자가 보였던 증세였다. 로잘린이 자신의 증상을 바로 알아차리자 발란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 떨렸다.

“아버지. 보가트 가문은 책임을 피할 수 없어요.”

안 돼. 여기서 져서는 안 된다. 발란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드마셸을 바라보았다. 몸은 곧게 서 있었으나, 혼란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선왕비가 원하는 대로 이 계집을 피베체 가문에게 넘기고 그 발밑에 엎드리면 살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이 발란이! 이 판을 준비했으니까!”

보가트 가문이 죽지 않을 방법은 오로지 그뿐이라는 듯 발란이 소리쳤다. 드마셸의 침통한 시선이 하릴없이 흔들렸다.

“아, 아버지…….”

리리엔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드마셸의 대답을 채근했다. 천 길 낭떠러지가 바로 코앞에, 외줄 두 개가 그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그 위를 걸을 것인가, 말 것인가? 걷는다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왕이 죽고, 제가 죽는다 한들 선왕비가 보가트 가문을 품어 주리라 생각하세요?”

그 순간, 로잘린의 싸늘한 목소리가 생각을 끊었다.

드마셸은 신흥 세력들과의 지지부진한 싸움의 고리를 가장 끊고 싶은 게 귀족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희의 밥그릇, 정통성, 그리고 폐쇄성. 호시탐탐 그를 노리고 나날이 세를 불려 가는 부르주아들이 그들에게 어여쁠 리 만무했다.

그리고 선왕비는 그 세력의 가장 선두에 선 자였다. 그녀의 계획에 동조한 자들에게 약조한 것도 신흥 세력을 기용하지 않고, 그들이 귀족이 되는 방법을 없애는 것일 터였다.

그런데 발란이 그녀가 세웠던 계획 일부를 도왔다는 이유로, 보수 귀족파가 로잘린의 목숨만 거둔 채 물러날까?

하지만 어쩌면, 공작가라는 명패만 달았을 뿐 보잘것없는 보가트 가문 정도는…….

“클로티 부인이 자결하라는 서신을 받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

“자신의 가장 큰 비밀을 알지만 더는 쓸모가 없는 자.”

그러나 곧 나직한 목소리가 덧없는 상상 속의 드마셸을 현실로 돌려놓았다.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 그리고 드마셸 칼라브리체 보가트가 그다음이 되겠죠.”

예고된 죽음의 명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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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엔은 마차의 왼편 창문 너머로 스치는 모든 것을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생명은 땅 아래에서 몸을 숨기고 봄을 기다리는 시기. 마른 땅과 빈 나뭇가지들로 엉성한 산속에서 짐승들이 먹이를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개발을 목적으로 서식지인 산을 파훼하고 있으니, 먹이를 찾아 숲으로, 그리고 민가로 내려올 수밖에. 지역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사냥제는 필연적으로 벌여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상황이 이렇게 된 것 역시 필연적으로 벌어져야만 하는 것이었을까?

로비엔은 아주 먼 일인 것처럼 희미하게 떠오르는 로잘린과의 대화를 기억 속에서 더듬었다.

‘선왕비와 왕제들이 배신을, 배신을…….’

어느 날 어미를 잃고 낯선 집에 뚝 떨어졌던 아홉 살의 계집애. 사랑만 받고 살아도 모자랄 시기에 기척을 죽이고 우는 일이 잦을 만큼 쉽지 않았을 어린 날. 덕분에 소리 내어 우는 법도 모르던 여자. 아이를 잃고서도 마음대로 슬퍼하지도 못했던, 강하지만 약한 그의 비.

그런 아내가 제대로 말도 전달하지 못하고 끝내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말도 제대로 이어 가지 못할 만큼 서럽게 울던 얼굴, 울음소리, 평소보다 뜨끈하게 느껴지던 체온.

그건 그의 상처를 아프게 바라본 탓도, 제 트라우마를 떠올린 탓도 있겠지만…….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혼자 뒀어야지. 그냥 버렸어야지…….’

울면서 무너질 수 없는 그를 대신한 것이기도 했다.

상처받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여태까지의 자신은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했다는 생각 역시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녹이 슬어도 그가 쓴 왕관의 무게는 줄지 않는다.

그가 아무리 날카로운 칼에 베이고 찔려도 하늘은 무너지지 않는다.

좋든 싫든, 자격을 갖추었든 갖추지 않았든 그는 왕이 되었다. 제 감정 하나에 매몰되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쳐 버리기에는 그가 어깨 위에 짊어지고, 등 뒤로 끌고 가는 것들이 많았다.

로비엔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마차가 흔들거리며 벽에 닿은 머리가 작게 진동했다.

사실은 현실감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내내 그랬다. 레이첼 후작 부인과 로잘린의 하녀 마리를 메르센데티 자작가에 숨겨 두고, 로잘린을 보가트 저택에 내보내고, 홀로 사냥제가 있을 동부로 오는 내내 허공에서 떠다니는 듯 부유감과 비현실성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게 꿈이길 바라는 것처럼.

“폐하,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꿈일 리 없다는 건 사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직접 모으기 위해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로비엔이 천천히 느리게 눈을 뜨자, 마차의 문이 고요히 열렸다. 일 년에 한두 번이나 찾을까 말까 한 곳이지만 왕의 별저였다. 깔끔하게 외관이 관리된 별궁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로비엔은 마차에서 내려 출입문을 지나쳤다. 별궁의 시종이 로비엔을 침실로 안내하는 동안, 근위대의 1대장인 코멧이 그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코멧 경만 남고 모두 물러가.”

왕의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모두 물러났다. 천천히 창가로 걸어가는 로비엔의 움직임마다 코멧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준비는?”

“말씀하신 대로 모두 배치해 두었습니다.”

코멧이 즉답하며, 품 안에서 지도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펼쳤다. 사냥로의 바깥쪽에 몇 군데 빨갛게 표시된 곳이 있었다.

은신하기 좋은 장소에 깃발을 꽂아 위치를 표시해 둘 것. 만일 몸을 숨기고 대기하던 중 귀족 가문의 누군가가 몸을 숨길 곳을 찾는 것을 발견한다면 즉시 목을 벨 것. 정예병을 제외한 이들은 숲의 밖에서 대기할 것.

그것이 로비엔이 코멧에게 일찍이 내린 명이었다.

“무기는 어떻게 준비했나?”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심경의 변화가 없었다. 코멧의 주군은 그가 가진 푸른 눈동자처럼, 잔잔하고 고요한 호수 같았다.

물론 그것이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는 뜻은 아마 아닐 테지만.

“머스킷 이외에도 장검을 지참하고 있습니다.”

“……그래.”

로비엔이 짧게 대답했다.

“궁 안에는 어떻게 사람을 남겨 두었지?”

“평소와 비슷한 비율입니다만, 왕비님의 침실에는 조금 더 배치해 두었습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새에 로잘린 역시 해치려 할 것은 자명했다. 그러니 제 침실 안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방심하였다가 동선과 계획이 꼬이기를 바랐다. 로잘린이 인질로 움직이는 것을 원하지 않거니와, 그 틀어짐이 로잘린에게는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마련해 줄 테니까.

“왕비님을 보호할 수 있도록 실력 있는 자들도 몇 심어 두었습니다.”

로비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멧은 그제야 왕의 눈에 어른거리는 걱정의 기색을 읽었다. 저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는 그토록 침착한 주제에 왕비의 이야기에는 분명히 다른 얼굴이었다.

그러나 왕은 반역의 기색을 인지하고 있고, 만반의 준비를 마쳐 두었다. 왕비 역시 이미 궁에서 빠져나와 보가트 저택의 사병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을 것이다.

왕은 무사히 동부를 떠나 왕비와 재회할 것이며, 모든 것은 물 흐르듯 자연스레 왕의 승리로 흘러갈 것이다.

“이 코멧이 목숨을 바쳐 폐하를 지킬 것입니다.”

코멧이 맹세했다. 로비엔은 희미한 미소로 그의 맹세에 보답했다.

동시에 빛이 번쩍이며 명멸하고, 천둥소리가 지척을 뒤흔들었다.

일그러진 총성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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