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93)화 (93/151)

# 93.

비극이 시작된 날부터 내리던 겨울비는 며칠째 이어졌다.

궂은 날씨였지만 리리엔은 드마셸의 연락을 받고 오랜만에 수도의 저택에 방문했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그녀의 쌍둥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였다.

그녀는 드마셸에게 인사를 마치고, 애들을 맡겨 두자마자 어두컴컴한 발란의 서재로 들어섰다. 서재의 유일한 빛은 불이 타오르는 벽난로 하나였다.

따뜻하고 안정감이 있어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문을 열자마자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코를 파고들어, 엄지와 검지로 틀어막아야만 했다.

“대체 치우기는 하는 거야?”

하녀들이 폼으로 있는 것도 아닐진대, 대체 서재가 왜 이토록 엉망이란 말인가. 리리엔은 완벽하게 짜증스러워진 얼굴로 창문부터 열어젖혔다. 나무가 타들어 가는 냄새, 알코올과 찌든 시가 냄새, 정체를 알 수 없는 쿰쿰한 냄새가 방 안에 갇히고 고여 지독한 탓이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 빗방울이 조금씩 방 안으로 들이닥쳤으나, 동시에 쾌적한 공기도 파고들어 그나마 견딜 만하게 되었다.

“뭐야.”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던 발란이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한층 커진 빗소리에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떴다.

“누가 보면 홀아비인 줄 알겠어.”

“리리엔. 창문 닫아.”

“환기 좀 시켜. 없던 병도 생기겠네!”

발란이 가문 내에서 유일하게 악감정을 조금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의 쌍둥이 동생인 리리엔뿐이었다. 리리엔은 발란이 미워하기에는 지나치게 머리도, 감정도 해맑은 누이였다. 욕심이라고는 제 몸뚱이에 치장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 끔찍한 로잘린 보가트를 그와 함께 미워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왜 왔어.”

“아버지께서 애들이 보고 싶다고 해서.”

발란이 두 손으로 대충 마른세수를 했다. 손바닥에 닿는 턱이 지나치게 꺼끌꺼끌해 수염이 제법 길었구나 하는 심상한 생각을 하며.

“애들도 데려왔어?”

“그래. 내려가서 조카들하고 인사 좀 해.”

발란이 순순히 수긍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출입문으로 향하는 발란의 몸을 막아 세운 건 리리엔이었다.

“일단 좀 씻어. 폐인도 아니고, 대체 꼴이 그게 뭐야?”

리리엔이 혀를 차며 조언했다. 집사에게서 듣기를, 드마셸도 그 꼴이 마땅찮아 얼굴을 마주치지 않은 날이 제법 되었다고 했다. 리리엔은 드마셸이 발란 얘기를 하며 얼굴을 구기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세상 한심한 놈.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야?’

리리엔과 발란은 이란성 쌍둥이로 한배에서 났다. 어미가 살아 있을 때, 드마셸은 무심하기는 해도 가정은 그럭저럭 굴러갔다. 드마셸도 적어도 아내의 눈치는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작스럽게 문 앞에 뚝 떨어져 있던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계집애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틀어졌다.

게다가 하필 그것이 드마셸의 머리와 감을 그대로 타고났을 건 무엇인가.

아무리 잘하려고 노력해도 어느 순간부터 드리워진 로잘린의 그림자는 발란에게 끈덕지게 들러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리리엔이야 본래 일 따위에 욕심이 없으니 로잘린과 비교당할 일은 없었지만, 발란은 달랐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 드마셸의 폭언과 무시를 경험해 왔다.

그래서 리리엔은 발란이 단순히 사생아를 미워하는 것을 넘어, 로잘린을 증오하는 것을 이해했다. 그녀의 쌍둥이가 가여워, 같이 로잘린을 끔찍하게 미워해 준 세월은 하루하루 더 길어져 갔다.

“저럴수록 더 미움받을 텐데…….”

리리엔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근래 보가트 가문을 둘러싼 수많은 소문과 억측들이 난무하는 탓에 드마셸이 몹시 곤두서 있었다. 머리 아픈 일 같은 건 본능적으로 멀리하는 리리엔은 그런 드마셸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편안하게 재롱을 떨어 주는 존재였다. 무언가를 사 달라고 조르는 건 오히려 그에게 보람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리리엔은 오늘, 제 말이라면 다 좋다 하던 드마셸의 얼굴에 날 선 기운이 파르랐던 것을 기억했다.

빤하다. 안 그래도 못마땅한 아들이 저 꼴로 유령처럼 저택을 돌아다닌다면 드마셸은 무조건 화부터 내고 볼 것이다. 리리엔이 발란을 욕실로 먼저 보낸 것은 그런 이유였다.

아랫것들을 불러 방 청소도 시켜야겠다.

리리엔이 막 출입문 쪽으로 한 걸음을 뗐을 때였다. 열린 창문으로 차갑고 날카롭게 불어온 바람에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종이 더미들이 흔들렸다.

“이런…….”

리리엔이 난처한 얼굴로 몸을 굽혀 떨어진 종이를 몇 장 주워 들었다. 떨어진 것들만 주워 테이블에 올려 두고, 무게를 가진 고정할 것을 찾던 때였다. 흐트러진 서류들 사이로 피베체 가문의 문장이 찍힌 서신이 드러나 있었다.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리리엔이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조심스럽게 종이들 사이에서 빼냈다. 편지는 별것 아닌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친애하는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에게.>

발신자는 선왕비, 줄리 피베체 르 칼라브리아였다.

편지를 붙잡은 리리엔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 일과 관련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리리엔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혹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온 사방에 소문이 난 것처럼, 선왕비와 보가트 가문은 직접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한데 가주인 드마셸과 왕비인 로잘린을 배신할 작정이 아니고서야 발란이 왜 선왕비와 비밀스럽게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단 말인가?

“아, 아버지…….”

그냥 묻어선 안 될 일이다. 그건 직감이었다.

리리엔이 편지를 손에 쥔 채 계단 아래로 달음박질쳤다. 1층 거실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손주들의 재롱을 구경하던 드마셸이 희게 질린 리리엔의 얼굴을 보고 의아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리리엔, 얘야. 무슨 일인데 그렇게 놀란 거야?”

드마셸이 손에 들린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리리엔을 바라보았다.

“발란이, 발란이 이상한 일을 한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드마셸이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리리엔의 손에 쥐어진 편지가 볼품없이 구겨진 것을 발견한 드마셸이 단박에 몸을 일으켜 종잇장을 낚아챘다.

편지는 단순하지만 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모든 조각이 기다렸다는 듯 제자리를 찾아갔다. 드마셸이 편지를 내려다보느라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본인과 발란이 아니면 손댈 수 없는 상단의 인장이 찍힌 카드는 드마셸에게도 내내 의문이었다. 그러나 발란에게도, 자신에게도 로잘린과 대척점에 설 이유가 없으므로 당연히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발란이 정말로 사고를 쳤어요?”

그러나 그의 저택 안에, 가문을 망하게 할 화약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발란, 이 새끼를 당장……!”

“아버지!”

놀란 리리엔이 드마셸 앞으로 뛰어들어 그를 막아 세웠다. 동시에 드마셸이 분기에 차, 헛웃음을 터뜨렸다.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는 진실로 선왕의 시해에 참여했다!

그 한 가지 명제만이 명확했다. 가문의 이름으로 묶인 이상, 독자적으로 저지른 일이라 해도 보가트 저택 안의 모두가 비껴갈 수 없는 죄의 이름이었다.

“아버지,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 주세요. 제가 발란을 설득해 볼 테니…….”

“무슨 설득을 해! 그 자식이 선왕을 죽이는 데 기여했다고!”

“……아버지!”

리리엔이 끔찍한 소식에 파르르 떨며 입을 틀어막았다.

“저, 저희는 그럼 어떡해요?”

리리엔이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드마셸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서신의 존재를 밝히는 것은 둘째치고, 사냥제에서 선왕비와 귀족 가문들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소식만이라도 전하고 싶어도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왕은 동부까지의 거리와 휴식을 고려해 이미 궁을 떠났다. 구명을 부탁하며 소식을 전할 전령을 보낸다고 해도, 로비엔은 사냥터에 도착한 이후에나 이 소식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로잘린, 그 애는요?”

로잘린이 그를 따라나섰던가?

드마셸은 어지럽게 뒤섞인 머릿속을 간신히 정리하며 막내딸의 흔적을 뒤적였다.

“아버지!”

아니. 그 애는 궁에 남았다!

드마셸이 몸을 휙 틀어 요란할 정도로 크게 호출하는 종을 흔들었다. 식사 준비를 위해 자리를 비웠던 집사가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당장 궁으로 사람을 보내! 로잘린에게 궁에서 나오라고!”

집사가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드마셸이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였다.

“고, 공작님. 왕비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 하나가 차게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 간신히 입을 열어 고했다. 드마셸이 믿기지 않는 상황에 입을 뻐끔거리는 사이, 그 뒤로 모습을 드러낸 로잘린이 로브 후드를 밀어 내렸다.

언제부터 로잘린이 여기에 와 있었지?

드마셸이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로잘린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홑몸으로 빠져나온 것이 분명한 단출한 행색, 비로 흠뻑 젖은 몸. 눈에 서린 극렬한 분노. 무언가를 참는 듯 악문 턱.

“로잘린.”

젖은 옷자락이 다리 사이에 철퍽거리며 달라붙는 것도 개의치 않고, 드마셸 곁으로 성큼 다가온 로잘린이 젖은 손으로 그의 손에 들린 편지를 빼앗아 들었다. 제 혈족이 지은 죄가 있어, 리리엔은 몸만 움찔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친애하는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에게.

날이 제법 쌀쌀해졌으나, 그대가 전해 주는 소식들로 한결 훈기를 더하고 있습니다.

바트만의 배달부를 통해 배달해 준 물건은 잘 받았습니다. 사실 처음엔 그대를 믿지 않았습니다만, 이 일을 통해 그대의 분명한 의지와 담대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대와 나의 목적이 같으니 그야말로 하늘이 주신 기회이며, 하늘이 내린 계시지요.

이번 사냥제에서 사특한 세력을 정리하게 된다면, 약속한 대로 그대의 눈엣가시 같은 누이 역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입니다. 상단 역시 그대의 것이 되리란 것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좋은 소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기를.

줄리 피베체 르 칼라브리아.>

배달부, 바트만의 게리.

배달해 준 물건, 비소.

그로 인해 선왕비가 얻어 낸 상단의 인장이 찍힌 카드.

이 서신은 비소를 사용한 것이 레이첼 후작 부인이 아니라는 증거, 그리고 선왕을 실제로 죽인 것이 선왕비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하지만 공개하는 순간 보가트 가문은 회생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선왕비는 제가 써 내려간 문장들이 모두 증거가 될 줄 알면서도 이토록 친절한 편지를 보내 준 것이 틀림없었다.

서로 뒤통수칠 기회만 노리면서,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같은 배에는 타 있기에, 다 같이 올라탄 배의 바닥에 구멍을 뚫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패착이었을까?

분노로 눈앞이 새하얗게 번졌다. 눈동자는 화기로 지독하게 화끈거렸다. 로잘린의 손에 들린 종잇장이 우글거리며 구겨졌다.

층계로 향한 시선 끝에, 예기치 않게도 제가 저지른 짓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선 발란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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