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92)화 (92/151)

# 92.

클로티 부인이 그간 그토록 저를 미워하고, 로비엔 곁에서 떼어 내고 싶어 했던 이유가 차츰 더욱 명확해졌다. 로비엔이 가진 출생의 비밀을 알지만, 친부모보다 더 그를 사랑하고 아낀 사람.

그녀 외에 비밀을 아는 자들은 더 있었겠지만, 이미 죽거나 모종의 이유로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그에게 어떠한 흠결도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비밀이 밝혀지더라도 든든히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가 필요하다고 믿었을지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런 의미에서 로잘린은 정말이지 쓸모없는 패였음이 틀림없었다.

“……아무 생각도 안 해요.”

“그런 것치곤 얼굴색이 어두운데.”

마주 앉아 있던 식탁 위, 로비엔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다정한 눈빛이 서슴없이 그녀의 얼굴 곳곳을 훑었다.

“클로티 부인이 왔다 갔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일이라면 다 아는 남자. 그렇다면 자신의 비밀도 알고 있었을까?

“무슨 얘길 했어요?”

그럴 리가 없겠지. 그래서 더 참담했다. 로잘린은 눈을 내리감았다.

그 침묵의 시간이 견디기 버거운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천천히 로잘린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괜찮으니까 말해요.”

부드러운 목소리와 손길. 이토록 천성이 온유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것들만 누릴 권리가 있었다. 그런데 왜 그에게는 말도 안 되는 비극들만 줄지어 뒤를 따르고 있을까?

태어나자마자 친모에게서 강제로 떨어졌다. 뻐꾸기 알처럼 다른 둥지에 숨겨진 채, 이날 이때까지 의심 하나 없이 자신의 어미를 사랑해 왔을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모든 순간이 역겹기까지 했다.

어느 날, 가장 귀하게 태어나 가장 귀하게 자란 사내에게는 자신과의 접점이 없으니 영원히 통할 날도 없으리라 생각했었던 자신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으므로.

하지만 지금은 차라리 그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말이 되는 것이기를 바랐다. 서로가 평생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안고 살게 되더라도.

“로잘린.”

로잘린은 재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다시 눈을 떴다.

“레이첼 후작 부인과 마리를 메르센데티 자작가에 숨겨 둘까 해요.”

“갑자기 무슨 일로?”

“여기에 계속 숨겨 두기도 어렵거니와, 클로티 부인이 한 말 때문에요.”

로잘린의 대답에 로비엔이 아리송한 얼굴로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그는 채근하는 대신 로잘린이 다음의 말을 이어 가도록 차분히 기다렸다.

놀랍게도, 만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그는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허울과 명분뿐인 가족보다도.

“폐하께서 지켜보는 자들로부터 역모의 기색이 비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명단이야 모르지 않았으니 그리 충격을 받진 않았을 거라 짐작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로비엔은 담담한 얼굴로 로잘린이 하는 말을 귀담아들었다.

“폐하, 저는…….”

이 이상은 도저히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구름이 낀 하늘처럼 걱정으로 흐려진 푸른 눈. 자신을 바라보는 로비엔과 재차 시선이 마주친 순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로잘린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아름다운 제 사내를 애타게 올려다보았다.

생명으로 맺어졌기에 태어난 것이 죄인가? 사생아로 나고 싶었던 자가 있다던가?

죄악감을 느꼈다가 동시에 억울함, 죄책감, 그리고 참담함을 느껴야만 하는 비겁하고 더러운 피에 대한 괴로움.

가장 끝과 끝에 있는 그와 자신이 이렇게 가장 깊은 곳까지 닿게 될 줄은 몰랐다. 내 사람만은 몰랐으면 했던, 나의 것이 아님에도 부모에게서 이어받은 무거운 원죄. 로잘린 자신에게 있어서 끔찍한 속박 같았던 트라우마.

“그들이…….”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진정하라는 것처럼 마른 등을 한차례 쓸어내렸다. 그제야 막혀 있던 듯 갑갑했던 숨을 간신히 토해 내며, 로잘린이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절망, 애처로움, 그리고 고통 따위로 혼재된 겨울비가 거세어지고 있었다.

16589703980232.jpg

겨울에 눈도 아닌 비라니.

피베체 공작은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차가운 비를 응시하다 몸을 돌렸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나무를 품은 벽난로가 타들어 가는 집무실 안, 몇몇 인물들이 그의 착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과 2왕제 앨런, 3왕제 마틴, 카를로스 백작, 그리고 리만 후작.

짧은 순간 정확하게 이루어질 거사였고,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일 많은 사람은 필요하지 않았다.

피베체 공작은 천천히 걸어가 가장 상석에 앉았다. 사실 계급으로 따지자면 2왕제 앨런이 가장 상석에 앉아야 했으나 그 누구도 그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힘을 가진 것은 2왕제가 아니다. 언젠가 그가 왕이 되더라도 매한가지였다. 남의 손을 빌려 쓴 왕관은 본디 완벽한 힘을 가질 수 없었다.

“아시다시피 오늘 여러분을 이리 모신 것은.”

간신히 보가트 가문의 돈으로 기웠다고는 하나, 이미 반쯤 무너졌던 왕가가 가지는 위엄이란 것은 그토록 하잘것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앨런은 지금의 왕인 로비엔에 비해 아주 많은 것들이 부족했다.

사실 능력만 따지고 본다면 왕이 되어서는 안 될 자. 하지만 혈통으로는 명백히 왕이 되어야 하는 자였다.

“결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자질을 갖춘 자가 왕이 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가 모셨던 두 명의 왕들이 그랬다. 그들이 나기를 완벽한 왕으로 난 것은 아니었다. 귀족과 사제들이 뒷받침하며 제대로 된 왕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선왕의 시해에 있어서 보가트 공작가와 레이첼 후작 부인의 결탁이 밝혀졌습니다.”

사건의 시작은 레이첼 후작 부인과 티타임을 가지다 음독사한 선왕.

이득을 본 것은 왕의 외척 가문으로 등극한 보가트 공작가.

증거는 소네트 궁 내 레이첼 후작 부인이 머물던 방에서 발견된 비소의 흔적. 레이첼 후작 부인에게 비소를 배달했다던 마부의 등장과 보가트 상단의 인장이 찍힌 서신.

모든 것이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한데 해결은 요원하다.

“당연히 대관식이 있기 전부터 보가트 공작가와 레이첼 후작가를 조사하고, 마땅히 치죄해야 한다고 폐하께 그리 주청드렸습니다만…….”

왕이 보가트 공작을 불러 물어본 것은 고작 이 서신이 네가 발행한 것이 맞느냐는 것뿐이었고, 보가트 공작은 당연히 관계성을 부인했다. 왕은 여전히 침묵했고, 보가트 공작은 동네방네 억울하다는 소리를 떠들고 다녔다.

그쯤 되자 합리적인 의심이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왕은 단순히 사랑에 눈이 먼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폐하께선 교황 앞에서 공식적으로 그녀를 자신의 비로 인정하셨고, 여전히 왕비와 보가트 공작가를 비호하고 계십니다.”

“죄를 물으실 생각이 조금도 없으신 게지요!”

“역당과 다름없는 자들을 살려 두려 하심입니다.”

모두 조작된 것임을 알면서도 카를로스 백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미 발을 들인 곳에서 물러날 수 없다는 공포에 눌려, 공포를 잊어버리기로 했다.

이제 그가 기억하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이 고위 귀족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같잖은 하위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을 혐오했다는 사실이었다.

하잘것없는 것들을 정리하고, 명맥 있는 가문들이 다시 올곧게 서는 나라. 선왕비가 그에게 내민 손길과 제안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선왕비께서는 국왕은 고작 계집에 눈이 멀어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하는 아둔한 자가 아니라 하셨습니다.”

“그 말인즉…….”

“어쩌면 왕께서도 그 역당과 다름없는 자인지도 모르지요.”

내뱉는 순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누구도 함부로 입 밖으로 내지 않던 말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따스한 온기가 돌던 집무실 안의 공기가 차게 얼어붙었다.

“생각해 보세요. 모든 것이 평민들과 하위 귀족들을 섞은 그 쓸모없는 행정 제안 기구를 설립하고, 비소의 유통을 허락한 직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왕은 어쩌면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심을 사람들의 마음에 품게 하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거짓된 명분은 기정사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선왕비께서도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피베체 공작의 주름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어린 누이가 겪었던 풍파 짙은 삶을 떠올렸다.

‘감히 나를, 이 나를!’

‘줄리.’

‘나를 속였어! 나를 기만하고, 나를……!’

왕과 왕비는 사랑으로 엮인 사이가 아니라는 충고에 왕비는 되지 않겠다고 말하던 어린아이는 금세 웃는 얼굴이 아름다운 아가씨가 되었다. 아가씨는 곧 왕자비가, 그리고 왕비가 되었다.

사내가 시를 읊어 주던 목소리가 좋았다고, 끌어안아 주는 따스한 품이 좋았다고 했다. 사랑을 속삭이는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다정함이 좋았다고 했다. 그래서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그러나 사랑에 빠졌다고 웃으며 고백하던 아가씨가 앨런 3세에게 당한 끔찍한 모욕에 고통스럽던 나날.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던 여동생의 목숨을 살린 것은 그였다.

‘네가 왜 죽어!’

‘이 꼴을 보고 어떻게, 어떻게 살아요? 살아서 이토록 모욕받는 삶을 내가 어떻게…….’

끔찍한 분노와 절망은 그녀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넋이 나간 듯 비어 버린 눈동자로 오열하는 누이는 이미 앨런 3세가 막무가내로 휘두른 칼에 죽어 있었다. 그저 행복하기를 바랐던, 하지만 모든 행복이 망가져 버린 누이를 품에 안고 그는 맹세했다.

그에게도 꼭 그 행복만큼의 절망을.

‘복수해. 너만 당하면 억울하지 않으냐?’

‘어떻게,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어요?’

‘네가 정신을 차리면 말해 주마. 사람답게 산다고, 다신 자해 같은 거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누이는 멍한 얼굴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의 기억이 장면을 전환했다.

그는 누이와 함께 막 태어난 갓난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둥지에 숨긴 뻐꾸기의 알이 마침내 부화한 것이다.

‘줄리.’

그의 누이는 아직 누구를 닮았는지도 모를, 눈도 뜨지 못한 핏덩이를 끔찍한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며 서럽게 울고 있었다.

‘울지 마라. 약해지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이 아이를 내가, 자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누이의 손이 아이의 이마에 닿았다가 삽시간에 떨어져 나왔다. 닿아선 안 될 것에 닿은 것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받아들일 필요 없어.’

‘…….’

‘그저 사랑하는 척 연기하면 돼. 그 아이가 너를 어미로 믿고 사랑할수록, 정부밖에 되지 못할 계집의 마음은 무너질 테니.’

그 거짓의 순간들이 결국 이날까지 그의 누이를 살게 했다. 따라서 피베체 공작은 이 긴 시간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선왕비께서는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게다가 옳은 방법이든 아니든, 옳은 결과든 아니든, 그에게는 그녀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부당한 방법으로 선왕을 시해하여 왕이 된 자를 끌어내리고, 2왕제 앨런을 왕으로 내세워라. 감히 왕가의 위엄에 도전한 자들의 목을 치고, 정통성을 가진 자가 왕의 권위를 되찾도록.”

피베체 공작의 냉엄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자연스레 음험한 상황에 상기된 분위기가 텁텁하게 그들이 차고앉은 공간을 싸고돌았다.

“그 명을 받자와, 사냥제의 날.”

“…….”

“우리는 현 왕을 사냥할 것입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