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91)화 (91/151)

# 91.

“로네 비에트가 죽었다.”

선왕비가 작게 중얼거렸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듯 얼마쯤의 운율이 섞여 있었고, 무척이나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여서 누군가의 죽음을 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무해하고 말간 얼굴은 멀리서 본다면, 혼자 비가 오려나 하고 중얼거리는 얼굴처럼 보일 터였다.

“드디어 그 계집이 죽었다.”

선왕비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아주 오랜 시간, 공들여 판을 짜고 기다려 왔다.

“적어도 그 사랑해 마지않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갔으니 외롭지는 않으시겠네요.”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그 처절하다는 남편의 계집까지 죽여 없애는 일이 그랬다. 장장 20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얼굴만 마주쳐도 토악질하고 싶은 사내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주고, 때가 되면 몸을 섞었다.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사실 예의상 치르는 부부 관계였고, 자신도 선왕도 그 시간에는 심드렁했다. 그런데도 아이는 셋이나 생겼다.

그토록 아끼던 정부 로네 비에트의 몸에서 본 사생아가 딱 하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럽게도 잘 맞는 궁합인 셈이었다. 아마 로네 비에트만 없었다면…….

“폐하. 피베체 공작께서 알현을 요청하셨습니다.”

클로티 부인의 목소리가 선왕비의 상념을 끊었다. 창가 테이블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던 선왕비는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이 들었다는 소식에 반색했다.

“어서 드시라 하렴!”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차려입은 피베체 공작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깍듯하게 인사하는 제 오라비를 보던 선왕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오랜만에 뵙네요, 오라버니.”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피베체 공작 역시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녀가 그들 몫의 차를 내오고 나가는 동안에도 클로티 부인은 벽에 걸린 그림처럼 자연스럽게 그들 옆을 지키고 있었다.

“클로티 부인도 오랜만입니다. 고초를 겪으셨다 들었는데 몸은 이제 괜찮으십니까?”

“로비엔 그 아이 때문에 고생이 많았지. 제 비에게 완전히 눈이 멀었거든요.”

선왕비가 혀를 차며 대신 대답했다. 클로티 부인은 어색한 미소를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안부를 대신했다.

“클로티 부인은 계속 이 자리에……?”

“제 손으로 평생을 기른 아이에게서 버림받고 맘고생 한 사람이니까요.”

피베체 공작이 계속 클로티 부인을 이 자리에 둘 것이냐고 물었으나, 선왕비는 담담했다. 오히려 대화가 길어질 거라면서, 옆쪽의 의자 하나를 가리키며 클로티 부인에게 착석할 것을 권하기까지 했다.

클로티 부인이 옷자락을 정리하며 의자에 앉았다. 시선은 피베체 공작을 흘끗거리고 있었다. 무도회나 오페라 공연 초대 따위도 아닌데 궁에 든 피베체 공작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서였다.

그는 오래전, 선왕과 협상을 한 후 수도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선왕이 죽었으니 그 약속이 깨졌다 볼 수도 있긴 하겠지만…….

“서신이 아니라 직접 만남을 요청하신 걸 보니 특별한 일이라도 있으신 모양이에요.”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요.”

피베체 공작이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는 그도 클로티 부인의 반응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행정 제안 기구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감히 선왕을 죽인 데 기여한 기구가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겠어요?”

선왕비가 찻잔을 입가에 기울이며 웃었다. 당연한 얘기를 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별것 없는, 일상적인 대화처럼 느껴졌으나 묘한 위화감이 있었다. 클로티 부인은 그들의 표정을 살피는 대신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행정 제안 기구는 로비엔이 설립을 제안하고, 운영을 관리해 온 기관이었다.

감히 저를 소머 궁으로 내쫓았다고 하여 로비엔의 일을 망치기라도 할 셈인가?

“카를로스 백작이 무척 흡족해하기는 하겠네요.”

“물론입니다.”

피베체 공작이 순순히 대답했다. 카를로스 백작은 행정 제안 기구의 발족부터 무척이나 언짢아하던 사람이었다. 돼먹지 않은 평민 나부랭이들이 대다수인 단체로 무얼 하겠느냐며 가장 앞서서 반대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설득하여 감시직에 앉힌 것이 피베체 공작이었다.

‘그들을 뿌리까지 짓밟아 버리려면 같은 편인 양 있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속을 감춘 능구렁이처럼 그 속에 숨어 그들의 의견을 조종하고, 파멸로 이끌어 가는 일이 얼마나 매력적이냐며 속살거리자 카를로스 백작이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제 말대로 끌려올까요?’

‘드마셸 보가트를 이용하면 되지요. 그는 때에 따라 평민처럼 굴다가도, 어느 때에는 귀족처럼 굴지 않습니까. 귀족처럼 굴고 싶어 하기는 하지만, 돈에 대한 그 천박한 탐욕이 어디 간다더이까.’

왕비가 말하길, 왕 역시 보가트 공작과 부르주아 세력을 모두 쳐 내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러니 보가트 공작을 실각시킬 만한 사건을 만들어 내면 된다. 피베체 공작은 그렇게 조언했다. 그리만 된다면 그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행정 제안 기구도, 보가트 공작도 단번에 정리할 수 있으리라고.

피베체 공작의 조언에 카를로스 백작이 반색했다.

왕의 생각이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한 그는 피베체 공작이 유도하는 대로 지금껏 잘 따라와 주었다.

“심약한 자라 조금 놀라기는 하였습니다만.”

카를로스 백작이 심약해? 클로티 부인이 테이블 위의 문양을 시선으로 덧그리며 의문을 떠올렸다. 그는 귀족 가문 출신의 기사였으며 호방한 무인이었다. 체격이나 정신이나 심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갑자기 비소의 유통이 허가되고 선왕께서 돌아가실 줄이야 몰랐겠지요.”

자기 탓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며, 선왕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 발을 빼고 싶다는 듯이 굴기에 못을 박아 두었습니다.”

“발을 빼고 싶다 해요?”

“자신은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더군요. 그런 걸 원한 것은 아니었다고요.”

가까워질 듯, 대화의 중심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꼬리잡기하듯 하나하나 짚어 가는 사건들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죽고 싶은 게 아니면 어떻게 발을 빼겠습니까?”

피베체 공작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내뱉는 말에 섞인 살의와는 영 딴판이었다.

“까딱하다간 본인이 선왕을 죽이고, 증거를 조작한 자로 몰려 죽게 생겼는데요.”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 발 하나만 잘못 디디면 낭떠러지라고 웃으며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네가 죽어도 상관은 없지만, 아직은 쓸모가 있어서 조금 아쉽다는 정도의 감정. 클로티 부인은 거기서 선왕비가 자신에게 보낸 적 있었던 편지를 떠올렸다.

피베체 공작과 선왕비는 지독하도록 닮아 있었다. 한평생을 떨어져 살았는데도, 여태 같은 것을 보고 살았던 사람들처럼.

“앨런과 마틴도 동의했어요.”

“그렇습니까?”

“마틴은 제 장인이 이미 관련되었으니 자유로울 수 없고, 앨런은 예전부터 왕위에 욕심이 많았으니까요. 아마 제가 정말로 왕의 적장자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이미 로비엔의 가슴에 칼을 꽂았을 아이가 아닙니까.”

방금 무슨 얘기를 들었지? 믿기지 않는 소리에 클로티 부인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욕심을 가져라, 능력만 된다면 네 형의 그릇을 빼앗아도 좋다. 그리 키우기도 하였고요.”

유난히 분수에 맞지 않는 것도 탐하던 2왕자 앨런. 클로티 부인은 그제야 로비엔이 칼라브리아 역사상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왕의 이름인 이유를, 2왕자였던 앨런이 앨런 3세의 이름을 이어받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죽일 생각이었구나.

로비엔을 왕으로 만들고, 온갖 불명예로 더럽혀 끌어내릴 셈이다. 그리고 제 아들을 왕의 자리에 앉힐 셈이다!

“클로티 부인도 이해할 거예요.”

그들이 클로티 부인의 안색을 유심히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긴장과 온몸에 이는 소름을 모른 척했다. 손이 떨리지 않도록 손끝까지 힘을 주며 클로티 부인은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소와 같이 무던한 낯으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들은 얘기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은 것처럼,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사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가족으로 품은 것처럼 20년을 넘는 세월을 제 새끼와 다름없이 키워 놓고 어떻게 그 목숨을 빼앗겠냐는 말을 농담처럼 쉽게 하느냐고.

“보세요. 제가 클로티 부인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요.”

“과연 전하의 말씀이 맞군요.”

그녀를 시험한 것이다. 자신들이 털어놓은 얘기를 듣고 클로티 부인이 흔들리거나 경악하는 모습을 보이는지 지켜보기 위해서 부러 옆에 앉혀 두고 대화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친어미처럼 길러 준 은혜도 모르고, 사랑에 빠졌다고 클로티 부인을 내팽개쳤어요. 죽이려고도 한 것을 내가 구해 주었고.”

차라리 로잘린과 로비엔은 실토하면 살려 주겠다며 회유하려고 했다. 아예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서신을 보낸 것은 선왕비였다. 그 말의 무게와 배신감으로만 따지자면 선왕비 쪽이 더 컸다. 아마 본인은 크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나가 봐도 좋아, 클로티 부인.”

“예. 두 분 모두 편안한 시간 되시길.”

클로티 부인은 평소와 같은 낯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예를 갖춰 인사한 후 물러났다.

“사냥제의 날입니다.”

“사냥제의 날, 사냥을 당한다라.”

문을 닫기 전, 남매의 정다운 대화가 들려왔다. 나누는 이야기는 지독하도록 잔인하고 소름 끼치는데, 스치듯 듣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들릴 만큼 평화로운 대화였다.

클로티 부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문을 끝까지 꼭 닫았다. 이제 아무런 얘기도 들리지 않았지만, 문 위에 얹어 둔 그녀의 손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허…….”

클로티 부인은 문에 머리를 기댄 채 숨을 토해 냈다. 지나가던 하녀 하나가 놀란 듯 클로티 부인을 부축해 왔다.

“부인. 어디 아프신가요?”

“아니. 잠시 현기증이었어. 가던 길 가렴.”

클로티 부인이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하녀의 손을 밀어냈다. 희미하게 미소까지 띤 얼굴은 누가 보아도 충격적인 소리를 소화하는 중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아픈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하녀는 이내 그녀가 아프지 않다는 것을 수긍하고, 가던 길을 마저 갔다.

클로티 부인은 낡았지만 섬세하게 수리된 소머 궁의 복도로 시선을 옮겼다. 평소에는 빛이 들이치는 광경이 장관이지만, 오늘따라 먹구름이 잔뜩 껴 햇빛은 비치지 않았다. 일찍이 밝혀 둔 불이 창문 사이로 불어온 바람에 작게 흔들렸다. 마치 별것 아닌 라비앵 클로티의 인생처럼.

클로티 부인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걸음을 뗐다. 가야 할 곳을 알 것 같아서였다.

불어온 바람에 불이 꺼지고 복도가 조금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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