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그 갑작스러운 상황 앞에서는 로잘린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을 하는 거냐고 묻지도 못한 상태로, 방 안에 잠시 당혹감이 뒤섞인 싸늘한 적막이 스쳐 지났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건지 물어도 될까요?”
그 적막을 깬 건 로잘린이었다.
선왕비의 비밀을 알아내어 가져오라고 한 적은 있어도, 제 앞에서 무릎을 꿇도록 강요한 적은 없었다. 강요했다 하더라도, 클로티 부인이 그리할 사람도 아니었다. 목에 칼이 들어온 게 아니고서야 귀족 특유의 오만함과 고고함을 가진 그녀가 그럴 리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
“일어나서 해요.”
로잘린이 제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그러나 클로티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꾸역꾸역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자세를 고수했다.
“대화할 때 무릎을 꿇고 얘기하는 것이 귀족들의 예절인 줄은 처음 알았는데.”
그쯤 되자, 로잘린도 포기하고 비꼬고 말았다. 어차피 클로티 부인은 제 밑에 있을 때조차도 말을 제대로 따른 적도 별로 없거니와, 지금도 따를 것 같지 않아서였다.
“제가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
“폐하께서 그, 글로리 공주님을 잃도록 계단에서 떠민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선왕비 폐하의 명을 받들어 그리되도록 몰아붙인 것은 사실이지요.”
클로티 부인이 여태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던 일이었다. 이미 묻고 넘어가기로 마음먹은 일을 새삼스레 꺼내는 까닭은 무엇인가?
죽은 아이가 화젯거리로 떠오른 것만으로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로잘린이 불편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직전까지도 배 속에서 생명으로 숨 쉬던 아이를 잃은 것은 로잘린에게도 깊이 베여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아이 얘기가 나오면 저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굴게 되고 마는 이유기도 했다.
“여태껏 사과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사죄드리고자 합니다.”
로잘린은 클로티 부인의 담담한 목소리를 애써 무심하게 들어 넘기려고 노력했다. 그저 미워할 때는 넘길 수 있던 감정이었지만, 사과를 듣고 나자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것은 격렬한 분노인 듯도, 너무 차가워서 뜨겁게 느껴지는 증오인 듯도 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자 앞에서 드러내선 안 된다. 애써 감정을 집어삼키는 로잘린의 목덜미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로잘린은 이미 클로티 부인에게 말을 놓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로잘린의 시선은 숨기지 못한 감정들로 한껏 가라앉아 있기까지 했다.
“선왕비께서는 처음부터 왕비님을 싫어하셨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얘기는 궁금하지 않아.”
“공작 위 수여식에서도 폐하께 망신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나 계셨지요. 레이첼 후작 부인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그리되었을 것입니다.”
3왕자에게 소리를 치고, 탕감해 준 왕실의 빚을 언급해서 로잘린을 싫어한 게 아니었다. 개의 먹이에 던져 섞어 주었던 반지도 단순히 그녀의 분노를 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닌,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처음 보석을 들고 궁에 방문했던 다미안 래비어트는 선왕비께서 직접 부른 것입니다.”
“…….”
“처음 부티크에서 마주쳤던 날, 그자가 전하께 특별한 마음을 품은 것을 알았기에. 제가 고하였습니다.”
클로티 부인이 눈을 꾹 내리감은 채 끔찍한 사실을 토해 놓았다.
“그때부터, 그때부터 선왕비께서는 이미 그를 이용하고, 폐하를 망가트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선왕비를 따랐다. 로잘린이라는 평민 계집애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진실로 그녀의 윗전이 아니었으니까.
“제가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그 명을 따랐던 것은 국왕 폐하 때문이었습니다.”
클로티 부인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로잘린과 똑바로 시선을 맞추었다.
“저는 왕세자께서 태어난 순간부터 그의 유모였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를 갓난아기 때부터 길렀고, 제 아이처럼 품어 왔습니다. 그것이 폐하께 모나게 반응한 이유기도 했지요.”
비틀어진 애정 표현이었다. 아름다운 왕자님, 사랑스러운 왕자님. 당연히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사람이니 오점 하나 없어야 한다는 강박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한미한 귀족 가문도 아닌, 고작 평민 출신의 왕자비는 끔찍한 모멸감으로 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녀의 소중한 왕자님이 그런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더라도, 그것이 그의 진심일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로잘린을 기꺼이 비난하고 상처 입혀 왔다.
“가장 최고의 것만, 가장 아름다운 것만 소유하시기를 바랐으니까요.”
“그런 얘기를 내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클로티 부인.”
가장 최고의 것도 아니고, 가장 아름다운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음인가?
로잘린의 불쾌한 어투에 클로티 부인이 왈칵 얼굴을 구겼다.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저는 폐하께서 그대로 상처받아 없어지기를 바랐습니다.”
“라비앵 클로티!”
“그리하여 다시 그분께 한 점의 티끌 하나 없기를 바랐습니다.”
로잘린 앞에서 얘기할 수 없는 것들. 추악하고 징그럽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그리고 귀족이 품은 속내였다. 클로티 부인은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하여 그 모든 끔찍한 일에 저 역시 관여하였습니다.”
로비엔이 로잘린을 사랑해선 안 되고, 사랑할 리 없다고 믿었다. 그것은 클로티 부인에게 있어 일종의 당위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아마도 로잘린의 상처를 자신의 상처로 받아들이던 로비엔을 발견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제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신뢰와 애정만을 주던 그가, 그 사이의 균형을 잃고 처참하게 넘어졌을 때.
‘그런데도 그냥 넘어가려 하신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겠지만.’
‘……무슨.’
‘폐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거나, 사랑에 눈이 멀어 모른 척하는 것이거나.’
선왕비는 웃고 있었다. 그것이 그에게 지독한 상처가 된 것이 기쁘다는 듯이.
얼마나 애타는 사랑을 하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로잘린이 낮아지는 만큼 로비엔의 위상도 낮아진다. 그녀는 선왕비가 노리던 것이 단순히 로잘린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칼날은 로잘린만 겨누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선왕비의 비밀을 알아 오라 말씀하셨지요.”
클로티 부인이 허벅지 위의 드레스 자락을 꼭 붙들었다. 긴장과 분노로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어쩌면 배신감인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키웠는데 그를 죽이려고 해.
“제가 많은 것을 잘못한 것을 압니다, 폐하.”
“…….”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 무릎을 꿇는 것만으로는 용서해 주실 수도, 제 말을 오롯이 다 믿으실 수도 없겠지요.”
기묘한 분위기 속에, 로잘린은 평소보다 심장이 펄떡거리며 뛰는 가슴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불쾌할 정도로 빠르고 강한 박동이었다.
“그러하나 부디 믿어 주십시오. 제가 지금 하는 말이 거짓이라면, 지금 당장 저를 죽이겠다 하셔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클로티 부인이 떨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 속 사랑스러운 왕자님의 가슴에 칼을 찌를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비록 지금은 로비엔이 그녀에게 등을 돌렸고, 어쩌면 영원히 용서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국왕 폐하를 가슴으로 품고 친자식처럼 기른 감정은, 지금도 그분이 행복하셨으면 하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저는 진짜 제 자식보다도 폐하의 안위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클로티 부인은 이제 울고 있었다. 로잘린은 클로티 부인의 얼굴 위로 길게 흘러내리는 진심이 담긴 눈물 줄기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굳이 그 눈물에 이름을 붙인다면 후회와 고통, 그리고 절망과 비애였을 것이다.
“선왕비 폐하와 왕제들께서 폐하를 배신하려고 합니다.”
무슨. 말이 나오지 않아 그저 입만 뻐끔거렸다. 로잘린은 모든 사고가 정지한 듯 새하얘진 머릿속을 애써 더듬었다.
“……왜?”
그러나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로 나온 것은 고작 한 단어의 질문이었다.
“폐하께선 선왕과 선왕비의 적장자야. 왕위 계승에서 가장 우선권을 가진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그를 지지했던 것이 선왕비가 아닌가?”
“…….”
“고작 지금 나와 반목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보가트 가문을 치워 버리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역을 저지르겠다고?”
로잘린은 줄곧 카를로스 백작을 내세운 피베체 공작을 주동자로 생각해 왔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단순히 보가트 가문이 아니라 로비엔을 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깊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를 협박하는 정도로나 생각했다.
아무리 예상보다 멀리 가더라도, 그의 왕관을 노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단순히 로비엔이 피베체 공작의 조카라서가 아니었다. 로비엔의 풀네임에 들어가 있는 ‘피베체’라는 선왕비의 가문, ‘르 칼라브리아’라는 왕가의 이름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는 선왕과 선왕비의 적장자였고, 누구보다 분명한 왕위 승계권을 가진 자였다. 그것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선왕비는 자신의 첫째 아들인 로비엔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궁 안의 모두가 그것을 알았다. 한때 로비엔의 별명이 모두에게 사랑받는 왕자님이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로잘린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감춰지지 않는 혼란을 드러냈다.
“폐하께서는, 폐하께서는…….”
이제 클로티 부인은 꺽꺽거리며 울고 있었다. 내내 먹구름이 끼어 어둑했던 하늘 사이로 아주 잠깐, 클로티 부인의 머리 위로 창문을 뚫고 쏟아진 빛이 눈이 부셨다.
답답한 마음에 그녀에게 대답을 재촉하려던 로잘린의 행동이 문득 그 빛을 마주친 순간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뜻밖에도 기묘한 깨달음을 얻은 머리만이 기계적인 사고를 지속했다.
눈부신 백금발. 호수처럼 푸른 눈. 이유 없이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던 태도.
……사람을 홀리는 미인.
“……설마 레이첼 후작 부인의 자식이야?”
로잘린의 떨리는 목소리에 클로티 부인이 끝내 바닥에 이마를 파묻은 채 오열하기 시작했다. 말로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그 무엇보다 명백한 대답이었다.
기억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재빠른 속도로 내달려 과거로 역행했다. 하나하나의 그림처럼 선명하게 스치던 기억이 멈추어 선 순간은 바로 그들이 혼인 서약서에 서명하던 날이었다.
왜 여태 기억하지 못했을까.
차게 식은 눈으로 저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려 로비엔을 바라보던 선왕비의 파란 눈동자. 새파란 불꽃이 타오르듯 강렬했던 감정. 그러나 금세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을 하고 있기에 잘못 보았을 거라 부정했었던…….
“폐하께서, 선왕비의 친자가 아니야?”
짙은 경멸.
“하…….”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로잘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구르릉, 먹구름을 품은 하늘이 구겨지며 온통 진동하는 소리를 냈다. 겨울의 빗방울이 절망처럼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