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89)화 (89/151)

# 89.

왕은 보가트 공작을 불러, 보가트 상단에서 발행한 서신의 존재를 아느냐고 물었다.

보가트 공작은 펄쩍 뛰며 부인했다. 상단의 인장은 맞지만, 결코 그가 발행한 적이 없는 것이라 했다.

로비엔은 드마셸의 불충분한 해명을 받아들였다.

‘나는 왕으로서 선서한 바가 있어. 재판에 있어서 공정과 자비를 지킬 것.’

정확히 말하자면 보류였다.

‘바트만의 게리가 카드에 적혀 있지 않은 수령인을 어떻게 확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수령인이 가지고 있어야 할 카드를 왜 그가 소유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 오기 전까지는 모두 보류한다.’

증거의 허점, 보가트 가문의 부정, 확신범이지만 또 다른 증인이 될 수 있는 레이첼 후작 부인의 사망. 법원에 넘기더라도 단번에 밝혀낼 수 없는 만큼, 시간을 두고 상반된 주장의 그릇됨을 밝혀내겠다는 것이었다.

역모에 준하는 죄이므로 억울한 자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니 사리에 온당하다는 의견과, 범인들이 증거를 완벽하게 수집하도록 두었겠느냐는 의견이 충돌했다. 전자는 대부분 하위 귀족과 진보 성향을 지닌 자들의 것이었고, 후자는 고위급의 보수 성향을 지닌 귀족들의 것이었다.

후자의 귀족들은 세 가문이 가장 뚜렷했다. 피베체, 리만, 그리고 카를로스.

그리고 후자의 의견에는 늘 ‘아무리 당신의 비를 총애한다고 하더라도’와 같은 그럴싸한 비난이 덧붙었다. 로비엔의 판단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떨어뜨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비난은 어느 정도의 효과를 거두었다. 매일같이 논쟁으로 온 사방이 시끄러웠다.

“폐하.”

그러나 로잘린의 남편이면서 왕인 로비엔은 사랑에 눈이 멀어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머리가 흐릿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미 제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굳이 반목하지 않았을 테지.

그들은 로잘린이 로비엔을 아는 것의 반만큼도 그를 알지 못했다.

로잘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이미 그에게서 앞으로 어찌할지를 들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속이 시끄러워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내내 옆에 서 있던 라나가 바로 말을 붙여 왔다.

“말해요.”

“마리가 말하길, 레이첼 후작 부인이 폐하를 뵙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아.”

로잘린이 작게 소리를 흘렸다.

로비엔은 공식적으로 레이첼 후작 부인의 죽음이 선고된 밤, 레이첼 후작 부인을 하녀로 둔갑시켜 로잘린의 궁에 숨겼다. 선왕비가 로잘린과 완벽히 대치하면서 그 어떤 왕래도 하지 않는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혹여 말이 새어 나갈까 걱정이 됐다. 로잘린은 자신만이 접근 가능한 곳에 레이첼 후작 부인을 숨겨 두고, 라나와 마리에게만 그녀를 보살필 것을 명령했다.

사람을 잘 믿지 않는 성격 탓에, 라나가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얼마쯤 존재하기는 했다. 라나는 로잘린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레이첼 후작 부인을 제 궁에 숨기기 전까지 솔직하게 모든 것을 다 드러내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라나는 굳건히 입을 걸어 잠갔다. 로잘린이 드러낸 의심에 다소 서운해하는 기색을 드러내긴 했지만 잠시였다. 마리처럼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던 수족이 아니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자신이 로잘린에게 은혜를 갚겠다 충성을 맹세한 것은 거짓이 아님을 알아 달라고 부탁해 왔다.

로잘린은 그날 라나를 진짜 자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지금 가 봐야겠네요.”

로잘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접실에서 눈에 띄지 않는 가장 안쪽 책장 뒤에는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그 문을 열면 캄캄한 어둠 속에서 계단이 이어지는데, 그것은 타인의 눈에 띄지 않게 외부로 이동할 수 있는 왕족의 비밀 통로였다.

마리는 주로 로잘린이 돌아올 때까지 그 문을 지키는 역할을, 라나는 예상치 못한 손님이 오면 응대하여 돌려보내는 역할을 했다.

로잘린은 빛이 흐릿해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중간중간 램프가 걸려 있어 발을 헛디디거나 넘어지지는 않을 정도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열자, 한쪽 구석에서 켜켜이 쌓인 물건들에 몸을 기댄 가녀린 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칼라브리아의 왕비를 뵙습니다.”

“몸도 성치 않으니 앉아 있어요.”

로잘린의 권유에 레이첼 후작 부인이 어정쩡하게 반쯤 일어났던 몸을 도로 앉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말로 목숨이 경각에 있더니, 막상 회복하기 시작하자 차차 본래의 몸 상태를 되찾기 시작했다. 제정신을 갖추었고, 말을 하는 일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선왕을 시해한 혐의를 또렷하게 부인했다. 게리 바트만이 주장한 것도 모두 허위라고 했다.

‘그날, 입궁할 준비를 하면서 반지를 끼고 있었나?’

‘본래 연회나 궁에 들었을 때와 같은 때를 제외하곤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습니다.’

‘선왕과 만나는 자리에서도?’

‘예. 제가 항시 곁에 두던 하녀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또한, 그 서신에 이름이 쓰여 있지 않은 것은 자신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녀는 정체를 숨기고 싶은 곳에서는 멜리사라는 가명을 사용해 왔는데, 보가트 상단에서 무언가를 구매할 때 역시 그랬다고도 했다. 실제로도 상단에는 멜리사라는 이름으로 제품을 구매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무슨 일로 보자고 했죠?”

로잘린은 그녀의 말을 믿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사실 본인도 정부 따위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왕의 정부는 무얼 해도 욕을 먹었으니까. 하다못해 흉년이 들어도 왕이 요녀를 만나 부정한 짓을 저질러서라고 했다.

처음 만나던 날에도 레이첼 후작 부인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었다. 그런데도 선왕의 곁을 지켰다는 건 단순한 욕망의 문제가 아니리라 믿었다.

“선왕 폐하께서 돌아가시기 전의 상황이 기억이 났는데,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무엇이 이상하기에?”

제 유일한 동아줄이었던 선왕이 죽고 자신은 그를 시해한 범인으로 몰린, 미치지 않는 게 용한 이 상황에서도 아름다운 금발의 미인.

다만 한 가지 궁금증은 들었다. 굳이 왕이 아니어도 됐을 사람이 오랜 시간 그의 곁을 지킨 것은 왜였을까? 사랑이라고 하기엔, 레이첼 후작 부인은 선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오랜 시간 슬퍼하지 않았다.

“선왕 폐하를 뵈러 갔을 때 이미 선객이 들어 있었습니다.”

“…….”

“선왕비 폐하였지요.”

로잘린이 말의 진의를 파악하듯, 무표정한 얼굴로 레이첼 후작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주장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은 듯, 푸른 눈을 똑바로 마주쳐 왔다.

“선왕 폐하께선 그때 이미 차를 몇 모금 마신 상태였습니다. 선왕비께서 폐하와 약속이 있는 줄 몰랐다며 먼저 자리를 뜨셨지요.”

과거의 일을 회상하던 레이첼 후작 부인의 시선에 묘한 의아함이 섞였다. 로잘린은 그녀가 설명을 이어 가길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본래 저를 만날 때는 적의를 숨기시질 못하는 분인데, 그날은 유독 태연하고 다정하셨네요.”

이상하게 여길 만한 변화였다. 선왕비가 레이첼 후작 부인에게 가진 악감정이 하루아침에 희석되었을 리는 없었으니까.

“선왕비 폐하께서는 본인의 몫이었던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상태였으나, 저는 폐하께서 직접 내려주신 차를 따로 받아 마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반쯤 차를 마셨을 때쯤 선왕 폐하께서 복통을 호소하며 구역질을 시작했습니다. 그 직후에 온몸에 경련이 일었고요. 시종을 부르려 했으나, 저 역시 고통스러워져 의식을 잃었습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즉사하지 않은 것은 섭취한 양이 선왕처럼 치사량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왕비. 로잘린은 입안에서 선왕 시해의 진범일 수 있는 그 이름을 굴리듯 중얼거렸다.

“진실로 선왕 폐하를 시해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유일한 동아줄에 악의를 품을 이유도 없거니와, 설사 그랬다 해도 도망을 하든지 같이 죽었어야 맞지 않겠습니까.”

로잘린은 간절하게 진심을 피력하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름다운 선왕의 정부를 응시했다. 같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저토록 비련해 보이는 얼굴로, 물기가 고인 듯 푸른 눈으로, 탐스럽게 흘러내리는 백금발을 가진 미인이 하는 말을 그저 믿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선왕비에게 품은 악감정으로부터 비롯한 일은 아니었다.

“믿어요.”

객관적으로도 그랬다. 레이첼 후작 부인은 정신을 차린 후에도 간신히 붙인 목숨을 몇 번이나 도둑맞을 뻔했다. 그리고 그녀를 해치려던 자가 선왕비라면, 그녀가 알고 있는 정황 증거들이 죽어 마땅한 이유였던 것이다.

그날 죽기 직전 선왕이 자신과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차를 받아 놓고 마시지 않고 자리를 뜬 것을 아는 사람. 그리고 증거의 허점을 반박할 수 있는 사람.

레이첼 후작 부인이 정신을 차리고 증언한다면, 레이첼 후작 부인만 독박을 쓰는 게 아니라 용의자가 둘이 되는 셈이니까.

“폐하께도 그리 전달 드릴게요.”

“……폐하께선 괜찮으십니까?”

막 문을 당겨 나가려던 로잘린이 걸음을 멈추고 레이첼 후작 부인을 돌아보았다.

“이 소란들 가운데서 완벽하게 괜찮다고 할 수는 없겠죠.”

“…….”

“하지만 이 일로 역당들을 잡아낼 수 있을 테니, 오히려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답지 않게 친절한 설명이었다.

로잘린은 레이첼 후작 부인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다가, 드레스 자락을 추스르며 창고를 나섰다.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아주 기묘한 기분이 드는 것을 곱씹으면서.

그간 아름다운 얼굴로 그녀를 약해지게 만드는 존재는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폐하.”

문 옆을 지키고 있던 마리가 로잘린이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잽싸게 문을 닫고 말을 붙여 왔다. 로잘린은 대답 없이 마리를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클로티 부인이 와서 폐하께 만남을 청하고 있어요. 라나 님이 돌려보내려고 하는데, 막무가내로 버티고 있는 것 같아요.”

“클로티 부인이?”

뭐가 되었든, 약점이 잡힌 클로티 부인은 저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얘기를 해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라나에게 들여보내라고 전하렴. 둘 다 잠시 나가 있고.”

“예, 폐하.”

마리가 종종걸음으로 응접실 밖으로 나섰다. 로잘린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열린 문으로 클로티 부인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로티 부인이 나붓한 걸음으로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무표정한 얼굴, 우아한 자태는 평소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문이 닫히자마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한 손을 들어 벌어진 입을 가렸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 클로티 부인이, 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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