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그 서신에 시선을 고정했던 로비엔이 고개를 들어 올린 건, 제법 시간이 지난 후였다. 카를로스 백작은 그 시간만큼이 바로 왕이 동요한 정도라고 생각했다.
“왕비 폐하의 가문과 관련해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몹시 송구하지만, 폐하…….”
“거래 시간과 장소는?”
그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을 시간이라고 생각해 로비엔에게 말을 걸었으나, 칼 같은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당황한 게리 바트만이 눈을 굴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선왕 폐하께서 시해당하기 전날 밤, 레이첼 후작 부인의 별저에 갔습니다.”
“직접 전달했나?”
“후, 후드가 달린 로브를 쓰고 있어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금발에, 희고 고운 손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허겁지겁 대답하는 게리 바트만의 모습은 마치 외운 것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외운 것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고 있는 것처럼.
로비엔의 날카로운 시선이 게리 바트만을 샅샅이 훑었다.
“폐하, 이자는 무지하여 아는 것이 적고…….”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생겼고, 특징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무지하다면 이 자리에 서지도 못했겠지.”
“…….”
“그 손에 특징은 없었나?”
갑작스레 손에 대한 물음이라니. 질문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듯, 게리 바트만이 도록도록 눈을 굴렸다. 시선의 종착지는 카를로스 백작이었다. 로비엔은 한 발짝 떨어진 채, 그 모든 것을 관망하고 있었다.
“고, 고생을 하지 않은 듯 가느다랗고 매끄러웠고…….”
“그리고?”
“손에 반지를, 반지를 끼고 있었습니다.”
로비엔이 흥미로운 얼굴로 게리 바트만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반지였지? 반지의 색은?”
“그…….”
게리 바트만이 당황한 얼굴로 혀로 입술을 축였다. 물론 마부로 일하고, 배달부로 일하면서 일국의 왕을 만나 쉽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걸 고려하더라도 이는 지나친 긴장이 아닌가. 기본적으로 로비엔이 그를 의심하고 있기에 더 그렇기는 하겠지만, 어떻게 보아도 수상했다.
“소인이 미천하여 보석의 종류까지는 모르옵고…… 흰색. 흰색이었습니다.”
게리 바트만이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번쩍 들고 대답했다.
카를로스 백작도 더 덧붙이지 않았다. 레이첼 후작 부인은 선왕비와 매한가지로 장신구를 뽐내기를 좋아했으니 뭐라도 끼고 있었을 것이고, 어떤 색을 갖다 댄다고 하더라도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레이첼 후작 부인은 죽어 버렸다. 유효한 증거는 오직 보가트 상단의 인장이 찍힌 저 서신뿐이다.
그 서신은 고위층의 구매자가 제품을 구매할 때, 보가트 상단에서 제품을 보증해 주는 용도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상단의 인장은 아무나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적어도 상단의 주인인 드마셸, 최소한 그 아들인 발란이 엮여 있다는 의미였다.
“폐하. 중요한 것은 반지나 손의 모양이 아닙니다. 보가트 공작가에서 레이첼 후작 부인을 도와 선왕을 시해하는 데에 관여한 것입니다! 어서 그들의 죄를 수사하여…….”
로비엔은 목소리를 높여 보가트 공작가에 죄를 물어야 한다는 카를로스 백작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산뜻하게 인정했다.
“그대의 말이 맞아, 카를로스 백작. 중요한 것은 반지나 손의 모양이 아니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이 있어. 이 카드에는 누구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고, 게리 바트만은 구매자의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구매자가 레이첼 후작 부인이라고 단언하지?”
로비엔의 물음에 기세등등하던 카를로스 백작이 잠시 멈칫했다.
“죄를 추궁하기도 전에 죽어 버렸지만, 레이첼 후작 부인이 선왕 시해의 진범이지 않습니까, 폐하. 그녀가 머물던 방에서 비소의 흔적도 나왔던 것을요.”
“한 가지 더.”
“하문하십시오.”
“보아하니 이 서신은 구매자에게 제품을 확인시켜 주는 용도인 것 같은데, 레이첼 후작 부인이 구매했다면 응당 그녀의 방에서 발견되어야 할 카드가 왜 저자에게 있는지 설명을 듣고 싶어.”
카를로스 백작이 굳은 얼굴로 로비엔을 똑바로 응시했다. 왕을 대한다기에는 건방진 태도였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거두어 가지 않은 것이겠지요. 폐하, 중요한 것은 보가트 상단의 인장이 찍힌 서신의 존재입니다. 그 인장은 보가트 상단의 주인인 보가트 공작, 그리고 그 아들인 발란 칼라브리체 보가트만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비를 아끼시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보가트 공작가에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하지 않으신다면,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왕관을 둘러싼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그럴싸한 명분과 세력.
증거의 완벽함에 대한 의심은 시간이 지나가면 잊힌다. 하물며 다른 증거를 내세우며 반박이라도 할 수 있는 레이첼 후작 부인도 존재하지 않음에랴.
왕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구석으로 몰아야 한다. 그들이 준비한 판에서 카를로스 백작이 맡은 역할은 몰이꾼이었다.
“예상했던 대로네요.”
로잘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보가트 공작가를 노리고 있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오로지 장부에 적힌 구매 금액과 수량에만 집착해, 상단 안에 그들의 사람을 심어 두었다는 것은 뒤늦게 알아챘다.
“제 잘못이에요. 조금 더 일찍 눈치챘어야 했는데.”
“로잘린, 이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로잘린은 순순히 자신의 패착을 인정했지만, 로비엔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보가트 가문에서 저지르지도 않은 일을 덮어씌우려고 들 줄 알았던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당사자인 드마셸도 매한가지였으므로, 그것을 로잘린의 잘못으로 여기는 것은 부당했다.
“선왕의 죽음을 보가트 가문으로 연결 짓는 일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에요.”
“…….”
“그리고 이번 일로, 오히려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선왕 시해의 진범은 처음부터 선왕을 죽이고, 그 책임을 보가트 공작가에 물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보가트 공작가에 해를 끼칠 이유가 없는 레이첼 후작 부인은 범인일 이유가 없었다.
“행정 제안 기구가 제안한 시행령 때문에 선왕이 시해당했다고, 행정 제안 기구 역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요.”
로잘린이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참에 마음에 들지 않는 기관에도 덤터기를 씌워 정리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처음엔 그저 이참에 마음에 들지 않는 기구를 없애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로비엔의 의견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실제로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관련되어 있다니……. 그들이 왕을 시해할 목적으로 제안을 했단 뜻인가요?”
“보가트 공작 말고도 감시자는 한 명 더 있었어요.”
카를로스 백작. 로잘린이 낯설지 않은 이름을 떠올렸다.
다미안 래비어트가 반죽음이 되기 직전까지 마셨던 액체의 근원지가 바로 그의 영지였다. 다미안에게 손을 뻗치고 있었고, 현재 보가트 가문을 압박하고 있으며, 행정 제안 기구의 감시자로서 의견을 개진하거나 폐기할 수 있는 자이기도 했다.
“행정 제안 기구에서 그런 의견이 나오도록 유도했을 수도 있겠군요.”
로잘린이 짧게 신음했다. 게리 바트만이 가지고 왔다던 보가트 상단의 제품 보증 서신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복잡한 심경이 묻어났다.
“아버지께선 수익을 더 벌어들이기 위해 발제에 당연히 동의하셨을 테고요.”
카를로스 백작은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중에서도 강경 보수파였다. 선왕이 행정 제안 기구의 감시자로 카를로스 백작을 둔 것은 그 때문이기도 했다. 로비엔의 말대로 그들을 구속할 장치로 발족시키긴 했지만, 선왕은 돈만 믿고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한 부르주아들을 곱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선왕과 카를로스 백작 사이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면, 보가트 공작의 실각을 유도할 만한 사건과 행정 제안 기구의 폐지일 확률이 높았다. 선왕이 그를 위한 사건으로 자기 죽음을 예상치는 않았겠지만.
“그때부터 선왕의 죽음을 계획한 걸까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은 추측일 뿐이니까요.”
로비엔이 힘없이 웃었다.
사실 아니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만일 그때부터 선왕의 죽음을 계획하고 있었다면, 카를로스 백작은 벗어날 수 없는 역모의 그림자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와 정치적 성향이 가까우며, 카를로스 백작을 제 가신처럼 휘두르는 피베체 공작 역시 그 죄에서 자유롭지 않을 거라는 직감이 들어서였다.
최근 선왕비와의 대립으로 피베체 공작과 소원해지기는 했으나, 로비엔은 어릴 적부터 그의 외삼촌을 믿고 따랐다. 처음 목검을 쥐는 방법을 알려 준 것도, 총을 쏘는 방법도 그에게서 배웠다. 어미와의 관계만큼 좋은 추억이 많은 사람이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따로 한 말은 없습니까? 어떠한 증언이라도.”
로잘린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외부적으로 레이첼 후작 부인의 죽음이 선포되면서, 보가트 상단의 무고를 증언해 줄 증인은 없어졌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건 슬픈 일이지만, 레이첼 후작 부인은 자신이 억울하다는 증명으로 내놓을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솔직히 왜 레이첼 후작 부인의 죽음을 기대한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레이첼 후작 부인이 죽은 이후에야 게리 바트만을 들이민 이유도 모르겠고요. 그녀는 이 일에 대해서 아는 게 정말로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
“하지만 계속 캐묻다 보면 무언가 하나쯤은 있지 않겠어요?”
로잘린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적어도 그날 반지를 끼고 있었는지, 손에 점 하나 없는지 정도는 알 수 있겠죠. 오늘 그게 궁금해서 오셨을 테니까요. 아닌가요?”
마치 그와의 시간을 기대했다가, 자신과 같은 목적이 아니라는 데에서 마음이 상한 듯 내뱉는 말에 로비엔이 부드럽게 웃었다.
“정말 비는 속일 수가 없네요.”
로비엔이 가급적 밤마다 로잘린의 침실로 와 같이 잠을 청하고, 가능하다면 식사를 같이하고 이전처럼 시간을 보내려는 것은 사실이었다. 함께 있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늘 없는 짬을 내서 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도 그랬다.
“하지만 레이첼 후작 부인을 굳이 여기에 숨겨 놓은 건, 비와 쉽게 만나려고 그런 것도 맞아요.”
“카사노바처럼 말씀하시네요.”
로잘린이 샐쭉한 얼굴로 대꾸했다. 곧 제 손에 들린 보가트 상단의 서신을 보이지 않도록 테이블 위에 뒤집어 놓았다. 눈으로 계속 증거를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보가트 가문이 실제로 연관되었을까 걱정되는 마음이 싫었다.
자신과 관련된 일을 포함해서, 더는 그에게 나쁘고 힘든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슬프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