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공식적으로 레이첼 후작 부인의 사망이 선고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체력이 저하된 상태인데, 어떤 음식도 제대로 섭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하다가 죽었다는 게 레이첼 후작 부인이 사망한 표면적인 사유였다.
그러나 궁 안에서는 그녀가 또다시 독극물을 먹고 자결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머물던 공간에서 고통스럽게 토악질을 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자들과 나무로 짠 관에 실려 나온 모습이 단순히 섭식 문제로 인한 죽음이 아니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하긴, 살았다 해도 어차피 선왕을 시해한 자라는 이유로 목이 베였을 것이다. 그녀는 궁 안에서는 선왕의 눈을 흐리는 색사로, 궁 밖에서는 천하의 요녀로 불렸다. 누구 하나 보호해 주지 않는 선왕의 정부에 불과했다는 의미였다.
“선왕이 돌아가시면 바로 쫓겨날 텐데 무슨 생각으로 독살을 했을까?”
“이상해. 제 유일한 동아줄을 끊으면 그대로 추락할 걸 몰랐을 사람도 아니고.”
그러나 그렇게 되자, 오히려 레이첼 후작 부인에 대한 동정론도 일었다. 그녀에게는 가문이 풍비박산 날 위험만 있을 뿐 이익이라고는 없는데, 도대체 저를 어여쁘게 여기고 총애한 선왕을 해친 이유가 무엇이냐는 의문도 따라붙었다.
“그래 봤자 어차피 죽었으니 끝이지. 설령 억울하대도 누가 알 거야?”
“맞아. 죽은 자는 말이 없지.”
“그냥 이대로 다 마무리되었으면 좋겠어. 하도 뒤숭숭하니 일하기도 심란해.”
시종들이 레이첼 후작 부인을 가둬 두었던 방을 지나며 속닥거렸다.
“하지만 이대로 끝날 것 같지는 않던데.”
삼삼오오 모인 것들의 수다를 귀담아듣지 않고 사람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확인한 시종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보가트 공작가에서 레이첼 후작 부인에게 비소를 제공했대.”
“어차피 왕비가 되고 왕의 장인이 될 텐데 굳이?”
“새로운 사업 문제로 선왕과 대립하는 일도 있었다고 하니까. 방해물은 빨리 치워 버려야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그들의 수다는 장소를 잊은 채 위험하고 무거운 주제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러다 그들의 목을 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밀리언이 기둥 뒤에 숨기고 있던 몸을 드러냈다.
드러난 인영에 놀란 시종들이 파드득 떨며 밀리언에게 황급히 인사했다.
“아무렇게나 놀릴 입이 달린 머리라면 아예 없는 게 좋겠어.”
“죄, 죄송합니다.”
“가 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대놓고 쏘아붙이기보다는 돌려 말하는 화법이 더욱 싸늘했다. 시종들이 그가 마음을 바꾸기 전, 후다닥 달려 나갔다.
한결 조용해진 계단을 올라, 긴 복도를 지난 밀리언은 붉게 치장된 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사실 밀리언 역시 들려오는 소문을 아예 모른 척하기가 어려웠다.
‘정말로 보가트 공작가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그의 주군에게 대놓고 물어 본 적도 있었다. 개발을 위해 산을 미는 작업을 진행 중인 동부에서, 거처를 잃은 야생동물들이 민가로 내려오는 횟수가 잦아졌다는 보고와 대처 방안에 대해 논의하던 때였다. 뜬금없는 상황에 질문할 정도로 밀리언 역시 걱정이 많았던 탓이었다.
왕비에 대한 왕의 지독한 신뢰와 사랑은 그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로비엔을 설득하려면 로잘린을 가장 먼저 찾아 나설 만큼. 하지만 그 사랑이 그를 좀먹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지 않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밀리언.’
‘…….’
‘내가 여자에게 눈이 멀어 허튼 판단을 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겠지.’
로비엔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보가트 공작은 안정적으로 이어지는 일상을 덮어 두고 도전을 할 만큼 담대하지는 않아. 기다리면 떨어질 열매를 굳이 흔들어 일찍 먹으려고 사고를 칠 만큼 서두르는 유형도 아니고. 도전적인 건 오히려 내 비의 성격에 가깝지.’
로비엔은 이제 들고 있던 보고서를 아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왕비께서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사람이지. 오히려 아이를 죽이고 자신을 해하려던 선왕과 선왕비의 문제를 내 상처 때문에 덮을까도 고민했던 사람이야.’
‘폐하.’
‘이전에도 한 번 경고했지만, 그런 사람을 입에 올려 두고 의심 운운하는 건 듣기 곤란한데.’
깍지를 낀 두 손 위에 턱을 얹은 채,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밀리언을 바라보는 로비엔의 시선은 한층 더 낮은 온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대도 알지 않아? 비가 그런 멍청한 작자는 되지 못한다는 걸.’
‘……걱정이 앞서 실언을 했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의례적인 미소를 띠지 않은 솔직한 얼굴. 그것들은 오랜 시간 그의 부관으로 함께해 온 밀리언이기에 베푼 온정이었을 것이다.
밀리언의 빠른 사과에 로비엔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의 걱정은 이해해. 비 앞에서 티 내선 안 되겠지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의 대답이 마음에 찬 듯 로비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밀리언은 그의 주군이 멍청한 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그를 모시며 이런 사람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으니까. 그는 아무리 사랑에 빠졌어도, 그 사랑이 내지르는 칼날에 심장이 찔려 무력하게 죽어 갈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믿겠다. 밀리언이 새삼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이었다.
“로단테 백작.”
밀리언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카를로스 백작이 복도 끝에서부터 걸어오고 있었다.
“카를로스 백작님. 이른 시간에 오셨군요.”
“폐하께서 고작 카를로스를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으니 말이야.”
밀리언의 인사에 카를로스 백작이 정석의 대답을 내어놓았다.
급작스럽게 요청한 알현이었는데도 왕이 즉시 받아들였다. 최소 며칠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하여 준비는 덜 되어 있었지만, 감히 왕국의 태양을 뵙는데 늦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보가트 공작께선 종종 방문하시나?”
“아뇨. 외척으로서는 몹시 온건한 분이시지요.”
그러나 어차피 약속 시각이 아닌 것, 질문으로 시간이라도 때울 셈인지 카를로스 백작이 뜬금 맞게 보가트 공작에 대해 물어 왔다.
밀리언은 그의 마음속에서 이미 준비된 대답을 내어놓았다. 이미 로비엔의 의중을 따르기로 한 이상, 그에게 드마셸에 대한 호불호를 드러낼 대답은 존재치 않았다.
“온건은 무슨. 궁의 생리를 알지 못해서겠지.”
그러나 카를로스 백작은 다른 대답을 원하는 사람처럼 밀리언의 반응을 긁었다. 밀리언은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공작까지 되었는데도 그에 마땅한 채신을 차리기는커녕 그놈의 기구인지 무엇인지에서 평민들, 하위 귀족들과 한 몸처럼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
“말이 격해졌습니다, 백작님.”
“고귀한 국왕 폐하의 위신을 떨어뜨린단 생각이 들어 그러는 게지. 어찌 그것을 그냥 두고 보시는지.”
카를로스 백작은 영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애초에 보가트 가문이 공작가가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귀족이 도처에 널려 있기는 했다. 근래처럼 대놓고 공격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등 뒤의 그자는 누구입니까?”
밀리언에게 로비엔의 마음을 대신 설명할 자격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득 화제를 돌리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던 밀리언의 시선이 카를로스 백작 등 뒤에 서서 불안하게 눈을 굴리고 있는 초췌한 사내에게 꽂혔다.
동시에 카를로스 백작이 꾸며낸 듯 인위적으로 들리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호출하는 종소리가 왕의 집무실에서 울려 퍼졌다.
로비엔은 문득 집무실 밖이 다소 소란해진 것을 느꼈다. 마침 빈 시간에 휴식을 취하던 터라 작은 변화도 느낄 수 있었다.
로비엔은 책상 위에 놓인 종을 집어 들고 흔들었다. 종을 흔듦과 거의 동시에 문이 열리고 시종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밖에 누가 왔나?”
“카를로스 백작께서 오셨습니다.”
로비엔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의 죽음을 공표하기 전에도 그렇기는 했지만, 가짜 죽음을 공표하자마자 그가 눈여겨보는 요주의 인물 셋, 피베체 공작, 리만 후작, 카를로스 백작이 번갈아 가며 그에게 제대로 된 휴식 한 번 취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증거 하나 없는 보가트 가문에 대한 진상 조사 요구가 목적이었다. 그게 이 사건의 전말이라는 것처럼, 아주 줄기차게도.
“들여보내.”
“예, 폐하.”
시종장이 문을 열고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로스 백작이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몇 계단쯤 높은 위치에서 로비엔은 심상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왕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카를로스 백작이 예를 다해 인사하려던 찰나, 로비엔의 손짓에 멈추었다.
“급히 만남을 요청한 이유가 뭐지?”
로비엔은 그에게 앉으라는 말조차 하지 않은 채 본론부터 물었다. 잠시 당황한 듯 눈을 껌뻑이던 자가 이내 표정을 갈무리한 후 입을 열었다.
“선왕 폐하의 시해와 관련하여 드릴 말씀이 있어 알현을 요청하였습니다.”
“……무엇이기에?”
“선왕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레이첼 부인의 저택에 비소 배달을 하였다는 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로비엔의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 갔다. 조금 웃는 얼굴인 것 같기도 했다.
“놀랍게도 보가트 상단에서 일하던 자였습니다.”
“이름이 뭐지?”
“바트만의 게리라고 합니다.”
예상했던 이름이었다. 로잘린이 허겁지겁 달려와 찾아야 한다고 말했던 이름이었으니까. 기사들을 보내 찾으라 명령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던 자. 카를로스 백작가에서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카를로스 백작은 말을 내뱉으면서도 그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는 것인지, 정말로 충격을 받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어 카를로스 백작은 다소 혼란스러워졌다.
“함께 왔나?”
“예.”
“들여.”
로비엔의 명령에 카를로스 백작이 직접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체격은 왜소해 보이지만 몸은 다부진 사내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문이 열리자 파드득 떨며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서 들라 하셨다.”
“예, 예.”
게리 바트만이 허둥지둥 왕의 응접실 안으로 들었다. 최상품으로만 꾸며진 방 안, 최고급 소재들로만 옷을 차려입은 왕과 귀족 앞에서 꼬질꼬질한 제가 면구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의 저택에 비소 배달을 했다고?”
“예, 예. 그렇습니다.”
“증거는?”
로비엔이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질문했다.
왕의 기백에 눌린 듯 침을 꼴깍 삼킨 게리 바트만이 떨리는 손으로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끄집어냈다. 카를로스 백작이 중간에서 그를 받아 들었다가, 로비엔에게 공손하게 건네어 왔다.
로비엔은 그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친애하는 부인, 약속한 물건을 담아 보냅니다.>
보가트 상단의 인장이 찍힌 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