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아침 일찍부터 로잘린이 보낸 하녀 마리가 보가트 저택에 도착했다. 집사로부터 소식을 들은 드마셸이 집무실로 마리를 불러들였다.
“왕비께서 최근 배달을 담당하던 자들 중 그만둔 자들이 있으면 그 이유를 알아 오라 하셨습니다.”
“배달을 담당하던 자?”
뜻밖의 물음에 드마셸이 고개를 갸웃했다.
“비소의 재고량이 사용량을 제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 말씀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와 인접한 귀족들이 비소를 유출한 주범으로 보가트 상단을 의심하고 있다는 소문은 그도 접하긴 했다. 그러나 구매량에서 사용량을 제하고 남은 재고량이 크게 다르지 않아, 억지로 증거를 만들기에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은 참이었다.
“예. 일러 주시는 대로 저는 바로 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발란을 불러와.”
드마셸이 제 옆에 선 집사에게 명령했다. 그가 바로 자리를 비웠다가, 지난밤의 취기를 간신히 추스른 발란과 함께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 꼴을 지켜보는 드마셸의 얼굴이 차게 굳어 있었다.
“너 또 술을…….”
습관처럼 발란을 꾸짖으려던 드마셸이 제 앞에 마리가 있음을 인지하고는 간신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발란은 목을 가다듬고 눈을 똑바로 뜨는 등, 제 아비 앞에서만큼은 맨정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왕비께서 배달을 담당하던 자들 중 그만둔 자들을 추려 올리라 하셨다니 최대한 빨리 알아 와.”
“왕비께서는 이제 상단의 일에서 손을 떼셔야 하지 않습니까? 내궁의 일에나 신경 쓸 일이지 아직까지 상단에…….”
감히 제 주인을 모욕하다니. 마리는 조용히 분기에 찬 눈으로 발란을 흘겨보았다.
다행히도 발란은 그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건 그가 눈치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로잘린의 하녀인 마리가 눈앞에 있기에 참는다는 드마셸의 얼굴을 발견해서였다. 발란이 불쾌한 듯 이를 악물면서도 그리하겠노라 대답했다.
“따라와.”
발란이 낮게 명령하자, 마리가 드마셸에게 인사를 올린 후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나섰다. 마리 역시 드마셸과 발란을 좋아하지 않는 만큼, 알아 가야 할 것만 빨리 알아내서 저택을 떠나고 싶은 참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드마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가늠한 발란이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런 걸 요구하셨지?”
“저는 일개 하녀라 그것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마리의 빠른 대답에 발란이 얼굴을 구겼다.
“왕비까지 되어서도 그 손에 상단을 쥐고 주물럭거리고 싶은 모양이지?”
“…….”
“평민, 사생아 주제에 왕비 자리까지 올랐으면 거기에나 감지덕지할 일이지…….”
그러는 저도 정실의 태에서 났다는 것만 빼면 평민인 주제에. 마리는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애써 참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일러 줄 테니 여기서 기다려. 네 주인을 믿고 건방지게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다간 그 모가지를 날려 버릴 테니까.”
마리는 겉으로는 온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발란은 제 집무실로 씩씩거리며 돌아가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당장 로잘린에게 돌아가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는 마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천하의 머저리 같은 새끼. 마리는 발란을 향해 속으로 쌍욕을 내던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제 집무실에서 빠져나온 발란이 마리에게 종이 서너 장을 내밀었다. 그 짧은 사이에 또 뭘 처마신 건지, 내쉬는 숨에 이전보다 진해진 알코올 냄새가 섞여 있었다.
마리가 건넨 종잇장을 받아 든 로잘린의 시선이 무심하게 기록을 훑었다. 최근 그만둔 사람이라 봐야 고작 서넛.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특별한 사유로 그만둔 자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이 중에 비소를 밖으로 빼돌린 자가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것이 누군가의 명이었든, 아니었든 상관없이.
비소를 보가트 상단에서 빼돌렸으리라 짐작하게 된 것은 그날 로비엔을 압박했다던 세 사람에 대한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였다. 그를 찾아온 세 사람은 공작가와 후작가, 백작가고, 그중 하나는 선왕비의 친가이며 하나는 선왕비와 사돈 관계에 있었다.
세력의 크기는 차치하더라도, 어쨌거나 왕의 사돈이며 공작가인 보가트 가문을 함부로 몰아세우다가 역풍을 맞으면 가장 크게 피해를 보게 될 가문들이었다. 그런데도 보가트 상단에서 선왕을 독살하였을 거라고 주장하며 의심과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는 것은, 그들에게 뒤집어씌울 명분이 확실하다는 의미였다.
로잘린의 날카로운 시선이 세 명의 사내에 대한 기록을 번갈아 보다가 문득 가운데에서 멈추어 섰다. 그에게 압박을 넣던 그 자리에는 분명 카를로스 백작, 리만 후작, 그리고 피베체 공작이 있었다고 했다.
“카를로스 백작가의 마부…….”
아마 말을 잘 다루니 배달을 잘할 수 있다는 의미로 강조한 이력일 것이다. 하지만 카를로스 백작가에서 안정적으로 먹고살던 자가 굳이 보가트 상단으로 기어들어 와 배달 일을 자청할 까닭은 무엇인가?
퍼즐을 맞추며 정신없이 돌아가던 머릿속에서 직감처럼 결론이 섰다. 비소를 빼돌린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게리 바트만, 카를로스 백작가의 마부였던 자.
카를로스 백작, 리만 후작, 그리고 피베체 공작은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최소 동조한 자들이며, 게리 바트만으로부터 정보를 취했다.
“라나. 당장 폐하께 가야겠어요.”
멍청한 발란이 손대는 장부에만 집착할 게 아니었다. 로잘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마리가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폐하, 급하시더라도 폐하께 일단 말씀을 드리고 기다리셨다가…….”
“지금 당장.”
라나는 잠시 로잘린을 말려 보려고도 했으나, 이런 때의 로잘린은 그런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이 아니었다.
라나가 눈짓하자, 마리가 머뭇거리며 문을 열었다. 로잘린이 반쯤 뛰는 듯 걸어 나왔다. 호위 기사들 몇이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나섰다.
겨울의 초입, 서늘해진 바람이 가슴까지 스민 듯 불안해졌다.
거의 뛰다시피 도착한 소네트 궁 앞에서 간신히 숨을 정리한 로잘린이 다짜고짜 왕의 집무실로 향했다. 당황한 아랫것들의 곤란함은 안중에도 없었다.
“폐하께선 안에 계신가?”
“그렇습니다.”
“객은?”
“들지 않았으나 곧…….”
“폐하께 잠시 뵈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드려 주게.”
갑작스러운 명령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밀리언은 담담한 표정으로 로잘린을 맞이한 뒤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그는 묵직한 문을 열어 로잘린이 안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통창을 등지고 의자에 앉아 있던 로비엔이 로잘린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잘린, 무슨 일로…….”
“추적해 주셔야 할 사람이 있어요.”
앞뒤 자른 부탁에 로비엔이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카를로스 백작가의 마부였던 자가 갑자기 보가트 상단에서 일했어요. 배달 일을 했으니 창고에 접근하기는 쉬웠을 테고, 몰래 물건을 빼돌리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게 분명해요.”
로비엔은 자신의 소매를 부여잡은 채 정신없이 말을 이어 가는 로잘린의 허리를 한 손으로 붙잡은 채 경청했다. 이미 지난 저녁 식사 시간에 로잘린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음을 어느 정도는 짐작하게 된 바였다.
“그자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게리, 게리 바트만요.”
로비엔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밀리언에게 턱짓하자, 그가 짧게 묵례한 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왕의 명령을 전달해야 하는 탓이었다.
“바로 사람을 풀어 찾아볼 테니 일단 진정해요.”
로잘린답지 않게 흥분한 모습이 낯설었다. 로비엔이 두 팔을 붙잡은 채 진정하라는 듯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에요, 폐하.”
“알아요, 로잘린.”
로비엔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보가트 공작가에 죄를 지우고, 로비엔에게까지 책임을 묻고자 나설지도 모르는데. 진실로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알고 있다고는 믿기 어려운 태도라서, 로잘린은 순간 그가 이 상황을 이해한 게 맞는지 의심해야만 했다.
“나까지 연관될 수 있다는 것도.”
“폐하!”
“이미 그런 소문이 돌고 있기도 하고.”
애써 입 밖으로 내뱉지 않던 말을 툭 털어놓는 사내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로잘린이 손을 들어 그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하면 내뱉은 말이 주워 담아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서운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런 일은 없어요. 없어야만 하고. 절대로.”
자신을 걱정하는 로잘린이 사랑스럽기라도 한 듯, 로비엔이 부드럽게 웃는 낯을 했다.
“현명한 비를 두어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폐하.”
로잘린이 난생처음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왕을 막막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무작정 긍정적일 때가 아니었다.
“지금 상황이 단순히 보가트 공작가를 몰아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로비엔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불안함에 사로잡힌 로잘린을 멈추어 세웠다.
“……정말로 폐하를 노리고 있단 말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죠.”
차마 묻지 못한 질문들이 가슴에 알알이 맺혔다. 이렇듯 덤덤히 말하는 사내의 마음이 어떠한지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잠시간 그대를 힘들게 할 수도 있어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로잘린은 괜찮다는 의미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앞으로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만 그녀가 알 수 있다면 족했다. 그리하면 견뎌 낼 수 있을 것이므로.
“레이첼 후작 부인이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고 알릴 겁니다.”
“피베체 공작이 반응하는지 보시려는 건가요?”
로비엔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몸을 돌린 그가 테이블 위에 흐트러진 종이 한 장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죽었다고 알리면 가져올 소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니까.”
“위험부담이 크지 않을까요?”
“어차피 어떻게든 레이첼 후작 부인을 죽였을 겁니다.”
로잘린은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레이첼 후작 부인에게 제공한 식사와 물, 그 식사를 먼저 섭취하고 죽은 쥐.
내용이 전하는 바는 명확했다. 누군가 계속해서 레이첼 후작 부인을 죽이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것이 원한인지, 그녀가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어도.
“어쩌면 그 후에 들고 올 소식이 그대가 말했던 게리 바트만일 수도 있죠.”
“……보가트 상단과 레이첼 후작 부인을 엮은 증거.”
“그녀가 죽는다면 그 연관성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조차 없어지는 것이고.”
로비엔은 재빠르게 추론을 마치고 눈을 번뜩이는 제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일전엔 어떤 여자든 그저 혼인만 하면 그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일 테니 누구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 보면 몹시 우스운 생각이었다고 생각하면서.
“그 후에 움직이는 모습으로 어느 가문이 연관되어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
“알기 싫어도 알게 되겠죠.”
흐리게 웃는 사내의 얼굴을 보며 로잘린은 짐작했다.
그의 마음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 끔찍한 배신을 예감하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