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클로티 부인을 겁박해 쫓아낸 후, 로비엔의 시종으로부터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는 얘기를 전달받았다.
로잘린은 주방에 그의 몫까지 저녁 식사를 준비할 것을 명령하고, 라나의 도움을 받아 치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새삼스레 그에게 잘 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최근에는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베르타 궁과 소네트 궁은 건물끼리 연결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의도를 가지고 방문하지 않으면 마주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최근 그는 왕세자인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바빴다. 선왕의 그림자와 귀족 세력의 견제가 그만큼 그의 삶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왕비님, 국왕 폐하께서 드셨습니다.”
“어서 모시렴.”
이제나저제나 그가 오기를 기다리던 로잘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막 문턱을 넘어 들어오던 로비엔이 그 다급한 동작을 보고 짧게 웃었다.
“나만 마음이 급한 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던 로잘린도 제 행동이 머쓱한 듯 웃고 말았다.
“앉으세요. 아직 저녁 식사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서…….”
로잘린의 권유에 로비엔이 느긋하게 자리에 앉았다. 곧 노을이 지려는지, 주홍빛으로 늘어지는 햇빛에 아름다운 그의 금발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조금.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요.”
조금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와 그 아래의 그늘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로잘린이 결국 왕비의 채신머리고 뭐고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로비엔이 의아한 눈동자로 자리에 선 로잘린을 올려다보았다.
사박거리는 드레스 소리와 함께 다가온 로잘린이 그의 손을 붙잡아 마찬가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는 반항이나 질문 하나 없이 로잘린이 무엇을 하려는지 지켜보기만 했다.
“저는 폐하께서 안 계셔서 잠을 제대로 못 잤거든요.”
응접실을 지나 침실로 들어선 로잘린이 그를 침대로 들이밀었다. 얼결에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로비엔이 멀거니 로잘린을 올려다보았다.
뻔뻔해 보이려고 연기하지만 어색한 상황에 볼에 홍조를 드리운, 사랑스러운 여자.
“저는 좀 자고 싶어요. 그러니 폐하께서도…….”
채 말을 끝맺지도 못했다.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당겨 침대로 돌려 눕힌 사내가 위에서 빙긋 웃고 있었다.
“맨입으로, 끌어안고 자는 베개 취급을 하십니까?”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깜빡거리던 로잘린이 결국 작게 웃으며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이 간지러웠다.
“이거면 될까요?”
“아니.”
짧은 대답과 동시에 무례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잠시 놀라서 바르작거리던 몸이 반항을 멈추고, 이내 조용히 그의 어깨를 쥐었다.
민망할 정도로 깊게 이어지던 입맞춤이 끝난 건, 그의 입술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타액으로 번들거릴 때였다.
로잘린이 민망한 얼굴로 손을 내밀어 그의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민망한 줄도 모르는 사람처럼 웃는 낯인 로비엔 때문에 그녀는 두 배로 부끄러워졌다. 로잘린은 팔로 그를 세게 끌어안아 그의 얼굴을 시야에서 치웠다.
그러나 로비엔은 푸스스 웃으며 로잘린의 팔을 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푹신하고 커다란 베개에 등을 기대고 앉아 팔을 벌리자, 로잘린이 가슴팍에 몸을 기대어 왔다.
“무슨 일이 또 있었나요?”
로잘린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로비엔이 말문을 열었다.
“보가트 공작가를 폄훼하는 세력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레이첼 후작 부인과 공모하여 선왕을 해쳤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도, 왕이 일각에 무시하고 왕비를 싸고돌고 있다는 소문은 로잘린도 이미 알고 있었다.
심지어 교황이 있는 자리에서 그 머리에 왕비의 관을 씌워 주어 그 역할을 공식적으로 부여하기까지 했으니, 부아가 치밀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드마셸에게 재차 장부를 확인할 것을 부탁하고, 문제가 없다는 확답을 들었다.
그렇지만 로잘린과 로비엔 사이에 신뢰가 존재치 않았다면, 드마셸은 분명히 다른 용의자가 되어 궁에 끌려왔을 것이다. 로비엔은 로잘린이 내어놓은 대답을 신뢰하여, 보가트 공작가를 강력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이제 생각은 제가 할 테니 폐하께선 좀 쉬세요.”
“로잘린.”
“피곤하시잖아요.”
로잘린이 한 손으로 그의 눈을 덮어 가렸다. 그는 잠시간의 무의미한 반항을 끝내고 로잘린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 사르륵, 긴 속눈썹이 손바닥을 스치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어느 순간 그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길게 변해 갔다. 피곤하지 않은 척, 견딜 만한 척하더니 역시 피로했던 것이다.
로잘린은 가만히 그의 눈을 가렸던 손을 떼어 냈다.
“…….”
단순히 보가트 공작가를 공격하는 세력의 수가 늘어나는 게 고민은 아니겠지.
그의 고민은 어쩌면 드마셸이 거짓말을 한 상황, 그러니까 보가트 가문이 정말로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한 우려일 것이다. 드마셸이 헛된 욕심을 부렸다면, 보가트 가문의 일원인 로잘린이 피해 갈 수 없는 일이니까.
사실 제 아비의 깊은 속까지는 그녀도 알지 못했다. 전부 믿어선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로잘린의 녹빛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기억은 얼마 전, 수상했던 장부와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하던 드마셸과의 대화로 흐르고 있었다.
진실로 장부에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장부는 진짜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시선을 묶어 둔 무엇이 아닐까?
로잘린은 기척이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침실과 연결된 응접실에는 왕 내외의 잠자리를 방해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라나와 마리가 있었다.
“마리, 지금 당장 보가트 저택으로 가.”
“예?”
“최근 배달부 중에서 그만둔 사람과 이유를 알아 오렴.”
마리는 영문 모를 명령에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성실히 고개를 끄덕이고 후다닥 자리를 떴다.
실제로 특정 목적으로 비소가 외부로 유출되었는지, 혹은 보가트 가문이 실제로 관련이 되었는지는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지금 그녀마저 그의 고민거리가 될 수는 없었다.
선왕비는 느긋한 얼굴로 식사를 하고 다과를 즐겼다.
그녀의 곁을 지키는 시녀들은 로잘린이 선물한 것들을 보면서도 왕비가 얼마나 사치스러운지, 왕비임에도 고작 라나 메르센데티 하나를 시녀로 두고, 하녀와 함께 나돌아다니는 것이 얼마나 지체 없어 보이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 댔다.
왕비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 모든 수다를 들어 주었다. 그 모든 것은 로잘린이 왕자비에서 왕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궁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왕관과 관련된 모든 것은 명목 싸움이며, 동시에 세력 싸움이다. 제아무리 잘났다 해도 지지해 주는 마땅한 세력이 없다면 꺾이고 말 무엇에 불과하다.
물론 약물 중독으로 자연스럽게 죽이는 데에 실패한 다미안 래비어트가 떠들고 다니는 이야기들이 카페에서 살롱으로, 그리고 음식점으로 퍼져 나가기는 했다. 왕실과 선왕비에 대한 악감정이 번지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래 봤자 한갓 백성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귀족들은 그 소문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클로티 부인이 무죄로 풀려나면서 더욱 그렇게 되었다. 고작 약쟁이 평민 졸부가 떠들어 대는 소문 하나를 믿고 제 어미와 반목하다니. 왕이 계집에 눈이 먼 게 틀림없다고 믿기 시작했다.
귀족과 평민들을 갈라 싸움을 붙이면, 잠시 잠깐의 난관은 있을지 몰라도 결국 이기는 것은 명확하다. 재산, 무력, 권력. 그것은 긴 시간 이어져 온, 유구한 사회의 가치였다.
“한데 보가트 가문에 대한 소문이 진짜일까요?”
“선왕 폐하를 시해하는 데에 관여했다는 소문 말이지요?”
선왕비는 마음에 드는 화젯거리가 귀를 스치는 순간 입을 열었다.
“무서운 소리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는구나.”
“폐하.”
어색한 미소, 굳어 버린 분위기. 모두가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보가트 가문에서 선왕을 시해했다면 그것은 현재의 폐하와도 관련이 된 일이야. 어찌 그리 무서운 소문들을 입에 담아?”
선왕비의 질책에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 폐하.”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혹시라도 선왕비가 이전처럼 화라도 낼까, 다들 절절매며 다급히 용서를 빌어 왔다. 선왕비는 심드렁한 얼굴로 재차 의자의 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기댔다.
“내가 용서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지. 그저 그대들을 위해 한 말이야.”
“…….”
“아무리 의심스럽다 해도 새로운 왕과 왕비가 이 궁의 주인이거늘, 다들 입조심해야지.”
그저 왕실의 어른으로서 하는 말인 양 선왕비가 덧붙였다. 그러나 그 말끝에 기묘한 의심이 남았다.
아무리 의심스럽다 해도, 입조심할 것.
그렇다면 선왕비 역시 그들을 의심하고 있다는 말인가?
자리를 지키고 있던 모든 이들 사이에서 의미심장한 시선이 오고 갔다.
사실 선왕의 급작스러운 사망의 수혜자는 보가트 가문뿐만이 아니지 않은가.
“폐하, 가을 햇빛이 따갑습니다. 이만 안으로 드시지요.”
그들 사이의 기묘한 침묵 속 추리를 깬 것은 클로티 부인이었다. 선왕비의 시녀장으로 복귀한 그녀는 이전과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선왕비를 수행하고 있었다.
“역시 그대만 한 이가 없구나.”
선왕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클로티 부인을 추켜세웠다.
얼마 전까지 옥고를 치른 탓인지 클로티 부인은 다소 지친 낯빛이었지만 늘 그랬듯 우아한 태도로 모든 일을 해치우고 있었다.
그녀는 선왕비에게 도착하는 서신 중 필요한 것들을 추리는 일과 알현을 요청하는 자들의 명단을 꾸리는 일을 도맡아서 하고 있기에 아는 바가 많을 것이다. 여러 시선이 클로티 부인을 짧게 훑고 떨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해 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탓이었다.
클로티 부인은 모든 시선을 모른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선왕비의 뒤에 따라붙었다.
“다들 저렇게 순진해서야 원. 날짐승 같은 왕비에게 금세 잡아먹히고 말 거야. 그렇지 않아?”
하녀가 드리운 양산 밑에서 여유롭게 걸으며 선왕비가 물었다. 클로티 부인은 대답 없이 미소만 보였다.
“아무렴 폐하께서 알아서 판단하시겠지. 비의 집안이 역모와 같은 죄로 의심받는 걸 묻어 버린다면 본인도 의심받을 것이 자명한데, 그냥 넘어가지는 않으실 테니.”
의미심장했다. 클로티 부인은 풀밭으로 시선을 내리깐 채, 선왕비가 주절거리는 이야기를 반쯤은 흘리고, 반쯤은 귀담아들었다.
“그런데도 그냥 넘어가려 하신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겠지만.”
“……무슨.”
“폐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거나, 사랑에 눈이 멀어 모른 척하는 것이거나.”
심장이 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클로티 부인은 쿵쾅거리는 가슴께를 붙잡은 채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그녀를 돌아보며 선왕비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었지만, 동시에 비밀이라는 듯 검지를 들어 제 입을 가렸다.
“물론 내 아들이 그렇게 한심할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그녀의 칼끝이 향해 있는 방향은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