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왕궁 안의 모든 건물은 기본적으로 큼직하고 화려했다. 후줄근하게 보였던 소머 궁도 그 내부는 쓸 만했다. 왕실의 건축가가 지은 건물이니 정돈만 잘 된다면 심미적으로 아름답고, 튼튼하기까지 했다.
다만 왕이 무정한 태도로 선왕비를 내치면서 선왕비는 자신을 따르던 사용인들을 대폭 정리해야 했다.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줄었고, 궁의 크기도 작아져 그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폐하께서 이러실 수가 있어요.”
선왕비의 시녀들은 손수건에 눈물을 찍고 새로운 왕을 원망했다.
“그런 얘기 하지 마. 폐하께도 최선이었을 거야.”
선왕비는 그저 힘없고 초탈한 여인처럼 작게 미소 짓고, 이제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는 듯 창밖으로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가엾기만 한 선왕비 폐하. 왕이 되기까지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길러 주었는데, 천한 계집 하나에게 눈이 팔린 왕세자가 약쟁이 새끼의 말만 믿고 어미를 이렇게 외면할 줄 누가 알았을까.
“이 궁 안에 남게 해 주신 것만 해도 얼마나 하해와 같은 은덕인가 말이야.”
선왕비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클로티 부인이 보고 싶구나.”
“폐하.”
“아무 죄도 없는 그이를, 왕비가 안타까워 내 팔을 자르는 심정으로 내주었는데……. 이제 내 곁에 남은 사람이 없구나.”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토로하던 선왕비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선왕비의 시녀들은 얼마 전까지도 왕비의 패악질에 발발 떨었던 것도 잊은 듯 눈물지었다. 오히려 이전처럼 화를 내거나 패악질도 부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양, 저들이 더 배신감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제가 클로티 부인을 구명해 달라 요청하겠습니다.”
결연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사건이 있던 날 선왕비, 그리고 클로티 부인과 함께 있었던 시녀들이 자신들이 증언하겠다고 나섰다.
“아서. 그러다 그대들도 괜히 휘말리면…….”
선왕비가 지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들마저 없다면 정말로 버겁고 힘들다는 듯이.
그 모습을 안타까이 지켜보던 시녀들은 의지를 다졌다.
“사실 클로티 부인도 아무 죄 없이 갇힌 사람이 아닙니까.”
“왕비의 폭거입니다. 이리 둘 수는 없어요.”
“아무리 폐하라 하시어도 저희가 공통으로 증언하고 나서면 모르쇠로 일관하실 수는 없을 겁니다.”
천하의 악녀, 로잘린 보가트 르 칼라브리아.
평민에서 왕세자비, 그리고 끝내 왕비까지 되었으면 만족하고 조용히나 살 일이지 기어코 궁 안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마녀 같은 것.
그 콧대를 반드시 꺾고 말리라.
귀부인과 시녀들의 눈동자에 파르랗게 서리는 경멸과 분노를 지켜보며, 왕비는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왕비가 되기는 되었나?
불유쾌한 손길로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자, 불균형의 소리가 적막을 깼다.
‘유일한 후사였으니 왕비께서 아주 슬프셨겠지요. 저도 어미로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클로티 부인이 그리 기함할 일을 하였던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한데 나중에 생각하고 보니 그날, 클로티 부인이 제 옆에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착각일까요?’
‘선왕비께서 매일 눈물을 흘리며 클로티 부인을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부디 은혜를 베푸심이 어떨까 합니다. 클로티 부인이 비록 죄를 지었다 하기는 하나, 어머니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본다면야…….’
바로 직전, 로잘린은 선왕비의 처소를 새로이 꾸미는 것을 의논하기 위해 그녀의 시녀들과 티타임을 가졌다. 선왕비의 기분 전환을 위해 돈을 쓰겠다 제안한 것인데, 그들의 작태가 볼 만했다.
받을 것은 모두 받아 챙겼다. 그러나 다 받아 챙긴 이후에는 태도가 돌변했다. 부드럽고 나긋하게 이야기하는 목소리, 하지만 그 말속에 칼을 숨기는 것은 제 주인을 똑같이 닮아 있었다.
돌려 말했지만, 속뜻은 분명했다. 왕의 아이를 잃은 것은 안타까우나, 사고였음을 우리 모두 목격했다. 화풀이하겠다고 죄 없는 자에게 겨눈 칼날은 거두어라.
동시에 제게 비치던 흐릿한 적대감과 경멸 역시 잔상처럼 남았다.
“하…….”
로잘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언짢음보다 그들의 무례함에 황당함이 앞섰다. 허락지도 않은 화젯거리로 저들끼리 대화를 이끌어 나가고, 자신들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경고를 하며, 원하는 대로 해 달라는 막무가내의 요구.
평민 출신. 심지어 제대로 된 시녀 하나 두지 못하는 반편이 같은 왕비니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끌면 끄는 대로 끌려오리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마리, 라비앵 클로티를 데려와.”
사건의 순서가 이리 전개된 이상, 로잘린이 선왕비나 귀부인들의 기선제압에 당한 꼴로 보일 것은 자명했다. 저들이 이겼다고 으스댈 것을 생각하자, 이를 악문 턱에 힘이 조금 실렸다.
그러나 로잘린은 이내 자신을 가다듬었다. 그런 모습으로 보일 게 불쾌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꼴로 보여 선왕비가 방심한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오랜만이네요, 클로티 부인.”
로잘린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해진 얼굴로 들어오는 클로티 부인을 맞이했다.
갇히기 전에 비하면 꾀죄죄한 몰골이긴 했지만, 막 감옥에 처박혔을 때와 비교하면 사람다웠다. 사실 로잘린과의 협상을 마친 이후 그녀는 이미 새로운 주인을 맞이한 베르타 궁에 비밀스럽게 머무르고 있었다. 푸석한 얼굴에 맘고생이 드러나긴 했지만, 새 드레스에 나름 가문의 보물까지 목에 매달고 있기까지 했다.
“라비앵 클로티가 칼라브리아의 왕비님을 뵙습니다.”
클로티 부인이 예를 다해 인사했다.
로잘린은 싱긋 웃는 얼굴로 제 앞의 좌석을 손짓했다. 클로티 부인이 소리 없이 자리에 앉아 로잘린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선왕비 폐하와는 좋은 대화 시간을 가졌나요?”
“폐하의 은혜 덕분입니다.”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고, 하얗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얘기를 했나요?”
“…….”
“그대를 구명해 주겠다 하시던가?”
하긴, 목덜미를 물어뜯으려고 환장한 짐승이 코앞에 있기는 하지. 로잘린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말해 봐요.”
무슨 대답이 나올지 흥미진진하다는 듯, 로잘린이 부드럽게 채근했다.
동시에 클로티 부인은 자신을 달래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선왕비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라고 그대에게 그렇게 모질게 굴고 싶었던 것이 아니야.’
평소에 변덕스럽고, 쉽게 화내던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모습이었다.
‘선왕께서 조용히 묻고 싶어 하셨어. 어쨌거나 아이가 죽은 이상 화풀이라도 하게끔 두어야 한다고 하셨고. 하지만 그대도 알지 않나. 우리가 그리 오랜 세월을 엮고 함께해 온 것이 단시간에 뚝 끊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선왕비가 조금은 간절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단시간에 뚝 끊어지지 않는 사이. 우리 사이가 그랬던가?
클로티 부인은 여전한 의문을 가지고 고개를 숙인 채 선왕비의 얘기를 묵묵히 들었다. 그녀의 충성심은 자진하라던 편지를 받은 이후, 감옥 한쪽 구석 어딘가에 버려져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로비엔도 다 알았고, 선왕께서도 이미 돌아가셨지.’
‘…….’
‘그대의 분과 억울함을 알아. 이리한다고 마음이 다 풀리지는 않겠지만, 이제라도……. 로비엔과 갈라서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를 구명할 거야.’
그쯤 되어 선왕비는 조금 훌쩍이고 있었다.
앨런 3세의 급작스러운 사망 이후, 선왕비가 눈에 띄게 기세가 꺾이고 연약해졌다는 얘기는 들었다. 로잘린이 왕이 될 로비엔의 총애를 등에 업고 있으니,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선왕비의 권세는 바람 앞의 등불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 탓일 거라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연극이다. 비밀을 들키고 싶지 않을 테니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만큼 클로티 부인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았다.
‘내가 그대를 감옥에서 꺼내어 줄게. 시녀장 자리도 다시 그대의 것이 될 거야.’
‘폐하.’
‘그러니 그녀가 그대에게 거래를 청하더라도, 응할 필요 없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대는 살아서, 그대로의 권세를 누릴 수 있으니.’
로잘린이 제게 거래를 청한 것을 알고 하는 얘기일까? 클로티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잘게 떨리는 양손을 잡아 가두며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뭐가 되었든 양쪽에서 거래를 청해 온 이상, 어느 쪽을 택해도 그녀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장사치들이라면 깔보았던 것이 엊그제 같지만, 살아남는 데 장사인지 정치인지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지금 당장은 뭐가 되었든 살 수 있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양쪽의 조건을 재며 몸값을 불려야 한다.
“감옥에서 꺼내 주고, 시녀장 자리에 복귀시켜 준다고 하셨습니다.”
클로티 부인의 대답에, 로잘린이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그러니 왕비님과 거래할 필요 없다, 하시었고요.”
“호오.”
의미를 알 수 없는 감탄사에 클로티 부인이 내내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로잘린은 크게 변화가 없는 얼굴로 클로티 부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등 뒤로 다사롭게 들이치는 햇빛과는 달리 서늘하게 깔린 분위기에 발이 저렸다.
클로티 부인은 긴장감 같은 것이려니, 생각했다.
“이리 부르신 것은 선왕비 폐하께서 저를 풀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마련해 주신 것이겠지요.”
“…….”
“거래는, 각서는 없는 일로 하겠습니다.”
각서에 가문의 서명을 했든 아니든, 풀어 주는 것이 로잘린이 아닌 선왕비라면 굳이 로잘린과 다른 거래를 해서 위험도를 높일 필요는 없다. 클로티 부인은 그리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방만한 그녀의 생각을 비웃듯 로잘린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대로 된 거래를 해 본 적이 없어서인지, 참 안일하다고 해야 할까.”
“그게 무슨…….”
“첫 번째 조항에서 떠오르는 게 없나요?”
로잘린 보가트 르 칼라브리아는 라비앵 클로티와 그 가문을 구명해 주는 대가로 라비앵 클로티와 계약을 맺는다.
여전히 문제라 생각되지 않는 조항을 떠올리는 클로티 부인의 눈동자에 혼란스러움이 어렸다.
“구체적인 방식이 없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
“어떻게 그대를 그 감옥에서 빼내어 주든, 나는 그대를 빼내고 그 가문의 면을 살려 주면 거래 조건을 이행한 것이 된답니다. 설령 선왕비가 판을 깔아 주고, 그녀의 시녀들이 나를 압박한 것이 이유일지라도.”
협위하는 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아한 얼굴로, 로잘린이 미소 지었다.
“어차피 감옥에서 풀어 주고 난 이후에 선왕비께 그대를 돌려보낼 생각이었어요. 그대가 한 일, 그대가 아는 것, 그리고 그대가 알게 될 것. 모두 내게 권한이 있으니까.”
클로티 부인이 한 일은 이미 안다. 클로티 부인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클로티 부인이 언젠가 다른 비밀을 알게 될 것도 안다. 로잘린은 과녁의 정중앙에 날카롭게 꽂히는 자신의 직감을 확신했다.
“그러니, 부인.”
그러니 다 잡은 사냥감을 놓아줄 리가 없지 않은가.
“부디 시키는 대로나 하시지요.”
클로티 부인은 그제야 제가 완벽한 그물에 걸려들었음을 알았다. 처음 각서를 운운하며 서명하게 했을 때부터, 이 영악한 왕비는 어떻게든 자신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클로티 부인의 입술을 바라보며, 로잘린은 작게 웃었다.
“그리 억울해하지는 말아요. 그대도 내 약점을 하나 쥐고 있는 것이니까.”
“…….”
“오늘부로 그대는 자유예요, 클로티 부인. 선왕비께서 그리 애틋하게 그대를 찾는다고 하니, 선왕비 폐하의 시녀장으로 복귀해요.”
언제 웃었냐는 듯, 로잘린의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내게 그 잘난 비밀을 가져와.”
로잘린이 아랫것을 대하는 마땅한 태도로 오연하게 명령했다.
클로티 부인은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완벽한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