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83)화 (83/151)

# 83.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마침내 대관식의 아침이 밝았다.

전날 도착한다던 교황은 당일 새벽녘에야 도착하여 아침 일찍부터 칼라브리아의 왕궁에 불을 밝혔다. 궁 안의 모든 이들은 대관식 준비를 위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로잘린과 그녀를 보좌하는 라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폐하. 이 부분을 더 고정해 드릴까요?”

라나가 드레스의 허리 부분을 짚은 채 물어 왔다.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 탓인지 입 밖으로 말이 잘 나오지를 않았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은 알지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라나의 얼굴에 안쓰러운 기색이 어렸다. 짧게나마 모셔 본 로잘린은 보통 담대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갑작스럽게 끌어안게 된 왕비의 관은 지나치게 무거운 모양이었다.

“심호흡이라도 조금 해 보세요. 하녀에게 진정을 위한 차를 들이라고 말할까요?”

마침내 즉위식을 위해 준비한 드레스를 모두 갖추어 입은 로잘린이 깊게 심호흡했다.

“차는 됐으니 잠시 혼자 있게 해 줘요.”

라나의 조언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로잘린은 소파에 허리를 세워 앉은 채 긴장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잡다한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라나가 밖으로 나서며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로잘린은 이상할 정도로 긴장한 자신을 조소했다. 어차피 돈을 주고 산, 녹슬고 알이 빠진 왕관이나 다름없는데 무얼 그리 긴장하느냐고 비웃고 싶었다.

“…….”

문득 테이블 위에 놓인 양초가 시선 끝에 잡혔다. 처음 펠리에 궁으로 이동했을 때, 심지에 불을 붙인 양초가 어둑한 방 안에서 창문으로 가는 길을 밝혀 주었던 순간이 기억났다. 그 빛을 따라서 간 끝에 로비엔이 있었다.

로잘린은 공작가의 영애가 될 몸이고, 그의 비가 될 몸이니 감히 망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하던 목소리가 유독 머릿속에 남았다.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듯한 꼿꼿한 자세도 그랬다.

만일 그가 왕이었다면, 자신이 감히 혼인 동맹 따위를 청하여 그 자리에 있지 못했으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는 왕이 아니었고, 선왕은 돈이 필요했으며, 보가트 가문은 돈이 있었다. 그렇게 궁에 들어와서 그의 비가 되었으며, 아이를 가졌다가 사산하기도 했다. 언젠가 그가 왕이 된다면 자신이 그때도 곁에 있을 수 있을까를 의심하기도 했다.

의심이 우습게도 왕이 될 그의 곁에 여전히 서 있다. 여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왕관을 기다리며.

“폐하, 이제 그만 궁을 나서셔야 합니다.”

그는 담담하지만 분명하게 그 마음의 진실성을 내보이고 있었다. 단순히 정부와 안위를 운운하던 결혼 전 거래 조건 따위를 준수하는 게 아니라.

귀족 세력이 보가트 공작가가 선왕의 시해와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교황 앞에서 공식적인 왕비로 인정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더라도, 로비엔은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

확고한 전제를 다시 한번 확인한 로잘린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분명히 이 사랑은 더 이상 거래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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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은 표면적으로는 어떠한 조건도 없이 로비엔에게 왕관을 수여하겠노라고 전해 왔다. 교황은 왕인 앨런 3세가 급사하여 그의 자리가 공석이라는 점, 왕의 적장자이며 왕세자인 그의 자리가 굳건하다는 점, 그리고 이미 왕으로 대우받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꼽았다.

그러나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거기에 다른 이유가 더 있다는 것쯤은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이탈하는 신도들을 막기 위해 신의 대리자라는 명목의 강조가 필요한 시기. 정통성과 정당성으로는 빠지지 않는 로비엔에게 왕관을 씌워 주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교황에게도 큰 의미가 될 것이기에.

“전하, 아니 폐하께선?”

“곧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라나가 소곤거리며 귓가에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비엔이 대관식을 위해 준비된 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에서는 로잘린과 달린 한 점의 긴장도 비치지 않았다.

그에게는 시기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맞이해야 했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여전히 평민의 자아를 가진 로잘린에게는 간이 졸아붙을 것처럼 버겁기 짝이 없는 일 앞에서도 저토록 담대할 수 있으리라.

가까이 다가온 로비엔이 로잘린의 손을 한번 가볍게 쥐었다 놓아주었다. 긴장하지 말라는 듯 다독이는 손길을 느끼고서야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

로잘린의 시선이 로비엔의 등 뒤, 아까부터 자신을 노려보고 있던 선왕비에게로 향했다.

모두의 걱정과 달리 선왕비는 로비엔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아무리 그녀가 제 아들의 영역 밖으로 밀려났다고 해도 그녀는 왕의 모후였다. 대관식과 같이 중요한 자리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이 상했다고 티를 내는 문제와는 달랐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왕의 자비에 조금도 기대지 못하게 될 수 있었으니까.

궁 안에서 왕의 자비는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교황께서 드십니다.”

다만 그녀의 표현은 평소와 다른, 수수하기 짝이 없는 옷이었다. 표정 역시 그리 밝지 않았다. 그의 대관식이 그리 반갑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처럼. 눈칫밥으로 먹고 사는 이 공간 안의 대다수는 그 표현을 읽었으리라.

“날이 좋군요.”

교황이 로잘린과 로비엔을 지나치며 사람 좋게 웃었다.

퉁퉁한 몸 때문인지 몇 개의 계단을 힘겹게 오른 교황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가장 먼저 칼라브리아의 축복을 기원했다.

칼라브리아의 새로운 시작, 훌륭한 앨런 3세의 뒤를 이을 로비엔 1세, 신의 계시, 새로운 왕의 치하에서 눈부시게 발전할 왕국의 미래.

띄엄띄엄 기억나는 연설 대다수는 신이 내린 새로운 왕이 이루어 나갈 왕국에 대한 찬사였다.

“신을 대리하여 새로운 왕에게 마땅한 왕관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사제들이 그들을 길로 안내했다. 로잘린과 로비엔은 교황이 서 있는 자리까지 이어진 붉은 카펫을 밟고 수많은 증인을 지나 걸었다. 마침내 교황 앞에서 둘의 걸음이 멈추어 서자, 시종이 대관 보구를 들고 왔다.

“다만 그 전에, 신의 앞에서 세 가지의 의무에 대하여 약속을 받고자 합니다.”

로잘린과 로비엔은 푹신한 쿠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로비엔은 제 앞으로 드리워진 성서의 글귀를 읽었다. 그가 왕으로서 지켜야 하는 맹세였다.

“백성의 평화를 위해 일하겠습니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가장 먼저 백성의 평화를.

“사회에 부당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의 안정을.

“모든 재판이 공정과 자비로 이루어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재판의 공정함을 맹세했다.

그 맹세의 끝에 왕관을 든 교황이 두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곧 그가 로비엔의 머리 위로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번쩍이는 왕관을 얹어 주었다. 눈이 부실 만큼 찬란한 빛이었다.

“칼라브리아의 새로운 왕, 로비엔 1세가 탄생하였음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는 선언과 동시에 로비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잘린의 머리에도 왕비의 관을 씌워 주기 위해서였다.

로잘린은 목구멍 너머로 침을 삼키며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머리 위로 조심스럽게 닿는 것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 묵직함에 놀라서 숨을 들이켜려던 로잘린은 제 침실에서 스스로 했던 맹세를 곱씹었다.

분명 그들의 사랑은 더는 거래와 관련된 무엇은 아니었다.

하지만 배운 것이 그뿐이라서일까. 로잘린은 그가 자신을 선택하여 치렀던 고통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고 싶었다. 자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가 경험하지 않았을 일들에 보답하고 싶었다.

자신의 위선을 되돌아보고, 다른 가치를 가진 부모와 반목하고, 처음 가진 아이를 잃고, 로잘린의 마음을 애원하던 그 모든 순간에 마땅하게.

“저 로잘린 보가트 르 칼라브리아는 칼라브리아의 왕비로서 왕국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렇다면 지레 겁먹고 나가떨어지는 겁쟁이는 되지 말아야지.

로잘린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무게에 질식할 것 같아 겁을 먹었던 것과는 달리, 무겁지 않았다. 왕관을 쓰는 순간 다이아몬드로라도 변해야 할 것처럼 느껴졌던 자신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왕관은 왕관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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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다미안이 약물에 취해서 돌아왔다고?”

커피 하우스의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이안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주억였다. 치료를 시작한 지 제법 되었음에도 아직도 약물 중독 반응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를 둘러싼 이들이 모두 당황한 얼굴로 이유를 물었다.

“다미안이 왕세자비, 아니 왕비께 결혼을 축하드린다며 선물을 했던 모양이야.”

“그게 뭐? 문제라도 되었나?”

“예전에 다미안이 왕비를 무척 좋아하지 않았나. 물론 지금이야 끝난 마음인데, 그것으로 선왕과 선왕비께서 트집을 잡았던 모양이더군. 왕비께서도 왕세자비 시절에 괜히 재판에 회부되네 어쩌네 하는 말이 오가고.”

이안의 몫으로 놓인 커피잔은 한 모금도 줄지 않은 채였다. 물론 그게 이안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를 포함한 그 테이블의 사람들 모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느라 커피를 마시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다미안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데?”

“다미안이 사실을 밝히려고 했다더군. 절대로 왕비와 자신은 부정한 사이가 아니었다고. 이미 국왕 폐하와 깊게 마음을 나누고 계신 것을 궁 안의 모두가 알고 있었어.”

“…….”

“하지만 선왕 내외는 이미 평민 출신 왕세자비를 내쫓을 생각에 눈이 먼 상태였고, 다미안은 그들이 보낸 무뢰배들에게 쫓기느라 말을 하지 못했대. 그사이에 왕비께서 추문에 강한 스트레스를 받아 아이를 사산하셨다지 뭔가.”

이안이 죄스럽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뭐라? 평민 출신 왕세자비가 마음에 차지 않아서, 추문이 생기니 옳다구나 하고 내쫓으려 하려던 거라고?”

“미친 게 아닌가? 보가트 가문이 왕실에 바친 돈만 해도 얼마인데!”

이 나라는 여전히 평민이라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다. 귀족이니 왕족이니 앉아서 놀기만 하는 것들이 다 누구 돈으로 먹고살고 있는데!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이들이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붉혔다.

“다미안이 평소에 오피움 같은 것에는 손도 안 대는 것, 자네들도 잘 알지 않나.”

“알지, 잘 알지.”

“어떻게든 왕을 만나 그 사실을 고백하려 했다가 사냥꾼들에게 납치를 당했다더니, 그 몰골로 돌아왔네.”

이안이 속상하다는 얼굴로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옷도 평소보다 허름한 차림이라, 누가 보아도 아들 일로 정신 사나운 아비의 모습으로 보였다.

짠하게 가라앉은 친우들의 시선이 이안에게 꽂혔다. 이내 그들은 서글픈 목소리로 평민이라는 이유로 멸시받았을 왕비와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난 공주를 애도했다.

“가엾은 왕비 폐하. 가엾은 공주님.”

“왕비께서 앞으로 무탈하셔야 할 텐데.”

이렇듯 도시의 카페에서 시작된, 새로운 왕비의 고초와 안타깝게 사망한 공주님의 이야기가 작은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가던 평소와 다를 것 없던 날.

아름다운 왕자님은 진실로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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