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갑작스러운 선왕의 서거에도 불구하고, 궁은 새로운 왕의 지휘 아래 차근히 질서를 찾아갔다.
가계부라도 관리하는 건지, 수입과 소비 금액을 적는 일 말곤 하는 일이 없어 손가락을 빨기 바쁘다던 재무대신이 발에 불난 듯 뛰어다닌다는 건 이미 파다하게 소문이 난 터였다.
왕은 가장 먼저 선왕비가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을 줄이고, 왕자들을 모두 궁 밖으로 내보내며 각 처소에 배당되었던 사용인의 규모를 축소했다. 그리고 보가트 공작가로부터 차입하는 금액을 줄였다.
다만 회의를 통해 귀족들이 가진 영지의 조세를 조정하려던 계획은 초장부터 실패하여, 왕실세 조정으로 타협을 보았다.
목적은 분명했다. 나라의 안정과 보가트 가문으로부터 지원 최소화.
그가 총애하는 왕비가 보가트 가문의 일원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외척 세력인 보가트 가문을 더 키울 생각이 없다는 게 명백했다.
왕비는 반발하지 않았다. 그것은 보가트 가문이 왕 앞에 몸을 숙이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모든 것은 평화의 시기로 돌아가고 있었다.
“정말로 교황이 대관식 일정을 확정하였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하는 로비엔을 보며, 밀리언은 그렇게 생각했다.
교황이 대관식에 참석하여 로비엔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주겠노라 약속했다. 처음에 요구한 베르크령은 넘겨주지 않되, 적절한 협박과 기부금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고 했다. 이것이 평화로 가는 걸음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베르크령을 빼앗기려나 싶어 분노했던 밀리언은 단번에 교황이 드러낸 욕심을 차단한 로잘린의 수단에 감탄했다.
“그러니 밀리언, 비와 관련해서 허튼 걱정은 하지 말도록.”
로비엔은 담담한 얼굴로 기쁜 결과를 수용했다. 아직 로잘린을 향한 신용이 부족했던 밀리언에게 로잘린을 믿으라는 충고와 함께.
주인을 걱정하는 것이 그리 민폐인 줄은 몰랐다. 밀리언이 다소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궁내부와 협력하여 대관식의 규모를 더욱 키우고, 성대하게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교황의 참석도 정해졌으니, 만방에 알릴 만한 규모의 대관식을 치르려면 준비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혹여라도 교황이 참석하지 않거나 대관식이 미뤄질까 봐 머뭇거리던 요소들이 많았다.
“성대할 필요는 없어.”
그러나 로비엔의 목소리가 밀리언의 잡다한 생각을 끊었다. 밀리언이 의아한 얼굴로 로비엔을 응시했다. 설명을 원하는 눈동자였다.
“선왕께서도 적절치 못한 죽음을 맞이한 판에, 다음 왕이 성대하게 대관식을 치르겠노라 하면 백성들이 퍽이나 반기겠지.”
본래 화려한 것에 흥미가 없는 로비엔이 그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대관식은 국가의 안정에 도움이 됩니다, 폐하. 왕실의 건재함과 공고함을 만방에 알리는 계기라는 것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밀리언은 반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주군이 드디어 왕이 되는데, 소박한 대관식이 말이나 되냐는 듯이.
“성대한 대관식만이 왕실의 건재함을 알릴 수 있는 조건은 아니지 않나?”
로비엔의 물음에 밀리언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어차피 교황으로부터 받는 왕관이 그 증거고.”
어떻게든 설득하고 싶은데 틀린 말이 없었다. 밀리언이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고민하는 것을 발견한 로비엔이 기울인 머리를 손으로 괸 채 작게 웃었다.
“비를 찾아가서 설득할 생각은 하지 마.”
로비엔의 단호한 목소리에, 직전까지 로잘린에게 달려가 대관식과 로비엔의 의견에 관해 이야기하고 설득해 볼까 했던 밀리언이 움찔했다. 로비엔을 설득하거나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은 로잘린뿐이었으니까.
이전에는 선왕비가 그런 역할을 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 그녀는 로비엔의 영역에서 멀리 밀려난 사람이었다.
“이미 교황청에 기부금을 내기로 약속했어. 여러모로 쓸데없는 곳에 자꾸 소비하고 있으니, 다른 예산은 아껴야 하지 않겠나?”
밀리언이 티 나지 않게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로비엔의 뜻이 그렇다면 그에게는 주군의 뜻을 꺾거나 거스를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수용할 생각은 아니었다. 로비엔이 금한 것은 성대한 대관식이지, 수준이 떨어지는 대관식이 아니었다.
밀리언이 로비엔에게 인사한 후 그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로비엔은 모르겠지만, 닫히는 문을 뒤로하고 밀리언이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로잘린이 그것을 수용할 리 없었다. 물론 로잘린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로잘린은 로비엔에게는 가장 좋은 것들만 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기도 했다.
로비엔은 로잘린을 찾아가 설득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설득하지만 않으면 되는 일 아닌가. 로비엔의 뜻으로 로잘린을 떠보고, 그 반응을 살펴 반영할 생각이었다.
같은 시간, 로잘린은 드마셸과 마주하고 있었다.
“말씀하셨던 약용액의 비율에 관한 내용입니다.”
드마셸이 품 안에서 비밀스럽게 보관한 종이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로잘린은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받아 펼쳐 들었다.
“한데 어떤 문제로 그 내용을 찾으셨는지…….”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요. 마리, 내가 따로 보관해 두라던 장부는 어디에다 뒀니?”
로잘린의 물음에 마리가 상자를 열어 따로 보관해 둔 장부를 꺼내 왔다.
“비소 화합물을 필요한 양보다 두 배 이상 많이 구매했어요.”
테이블 위에 놓고 두 가지를 비교해 보던 로잘린이 손끝으로 비소의 구매량을 짚었다. 드마셸의 시선이 쓱, 종이들을 스쳐 지나갔다.
“없어지는 물건도 아니니, 다른 재료들만 더 구매하여 추후 더 제조할 수도 있지요.”
“그렇게 되면 사업 계획 내용과 완전히 달라지지 않나요? 그리고 구매분에 해당하는 제품은 제조가 거의 끝났다고 들었고요.”
“…….”
“그 이후로 차후 생산을 위해 다른 재료를 더 구매한 적도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로잘린의 물음에 드마셸이 번잡한 머릿속을 헤집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사료 사업도 있고…….”
“아버지께서 직접 관리하고 계신가요?”
드마셸이 고개를 저었다. 부족한 점이 많은 아들이라고는 하나, 아무렴 발란이 정해진 일도 못 하는 바보천치는 아니니 잘하고 있으려니 생각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발란에게 네가 한심하여 벌어진 일이라고 몰아붙이기는 했어도, 상단을 이어받을 후계자였던 발란에게서 그 자리를 빼앗은 것이 내심 미안하기도 했다.
“사료 사업은 아직 시작하지 않으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제가 잘못 알고 있나요?”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단순히 비율에 맞지 않게 구매했다고 추궁하는 게 아니에요. 다소 찜찜한 구석이 있으니, 구매한 재료들이 제대로 보관되어 있는지를 확인해 보시는 게 좋겠어요.”
로잘린의 조언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다시피 저흰 이제 그냥 상단이 아니잖아요.”
“…….”
“전하께 누가 되어선 안 돼요.”
돌려서 말했지만, 부디 작은 부분도 민감하게 굴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사생아 출신의 딸이 왕비가 되어, 졸지에 왕의 장인이 된 몸으로 그 말에 토를 달 명분도 없었다.
“그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 말씀해 주시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굳어 있던 로잘린의 표정이 조금 풀리자, 드마셸도 마음이 놓였다. 그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사람 좋은 척 웃어 보였다.
“곧 정말로 대관식이로군요.”
“……그리되었네요.”
“살아생전에 왕의 장인이 될 줄이야. 생각도 못 했습니다.”
마찬가지였다. 왕비가 되는 것은 왕세자비로서 결혼할 때조차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는데, 로잘린은 이미 왕비가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이 딱히 겁이 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망아지 같은 보가트 가문의 구성원들을 묶어 둘 계책을 생각하지 못한 사이에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저는 처음 전하를 뵐 때부터 특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처럼 벌써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들떠서 발개진 볼을 보면,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첫 만남에 특별함이라고는 없었다. 드마셸은 로잘린을 난감한 얼굴로 내려다보다가, 저와 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발견하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간은 내내 모른 척했지만, 어미까지 죽은 것을 버리기에는 죄책감이 들었겠지. 그때쯤에는 상단도 제법 키워 두어, 빈 입 하나 거둘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면에서 말인가요?”
로잘린이 담담하게 되물었다.
아직까지는 드마셸도 특별한 욕심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견제하는 로비엔의 행보에도 몸을 납작 엎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모를 일이었다.
“그야 미색이나, 이 드마셸을 닮은 총명한 눈이 말이지요.”
자식을 향한 애정이 아닌 상품을 보고하는 평가였다. 딸이 아닌, 자신의 성공 발판이 되어 준 무엇에게.
로비엔에게 질문하고 그런 답변을 들었다면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상이 그녀의 아버지였다. 애초에 예의상 질문했을 뿐 별다른 말을 기대했던 것도 아니라서 로잘린은 그저 피식 웃고 지나쳤다.
“아버지께선 보는 눈이 좋으시니까요.”
“그럼요!”
의미 없는 칭찬에 드마셸이 허탕하게도 웃어 보였다. 그는 아직도 공작보다는 상인으로 사는 삶이 익숙해 보여, 공작이라는 작위나 칼라브리체라는 미들 네임이 무의미하게 생각되었다.
“한데 오늘 입궁하고 보니 선왕비가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참입니까?”
드마셸이 한참 자아도취 해서 주절거리는 동안, 무의미하게 제 손등을 내려다보던 로잘린의 행동이 멈추었다.
“저도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설마 그러지는 않으시겠지요.”
“국왕 폐하와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그리 아끼던 아들이 신성국으로부터 왕관을 전달받는데…….”
드마셸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할 것임을 로잘린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글쎄요. 그분의 마음이야 제가 알 길이 없으니.”
다만 로잘린으로서도 정말로 선왕비가 로비엔의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을지는 알 수가 없었다. 뒷일을 생각하면 그녀도 그럴 수 없을 테지만, 이전에 로비엔이 그녀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것만은 사실이었으니까.
선왕비가 소머 궁으로 이동하는 내내, 시녀며 하녀들이 곡소리를 냈다고 했다. 이번 대의 왕비가 된 로잘린에게 베르타 궁을 넘겨준 것이 아니라 빼앗겼다고 생각할 터였다.
아무리 로잘린이 소머 궁으로 이동하는 그녀의 물건들을 전부 최상급으로 바꾸어 주었다고 해도, 그에 감사함을 느낄 리도 없으리란 추측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선왕께서 그리 가셨으니 이제 보수 귀족파의 수장은 선왕비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괜한 문제가 되면 골치가 아플 텐데.”
드마셸은 진실로 걱정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는 여전히 상업이 아닌 정치에는 조금 둔감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체적인 그림을 보는 시야가 좁은 것은 아니었다.
귀족파의 수장. 정 하나 없이 들리는 호칭이 조금 선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의 기감이 어떠하든 간에 시간은 나아가야 할 길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