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성하. 칼라브리아의 국왕으로부터 서신이 왔습니다.”
“음, 그래?”
급하게 칼라브리아 수도의 주교에게 서신을 전달하라고 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허겁지겁 편지를 받아 들고 교황을 찾아왔던 하인이 머뭇거리며 식사 중인 그의 근처를 맴돌았다.
“이리 줘라.”
칼라브리아의 국왕에게 거래를 청했던 교황은 식사를 마치고, 마른 천으로 입가를 닦은 후에야 느긋하게 손을 뻗었다.
언제 보든 결과야 빤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통성이 확보되었다는 점에서 자신의 도움이 그리 다급하지는 않겠지만, 신으로부터 전달받은 성스러운 왕관은 그에게도 명예가 될 테니까.
하인이 건네준 서신을 받아 든 교황이 여유롭게 왕실의 문장으로 실링 된 편지 봉투를 뜯었다. 편지에는 칼라브리아의 국왕, 로비엔의 성정을 알 만한 정갈한 필체가 펼쳐져 있었다.
“…….”
여유롭게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교황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즐거웠다가, 무표정해졌다가, 화가 난 듯 붉어졌다가.
하인이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용히 밖으로 나서며 문을 닫았다. 혹여라도 그의 불쾌함이 제게 불똥이 되어 튈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마침내 내용을 끝까지 확인한 교황이 신경질적으로 로비엔에게서 온 편지를 테이블 위로 휙 던졌다. 두어 번 접힌 자국이 선명한 편지 위에는 로비엔이 전달하는 속 깊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신성한 신의 대리자, 프란시스 14세에게.
그대의 위로, 그리고 진실한 기도와 함께 선왕은 무사히 신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에 대하여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뜻밖의 일로 부친을 잃은 마음은 황망하기 그지없지만, 산 자로서 나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특히나 내가 짊어진 것이 단순히 나와 비의 목숨이 아니라 수많은 목숨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지요.
다만, 칼라브리아를 포함하여 국경 안팎의 변화를 생각하면 나의 역할과 다음 행보를 고심하게 됩니다. 입에 담기도 민망하지만, 왕관을 제 손으로 쓰거나 버리는 자가 있다지요. 몇 나라가 교황청에 보이는 불초한 태도는 칼라브리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신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정당한 자격을 가지지 못했기에 그대에게 부정당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겠지요. 마치 어디 내어놓기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뒷맛이 쓰디쓴 베르크산 와인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신의 뜻으로 왕의 적장자로 태어나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라는 자격이 있으니 그대가 그를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신의 뜻을 대리하는 교황의 손으로 왕관을 전해 준다면 그와 같은 영광은 다시 없을 것이며, 신의 가르침도 한층 공고해질 것입니다.
먼 거리를 이동하는 일은 어렵겠지만 나의 첫걸음에 함께하여 모두에게 신의 뜻을 전달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준다면……. 칼라브리아는 앞으로도 신성한 가르침이 널리 퍼지도록 마땅한 기부금을 치러 그대를 도울 것입니다.
칼라브리아 국왕, 로비엔 피베체 르 칼라브리아.>
감히 약화된 교황청의 힘을 지적하는 꼴을 보라. 정통성도 없는 놈들도 알아서 쓰는 왕관, 모든 자격과 정당성을 갖춘 자신이 쓰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 묻는 시건방진 태도는 또 어떻고.
“건방진 놈…….”
이제 스물셋. 아직 연륜이 부족한 놈이 그를 한 방 먹이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빌어먹을 자식.
제가 원하던 것은 얻어 내지 못하고 얻어맞기만 한 교황이 푸르르, 흥분된 숨을 길게 내뱉었다.
로비엔은 스스로 왕관을 쓰겠다는 위협, 그리고 정통성을 지닌 신실한 왕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겁박하면 교황이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칼라브리아는 성전 전후로도 지금까지 교황청에 가장 협조적인 나라였다. 그런 나라까지 왕관을 직접 쓰겠노라 천명한다면 그 후폭풍은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제기랄.”
교황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그가 대관식에 참여해 주는 대가로 기부금까지 바치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여기서 무어라고 더 뻗댈 수 있단 말인가?
교황은 남은 베르크산 와인을 입에 털어 넣고,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첨탑의 가장 끝에 걸린 교당의 상징물. 교황의 시선이 상징물을 지나쳐 하늘로 향했다. 의견을 묻듯이, 내지는 도움을 구하듯이 간절하게 저를 바라보는 그를 외면하듯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새파란 빛깔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이들이 제멋대로 해석하는 일에 이골이 난 신에게는 이미 뜻이 있었다. 그러니 모든 것은 마땅히 흘러가야 할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이안 래비어트가 왕세자의 부름을 받아 궁에 들었다.
그는 소식을 전하던 시종조차도 안광을 번뜩이는 것을 발견하고, 사달이 나도 제대로 났다는 것을 짐작했다. 하지만 김이 빠져도 좋으니 별일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도 그의 마음속에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기대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그를 기다리던 왕세자를 마주친 순간 깨부수어졌다.
“앉아.”
왕세자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그 나직한 목소리에는 늘 상대를 굴복시키는 힘이 담겨 있었다. 이것이 단지 계급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늘 그대를 부른 건, 선택지를 주기 위해서야.”
선택지? 자리에 앉은 이안이 눈을 굴리며 로비엔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미안 래비어트는 왕세자비 시절 왕비의 추문을 날조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여 아이를 잃게 만든바, 죄인이다.”
이안 래비어트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감히 허튼 마음을 품고 왕족을 해하는 데 이바지하였으니 효수하여 성벽에 그 목을 걸어 두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사실 가슴 한구석에는 지금도 다미안 래비어트를 죽여 없애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는 모략으로 아이를 잃었다. 그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 수 없었다.
로잘린과 아이를 해치려던 선왕은 죽었고, 그토록 집착하던 명예는 정부의 손에 죽었다는 말로 망가졌다.
선왕비는 추문을 날조하는 데에는 관계가 되었어도, 목숨을 해하려 한 것이 아니기에 죄를 물을 수 없었다. 다만 로잘린을 조롱하려던 낡아 빠진 별궁으로 쫓겨나고, 왕이었던 남편과 왕이 된 아들을 동시에 잃게 되기는 했다.
남은 것은 다미안뿐이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괴적인 욕구가 들끓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로잘린의 목숨을 우습게 여기는 왕족의 관점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장 손쉽게 목숨을 앗을 수 있기에 가장 먼저 화가 미치는 것. 그것은 결국 각자 지닌 생명의 가치가 다르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모두 가진 목숨은 하나고, 그 생명을 운용하는 것은 한 번뿐일진대.
지금 가장 부정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폐하, 그 아이는…….”
“이미 제 입으로 실토했으니 일이 그리될 줄 몰랐다는 변명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원망스러워도 하나 있는 자식이다.
로비엔이 손을 들어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다급히 입을 여는 이안을 막았다. 결국, 이안은 한 번의 발언권도 얻지 못한 채 다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대의 아들이 저지를 일을 알았다면 그대로 두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하는 바야.”
“…….”
“이안 래비어트, 그대에게 래비어트가가 나의 비에게 적대적이지 않고, 해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를 주고자 한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말에 이안은 희망을 얻었다.
무엇이든 하겠다는 듯 반짝이는 눈빛에서 로비엔은 그가 거래에 무조건 응할 것을 알았다.
“그대의 아들은 풀어주지.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피움에 취해 있어 중독 증상을 보이니 그 점을 이용해 소문을 내.”
다미안이 로잘린을 좋아했던 것도, 그녀가 왕족이 된 기념으로 장신구를 선물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이를 갖고서도 왕가에서 평민이라는 이유로 끊임없는 멸시를 받으며 시들어 가는 로잘린이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공감할 수 있는 것도, 달래 줄 수 있는 것도 평민이자 친구인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 선물이 왕가에 의해 악용되었다. 수세에 몰린 왕세자비, 지금의 왕비가 아이를 잃었다. 태내에서 조금만 더 머물렀다면 살 수 있던 공주님이 희생당했다. 평민의 피가 섞인, 반쪽짜리 왕족이라는 이유로.
그를 사실대로 밝히고자 했다가 납치를 당한 아들이, 약에 취한 채 목숨이 끊기기 전에 발견되었다.
“그대의 아들은 평소에 오피움을 취하는 자가 아니었다 하니 신뢰는 받겠지.”
“하지만 이, 이런 내용을 밝혀도 괜찮습니까?”
이안 래비어트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가 지어낸 소문 속에서 래비어트 가문은 얼결에 말려든 하나의 희생양으로 둔갑했지만, 그 거짓된 내용을 제외하고는 전부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소문에 불과하지. 하지만 사람들은 그 당사자가 존재하고, 소문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믿게 될 거야.”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거리에 떠도는, 신뢰감 있는 왕가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소문.
“가문과 아들을 지키는 일, 모두 버리는 일. 둘 중 하나를 택해.”
“…….”
“어느 쪽이든 존중하지.”
이안 래비어트는 생각을 멈추고, 운 좋게도 쓸모가 있어 살아남았다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어차피 곧 왕이 될 이 남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로서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따르겠습니다.”
만남의 목적은 성사되었다.
“나가 봐도 좋아.”
혹시라도 로비엔의 마음이 변할세라, 이안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데.”
그러나 들려온 왕의 목소리가 바로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대의 아들이 제정신을 차리거든 전해. 내 비에게 다시 한번 미련스러운 마음을 티 냈다간 그 머리통이 무사하지 않을 거라는 것만 알아 두라고.”
짐승의 것처럼 잠긴 눈동자에 서린 명백한 경고에 이안이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맹세를 하고서야 왕세자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로비엔은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는 이안 래비어트의 뒷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자조적인 얼굴로 짧게 웃었다.
화를 내고, 협박하고. 낯선 일들을 익숙한 것처럼 해내야 했던, 피곤하고 긴 하루였다. 이것이 왕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당연한 일인가? 그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여전히 불분명했다.
하지만 그 대답이 어떻건 간에, 그는 곧 완전한 왕이 된다.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전달받든, 아니면 그가 직접 왕관을 쓰고 즉위식을 치르게 되든, 그것 하나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적어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일일까? 로비엔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길게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