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80)화 (80/151)

# 80.

“조금이라도 진정하고 난 이후에 찾아가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적어도 궁 안에서 평화를 부수고 있는 게 로잘린은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도 소문의 중심이 되어 이 궁 안에서 평화로울 수 없는 그 여자는 범인이 될 수 없었다.

이 나이에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그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로비엔이 로잘린의 편에 서야만 하는 이유였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다미안 래비어트가 계속 나와 그녀의 목을 조를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로비엔은 씨근덕거리는 숨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눈을 떴다. 푸른 눈이 얼어붙은 빙판처럼 서늘한 온도를 품고 있었다.

밀리언은 그 눈을 마주친 순간 옆으로 걸음을 물려 로비엔이 지나갈 수 있도록 했다. 이전보다 더 서늘해진 눈이 안심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진정은 된 것 같아서였다.

로비엔이 기다렸다는 듯 걸음을 뗐다. 왕비의 궁인 베르타 궁이 가까워질수록 헛웃음이 샜다. 이제는 일말의 미련을 갖는 것조차 우습다는 게 서글퍼서였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베르타 궁의 하녀들이 먼저 그에게 나붓이 인사했다.

“그대들의 주인께선 어디 계시지?”

“응접실에서 클로티 부인과 시간을 갖고 계십니다.”

소식을 들은 듯, 리만 후작 부인이 복도 끝에서부터 서둘러 걸어왔다. 그녀의 드레스 치맛자락에 달린 장식들이 걸으면서 이는 바람에 하염없이 흔들거렸다. 그만큼 걸음을 재촉했다는 뜻이었다. 그의 기색이 평소와 다르다고 전달받았을 거라는 데 전부를 걸 수 있었다.

“내가 만남을 청한다고 전달해.”

“그리하겠습니다.”

조금은 조급한 숨을 내쉬며 리만 후작 부인이 대답했다.

보통의 경우에는 이토록 무례하게 만남을 청하지도, 리만 후작 부인이 허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로비엔은 왕비가 가장 아끼는 그녀의 첫째 아들이며 왕이 된 자였다. 게다가 오늘따라 날이 선 기운이 역력했다.

두 번의 노크 끝에 왕비의 응접실로 들어간 리만 후작 부인이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열고 나왔다.

“드시지요.”

육중한 무게감과 함께 열린 문 너머로 로비엔이 발을 들이밀었다. 리만 후작 부인은 눈치껏 하녀들에게 따라서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눈치를 준 뒤 물러섰다.

조금 전까지 무슨 말을 나누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선왕비의 응접실 안은 고요했다. 분명 사람을 붙이는 조건으로 만남을 허락한 것인데, 로비엔이 붙인 근위병 역시 없었다. 당연히 이해받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불쾌한 일이었다.

클로티 부인은 선왕비와 마주 보고 앉아 있어 로비엔을 등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비엔의 불편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조금 물러섰다.

“로비엔. 갑자기 어쩐 일로…….”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클로티 부인도 함께니 확인하기가 더 쉽겠군요.”

무엇을? 클로티 부인이 불안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다미안 래비어트를 붙잡았습니다.”

“……그랬니?”

“그가 말하길, 선왕께서 비를 내치기로 마음먹었기에, 어머니께서 그 계기가 될 만한 것을 그에게 마련해 오라 하셨다더군요.”

바늘 하나 굴러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적막한 응접실 안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차게 얼어붙었다. 작은 여우인 척하는 암사자와 무리에서 새롭게 우두머리가 된 수사자 사이에 낀 클로티 부인은 그 중압감을 견디지 못해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 후에 클로티 부인이 그 에메랄드 귀걸이 따위를 받아 증표로 제출했고, 그것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로잘린을 폄훼하고자 하셨고.”

“…….”

“맞습니까?”

클로티 부인의 태도가 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고, 로비엔의 목소리는 이미 확신을 담고 있었다. 왕비 역시 부정하지 않았다.

“내게도 이유가 있지 않겠니?”

다만,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비난하는 아들을 붙잡았을 뿐이었다.

“이 어미도 어쩔 수 없었다. 나라고 여인으로서 로잘린이 가엾지 않았겠니? 하지만 왕께서 명령하셨다. 나는 비이자 신하로서 그분의 말을 따라야 했어.”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애처로운 모습과 간절한 애원에도 로비엔은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그렇다 하여도 죄 없는 이를 모함하려 했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제가 소문이 왕에 의해 날조된 것을 알고 있었느냐 물었을 때, 조금도 알지 못했다고 대답하셨어요. 아닙니까?”

제 어미의 위선을 알고 있어서였다. 선왕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을 말하고, 원한다면 자신마저도 속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왜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오, 나는 그저……. 네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로비엔.”

“다미안 래비어트는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서 죽이려고 하신 것일 테지요.”

다미안 래비어트의 목구멍으로 치사량의 오피움을 넘기려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혹여라도 그가 로비엔의 손에 먼저 잡혀 실토하면, 선왕비가 숨기고 싶었던 진실을 그가 알게 될 것이기에. 하다못해 약물 중독으로 제정신이 아니게 되거나, 죽어 버리기를 바랐겠지.

“로비엔!”

“선왕비는 즉시 소머 궁으로 처소를 옮기고,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있을 시에는 바로 가문으로 돌아갈 것을 명합니다.”

왕비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지경으로 커졌다. 벌어진 입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 뻐끔거렸다.

클로티 부인 역시도 감고 있던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로비엔을 응시하고 있었다.

선왕비. 그녀의 처지로는 맞는 말이지만, 지금 로비엔이 내뱉은 말은 명백한 선언이기도 했다. 권력의 중심부에서 그녀를 밀쳐 내고, 왕의 어머니가 아닌 선왕의 그림자로 남겨 두는 것.

그나마도 그가 사랑하는 어머니기에 궁에 남을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처음 로잘린을 조롱하기 위해 배정해 주었던 그 궁이라는 점에서 모멸감을 느끼기는 하겠지만.

“지금 남편을 잃은 사람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하지 않니?”

“아이를 가진 로잘린에게 그 추문과 사고도 가혹했어요.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계집 하나에 눈이 멀었구나. 미쳐 버렸구나!”

선왕비가 악다구니를 질러 댔다. 이 정도로 큰 소리라면 문 너머에 있는 이들까지도 모두 들었을 것이다.

“천한 계집에게 눈이 멀어 어미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선왕비가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하자 두꺼운 문 너머로 시종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클로티 부인은 주춤주춤 걸음을 옮겨 주저앉아 우는 선왕비를 끌어안았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그리 가련해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자신이 저지른 행동의 일 할도 되지 않는 처분에 저토록 분노할까? 아이가 죽은 것은 당연하며, 오히려 옳은 일이었다고 말하던 제 아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분명 다른데, 지독하게도 닮아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클로티 부인. 그대에게 주어진 시간은 끝났으니 따라 나오도록 해.”

여전히 선왕비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로잘린과 죽은 아이의 목숨이 그녀에게 출궁을 운운한 충격보다도 못하다는 것 같았다.

“폐하.”

망극하게도 손수 문을 열어젖히자,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과 리만 후작 부인이 그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여자에게 홀려 어미를 버린 천하의 패륜아라도 된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 앞에 그는 조금 망연해졌다.

귀족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대들은 즉시 이동을 준비해.”

로비엔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의 같잖은 유대감과 슬픔을 지나쳤다.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클로티 부인은 다시 가두고, 이안 래비어트가 궁에 들거든 바로 내게 보내.”

“그리하겠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상황은 로잘린이 로잘린인 한 영원히 반복될지도 모른다.

그녀에게는 귀족이라는 한정적 집단보다 더 광범위하고 집단적인 지지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평민 출신 왕자비에 대한 일체감과 동경, 기존 왕가와 봉건제에 대한 불만을 이용한 소문 같은 것.

“폐하.”

이 대책 없는 상황 앞에서 어쩔 줄 몰라 눈을 굴리고 있는 저 여자를 위해서라도.

“대체 뭘 하고 오신 건가요?”

로잘린도 선왕비와 그 사이에 있었던 소란을 들었는지, 당황한 얼굴로 로비엔의 팔을 붙들었다.

“선왕비께 소머 궁으로 떠날 것을 명령했습니다.”

“갑자기요?”

“그것 말곤 딱히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더군요. 미안해요.”

그가 속삭였다.

사실 로잘린이나 로비엔이나, 모든 준비가 끝날 때까지 몸을 숙인 채 절대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찔끔찔끔 건드리는 게 아니라, 한 번에 가장 큰 타격으로 목덜미를 물어뜯는 사냥법을 사용하곤 했다.

한데 대책도 없이 상대의 얼굴을 후려쳐 놓고도 후련해 보이는 이 사내는 대체 누구지?

로잘린이 오늘따라 낯설기 짝이 없는 제 남자를 어색하게, 하지만 진지하게 응시했다.

“한동안 그 기세가 꺾여 있다면 도움이 될 겁니다.”

로잘린이 그의 속내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한동안?”

“래비어트가에서 내가 시킨 일을 수행하는 동안.”

소문에는 소문으로.

“다미안 래비어트를 이용하려는 건가요?”

“네.”

“이안 래비어트가 시키는 대로 할까요?”

왕가의 지속적인 괴롭힘, 그리고 고작 출신 성분 때문에 일에 말려든 왕자비와 그 때문에 죽은 공주 이야기는 살롱에서 거리로 퍼져 나갈 것이다. 칼라브리아에서 가장 큰 두 개의 상단이 소문에 부채질을 한다면 아마 시골 끄트머리의 마을까지도 장악할 수 있을 터였다.

왕가의 이중성을 드러낸다면 전통적 왕족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로잘린에 대한 지지도를 높일 수 있다. 그게 로잘린을 지켜 줄 또 하나의 대비책이 될 것이다.

물론 고아한 왕가의 이미지에는 큰 타격이 있겠지만.

화목한 왕가, 흠 없는 왕위 계승권자, 신뢰받는 왕.

그것은 왕실의 목표이자 로비엔이 추구해 온 삶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목표를 내려놓지 않는 한 제 아내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게 제 살을 깎아 먹는 일이 되더라도 그리할 작정이었다.

“가문의 존폐가 걸려 있다면 할 수밖에.”

심상한 목소리가 부드럽지만 냉정하게 못을 박았다. 이안 래비어트에게 아들을 살리고 싶다면 시키는 대로 하라고 전달하라던 노성이 진심이었던 것이다.

“말려도 듣지 않으실 거죠?”

로비엔은 대답 없이 그녀의 이마에 미지근한 입술을 내리누를 뿐이었다.

늘 그녀에게 다정하고 온화하지만, 자신이 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일에는 절대 굽히지 않는 사람. 언젠가는 쇠심줄 같은 그 태도가 고까울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좋았다.

그가 지키려고 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한, 그럴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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