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물론 로잘린도 자신이 바란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소망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예정된 것이 다미안 래비어트와의 만남임을 고려하면 더욱 그랬다.
애초에 다미안은 로비엔의 부모가 저지른 몹쓸 짓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런 자와 대화를 하는 데 유쾌한 얘기를 들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정말로 저 혼자 만나도 괜찮아요.”
자신을 응시하는 싱그러운 눈에 서린 감정이 무엇인 줄 알아, 로비엔은 그저 부드럽게 웃었다. 로잘린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은 혹시라도 빠져나갈까, 조금 더 힘주어 잡은 채였다.
“두 분 폐하를 뵙습니다.”
“예는 필요 없으니 문을 열어.”
눈앞의 공간을 발견한 순간, 로잘린은 로비엔이 클로티 부인을 그나마 배려해 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미안이 있는 곳은 펠리에 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후미진 구석에 있는 방이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도 모를 목재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바닥 한쪽에서 웅크리고 떨고 있는 다미안 래비어트가 눈에 들어왔다. 입술은 여전히 파랗게 질려 있었다.
“오피움에 취해 있었다고 했죠?”
오피움은 보통 마취제나 진정제로 쓰여 길거리에서도 쉽게 유통되는 약품에 불과했다. 하지만 다량을 한 번에 섭취하면 심하게는 호흡 곤란으로 인한 사망, 덜하게는 몇 가지의 부작용이 있었다. 다만 그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어 환자들 역시 복용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었고, 특유의 냄새가 있어 독극물로 활용하기도 어려웠다.
로잘린의 질문에 로비엔이 음, 하고 목 아래로 잠긴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품에서 벗어난 로잘린은 한쪽에 널브러진 모포를 다미안의 몸통 위로 펼쳐 휘어 감았다.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불안하게 몸을 떨어 대던 다미안 래비어트의 시선이 그제야 로잘린에게로 향했다.
“……로잘린?”
어제까지도 헛소리를 지껄여 댔다더니, 로잘린은 제대로 알아보았다. 로비엔은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그 꼴을 관망했다.
“꼴이 볼 만하구나.”
로잘린이 내뱉는 말은 신랄하게 들렸으면 들렸지, 유쾌하거나 사랑스러운 종류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다만 거기에 얼마쯤 걱정 따위가 배어 있다는 건 알았다.
로잘린은 본디 제가 곁을 준 몇 사람들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힘겹게 그 자리를 차지한 로비엔 자신, 하녀 마리, 최근 고용되었다던 시녀 라나, 드마셸이 그에 속했다.
……다미안 래비어트는 친구였다고 했으니까. 로비엔은 그렇게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피움은 왜 그렇게 많이 먹었어?”
로잘린의 물음에 다미안이 희미하게 떨리는 손을 마주 잡은 채 입을 열었다.
“내가, 내가 먹은 거 아냐.”
그러나 말은 정제되지 않은 채, 떠듬떠듬 나왔다. 거짓으로도 여전히 상태가 좋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럼 누가 그랬는데?”
“사냥꾼 둘이 따라붙, 붙었어.”
“…….”
“왕, 왕비가 보낸 거야. 그 미친 여자가!”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던 순간이 떠오른 듯, 다미안이 비명과 함께 소리를 내질렀다.
로잘린은 약간 얼굴을 찌푸릴 뿐, 왕비를 미친 여자로 매도하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로비엔이 불쾌해하지도, 그를 막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표정한 얼굴로 다미안을 바라보는 로비엔은 짐작하던 것에서 확신을 얻은 듯 보였다.
“나를 붙잡고, 입에, 병을, 쏟아부었어. 액체가 들어와서…….”
“…….”
“냄새가 나서, 넘기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미안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아마 몸부림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얼마쯤 들이마셨고, 그 이후에는 로비엔이 보낸 이들에게 구제되었을 것이다.
로잘린은 손을 들어 더 듣고 싶지 않은 다미안의 말을 끊었다.
“왕비께서 네게 왜 사냥꾼을 보냈는데?”
로잘린의 물음에 다미안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이내 입이 굳게 닫혔다.
“말해. 왜 보냈는데. 뭘 묻고 싶어 했던 건데.”
고저 없는 목소리가 경고하듯 다미안의 시선을 붙들었다. 어깨에 둘러 준 모포를 묶어 상냥하게 마무리를 지어 주는 것처럼 보였던 양손이 그를 가까이 당기고 있었다. 사실 로잘린의 손은 어느새 그의 멱살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나는 몰라.”
“몰라?”
“네가 가엾었어. 그뿐이었어.”
이곳에 오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만 하기로 작정한 걸까. 다미안의 모르쇠에 로잘린이 작게 웃었다. 얼핏 보기에는 귀여운 것을 대하며 다정하게 웃는 것 같았지만, 로비엔은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로잘린은 뭔가 꼭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저렇게 곰살맞게 굴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알까? 난 꼭 알아야 하는데.”
“왜?”
“내 아이가 죽었어. 그리고 나도 죽을지도 몰라.”
로잘린의 목소리가 노래하듯 몹시 부드럽고 나긋해졌다. 모포를 움켜쥐고 있던 두 손 중 한 손은 다미안의 한쪽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변덕스러운 어린아이를 달래듯 조심스러워 보였다.
“다미안. 내 하나뿐인 친구 다미안.”
“…….”
“네가 나를 구해 주지 않으면 나는 어떡해. 이 외로운 곳에서 나 혼자서는 힘들어.”
로잘린이 속살거렸다. 얼굴에는 얼핏 애처로운 기색까지 감돌았다.
그런 로잘린을 바라보는 다미안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약 기운에서 많이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어눌한 말투처럼 여전히 찌꺼기 같은 잔 기운이 남아 있었다. 다미안의 눈이 조금 혼몽해졌다.
손등에 입을 맞추며 그녀에게 속살거리던 언젠가의 기억이 그를 파고들었다. 단 한 번도 로잘린은 그 애정에 답을 준 적이 없었지만, 왜곡된 기억 속에서 어느새 그와 로잘린은 사랑에 빠졌다가 애달프게 이별하고 있었다.
일을 저지르기 전에 수없이 꾸었던 꿈에서도 그랬다. 그래서 로잘린이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가지고 싶은 것이구나 생각하며 집착했다.
“가엾은 로잘린.”
그것을 예민하게 살피던 로잘린이 결국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울기라도 하는지 잘게 떨리는 어깨를 지켜보던 다미안이 결국 그녀를 제 품 안으로 당겨 안았다. 로잘린도 거기에선 조금 놀랐는지 안긴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로비엔은 그에게는 기껍지 않은 로잘린의 태도 변화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다문 턱에 지그시 힘이 들어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왕비가 너를 곧 내칠 거라고 했어. 궁에서 내쳐지고, 왕세자에게서 버림받고, 이용 가치가 없어져서 그 아비에게서도 버림받을 거라고.”
다미안은 주절주절 제가 알고 있던 사실을 털어놓으며 로잘린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로비엔이 같은 행동을 할 때는 그처럼 애틋하고 안타깝게만 느껴졌는데, 다미안의 살갗이 닿는 목덜미는 불쾌해서 소름이 돋았다.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다미안의 어깨너머로 얼굴을 구겼다.
결국, 로비엔도 로잘린의 불쾌한 낯을 발견했다. 그가 망설이지 않고 다가왔다.
“너와 만나는 자리를 만들고, 증표가 될 만한 물건을 건네면 다 알아서 하겠다고 했어. 그 후엔 왕세자가 찾기 전에 숨어 있으라고 얘기했어. 그러면 다 끝나고 너를 내게 데려와 주겠다고. 아아, 가여운 내 사랑. 네가 내게 오기 전까지 나는 너를 지키고 싶었어.”
다미안이 그렇게 말한 순간, 로비엔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로비엔이 다미안을 걷어차며 그 품에 갇힌 로잘린을 끌어냈다. 무방비하게 떠밀린 다미안의 몸이 허우적대며 바닥으로 힘없이 드러누웠다.
“폐하!”
로잘린이 놀란 얼굴로 품에 안긴 채 로비엔을 올려다보았다. 로비엔의 발이 강한 힘으로 다미안의 가슴팍을 내리눌러 로잘린에게 다시 들러붙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선왕비께서 비를 내치겠다 했다고?”
“컥.”
다미안이 고통스러운 숨을 토해 냈다. 가슴을 걷어차이면서 얻은 통증에 더해, 계속 로비엔의 발에 밟혀 있어 숨을 쉬기가 힘든 듯했다.
“그걸 듣고도 기회가 왔다며 좋아했나? 알렸어야지. 알려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했어야지.”
“…….”
“네 사랑은 그 사람을 네가 있는 진창까지 끌어내리는 건가 보지?”
파랗게 날이 선 눈동자가 다미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폐하, 폐하! 이러다가 죽을지도 몰라요.”
로잘린이 흉흉한 기색의 로비엔을 만류했다.
마침내 단단한 그의 몸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밀리언!”
로비엔이 크게 이름을 부르자, 문밖을 지키고 있던 밀리언이 조용히 방 안으로 스미듯 들어왔다.
“래비어트가에 사람을 보내. 자식을 살리고 싶거든 시키는 대로 하라고.”
참을성이 조각난 얼굴로 그가 일갈했다. 로잘린은 당황한 얼굴로 낯설기 짝이 없는 난폭한 미인과 밀리언을 번갈아 보았다.
밀리언은 그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로비엔은 마치 에스코트하듯이 유려하게, 하지만 에스코트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로잘린을 방에서 끌어냈다.
“쉬고 있어요.”
“폐하. 다미안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그냥 둬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로비엔의 손에 이끌려 복도를 걷고 있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상황의 변화에 로잘린이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사실 다미안이야 로잘린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토록 막 대할 일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약에 취한 놈을 실토하게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못 할까.
사실 제정신이었다면 버티고 들었을 것이라, 오피움에 취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로비엔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화나셨어요? 그게 제일 빠른 방법이라…….”
“알아요. 그대를 책망할 생각도 없고.”
“그러면 왜…….”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로비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이용 가치가 있으므로 그를 살려 두는 거라는 의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선왕비께는 왜 가시는 건데요?”
로잘린이 로비엔의 소매를 붙들고 물었다. 그는 그제야 부드러워진 손길로 로잘린을 침실로 밀어 넣었다.
“다녀와서 말해 줄게요.”
로비엔이 짧게 로잘린의 이마에 입술을 내리누른 후 돌아섰다.
사내의 질투에 휩싸인 채, 덩그러니 침실에 남게 된 로잘린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흥분하셨습니다.”
밀리언이 당장 선왕비의 궁으로 향하려는 로비엔의 걸음을 입구에서 막은 채 충언했다. 갑자기 중심을 잃은 그의 주인이 어색하다는 말투였다.
“알아.”
로비엔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감정들이 있었다. 로잘린을 향한 마음이 그랬고, 그의 부모를 향한 배신감이 그랬다.
다미안 래비어트를 향한 분노는 사실 단순한 질투가 아니었다. 그가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의 복합체기도 했다.
다미안 래비어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는 가정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부모가 다미안 래비어트를 여기까지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말이 달랐을 것이다. 다미안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감정을 여태까지 미련스럽게 끌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로 이 궁 안에서 평화를 깨부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