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78)화 (78/151)

# 78.

일주일간의 조문이 끝났다.

마침내 왕을 지상에서 완벽히 지우는 날이 되었다. 로잘린에게는 지루할 정도로 길었던 애도 기간이 끝난 셈이었다. 대관식을 위한 교황과의 물밑 협상은 진행 중이기는 했지만, 장례 미사만 치르면 왕의 장례는 완전히 마무리될 터였다.

로잘린은 긴 행렬과 함께 수도를 돌고 사원으로 들어온 왕의 관을 향해 섰다. 다른 이들 역시 왕의 관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왕의 관 바로 옆에 선 교주가 목을 골랐다. 이내, 애도문이 그의 입을 빌려 애통한 목소리로 튀어나왔다.

“모든 이들은 죽음 앞에 죄인입니다. 하지만 신께서 주신 생을 영원히 운용할 수 있는 자는 없지요. 앨런 3세는 그러한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을 타인의 삶을 위해 베풀었습니다. 귀족뿐 아니라 평민들의 권리 신장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노력했고…….”

평민을 우습게 보고, 죽이려고 하던 무정한 왕이었다고 써야 맞지 않을까.

로잘린은 들어오지 않는 애도문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왕비를 바라보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퉁퉁 부은 눈으로도 흘릴 눈물이 남았는지, 아직도 손수건에 눈물을 찍고 있었다.

물론 로잘린도 로비엔을 잃게 된다면 저토록 슬퍼하리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왕과 왕비는 데면데면한 사이였고, 왕이 레이첼 후작 부인만을 끼고 살았다는 것은 궁 안의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 그의 권력을 잃은 것이 슬퍼서라면 인정할 수 있겠지만, 그녀가 새로운 왕의 어미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다를 것도 없을 터였다.

“마침내 신실한 자녀 앨런 3세는 신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다른 가정은 오롯이 그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 믿을 수 없었다. 왕의 죽음을 애도하느라 흘리는 눈물이라고 하면 어쩐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자신 바로 곁에 서 있는 로비엔이 표하는 묵묵한 애도와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고자 합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로잘린이 가만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죽은 왕을 위해 기도했다.

로비엔을 만나게 해 준 것에 감사한다고. 하지만 당신과 나는 다시 없을 악연이니 다음 생에는 절대로 만나지 말자고. 만일 신의 안배로 다시 만난다면, 당신과 내 처지가 완벽하게 바뀐 상태였으면 좋겠다고.

악담과도 같은 기도를 마친 로잘린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왕의 영혼을 떠나보내기 위한다는 목적으로 열어 둔 창문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로잘린은 그 바람을 따라, 홀린 듯이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가을이라 마르고 건조하지만 새파란 하늘과 부드러운 공기. 만일 앨런 3세가 죽지 않아 건국제가 열렸더라면 거리는 무척이나 흥겨웠을 것이다. 왕국의 시작을 기념하며 춤을 추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풍요를 기원하는 건국제를 치르기에 아주 적합한 날씨였다.

“먼저 떠나. 궁의를 불러 상태를 살필 수 있도록 해라.”

장례 미사까지 끝나자, 왕의 관이 마침내 사원의 지하로 이동했다. 왕비는 이미 반쯤 혼절해 있던 상태라, 로비엔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실려 나갔다.

“로잘린.”

로잘린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로비엔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우리도 이제 돌아가야 해요.”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으며, 로잘린은 문득 짐작했다.

애도의 시간은 지났다. 죽은 자의 시간도 끝났다. 열린 문 너머로 새로운 왕, 로비엔을 향해 환호하는 목소리가 허공을 흔들었다.

하필이면 이런 좋은 날 선왕은 죽음의 강을 건넜지만, 죽음이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새로운 왕과 왕비시다!”

선왕의 죽음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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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한 일정이 끝났으니, 하룻밤의 휴가 정도는 로비엔에게도 허락되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로잘린이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다가오는 로비엔에게서 제법 좋은 냄새가 났다.

“머리끝이 아직 젖어 있어요.”

“곧 마를 겁니다.”

로잘린의 손끝이 아직 물기가 맺힌 그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늘 말끔한 모습으로만 움직이는 왕자님은 피로함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로잘린은 언젠가 그가 그랬듯이, 말없이 마른 천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눌러 물기를 빨아들였다.

“곤하시니 그냥 주무세요.”

본래는 다미안 래비어트를 만날 계획이었지만 오늘 밤은 그를 위한 휴가로 주고 싶었다. 어차피 이미 잡아 둔 다미안 래비어트와의 대화를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탓도 있었다.

겉으로 볼 때는 그가 무덤덤하게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고 왕으로서의 즉위를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테니까.

“폐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만 리만 후작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라나의 목소리였다.

뜻밖의 소식에 로잘린이 눈썹을 끌어 올렸다. 리만 후작 부인은 왕비가 클로티 부인을 로잘린에게 내준 이후, 베르타 궁의 시녀장을 맡은 자였다.

“내일 이른 시간에 오라고 하는 게 좋겠어요.”

“괜찮아요, 로잘린.”

로비엔이 괜찮다는 듯 로잘린을 다독였다. 그의 휴식을 준비하려던 입장에서는 몹시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으나, 당사자인 그가 괜찮다는데 불만을 가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들어오라고 해요.”

로잘린의 허가에 리만 후작 부인이 걸음을 들였다.

리만 후작 부인은 로비엔의 이전 약혼녀였던 마리안느의 어머니로, 로잘린과 유쾌한 관계이기는 어려운 사이였다. 로잘린은 마리안느가 얼핏 보이는 그 얼굴을 시큰둥하게 보다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두 분 폐하.”

리만 후작 부인이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며 사과했다.

“아시다시피, 예상치 못한 비극에 선왕비님의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전달하러 온 것은 아니리라 짐작합니다만.”

“궁인들 모두 기민하게 살피고는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오랫동안 친우이자 시녀장으로서 선왕비 폐하를 보좌해 왔던 클로티 부인의 역할을 해내기에는 역부족인 듯합니다.”

선왕비가 계속 클로티 부인을 찾기에, 잠시나마 만남을 청하고자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사실 죽으라고 등 떠밀었던 수족을 그리워한다는 건 로잘린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선왕비와 클로티 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아낼 좋은 기회기도 했다.

“최대 반나절. 허락하죠.”

“로잘린.”

“선왕비께서 불안해하신다잖아요. 모르는 척했다간 문제가 될지도 몰라요.”

로잘린의 시원스러운 허락에 리만 후작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몇 번이나 감사하다며 인사하는 리만 후작 부인에게 못마땅한 얼굴로 말을 덧붙인 건 로비엔이었다.

“내일 오전만 허용한다. 그녀는 죄인이니 감시할 근위병을 붙이는 조건이며, 그는 어느 곳에서든 클로티 부인과 동행해야 함을 명심해.”

리만 후작 부인에게는 안 될 것 없는 일이었다. 리만 후작 부인이 그러겠노라고 약조하고 서둘러 침실에 붙은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무어라고 얘기하기 전에, 로잘린은 조용히 로비엔의 손에 잔을 쥐여 주었다. 잔 안에서 주향이 짙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너무 피곤하면 오히려 잠이 오지 않는다더군요.”

“이 기분이면 주정뱅이가 될지도 모르는데.”

“오늘 하루는 허락해 드릴게요.”

로잘린은 아무렇지 않은 척 그에게 대꾸해 주었다. 로비엔은 한 번에 잔을 털어 버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미안 래비어트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다고 들었습니다만.”

“내일이요.”

당장 다미안 래비어트를 만나러 갈 것 같은 그의 태도에 로잘린이 어림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조건을 덧붙였다. 로비엔이 조금은 허탈한 듯 웃었다.

“비의 뜻대로 하지요. 하지만 왕이 아내에게 이렇게 잡혀 살다니, 면이 서지 않네요.”

“그래서 불만이신가요?”

“그럴 리가요.”

로비엔이 부드러운 손길로 맞은편에 앉아 있던 로잘린을 일으켜 세웠다. 얼결에 그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난 로잘린은 로비엔의 품에 끌어안긴 채 침대로 드러눕게 되었다. 두 몸이 푹신한 침대를 내리눌렀다.

“스쿠안에서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무어라 하던가요?”

예상대로 타국에서는 왕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서신만 도착했다. 다만, 조금 더 격을 갖춘 곳은 있었다. 스쿠안이 그랬다.

“소식을 늦게 접했다며, 깊이 조의를 표한다고 하더군요.”

몇 년 전, 공화정으로 전환되면서 왕이 사라진 나라. 하도 시끄럽고 사공이 많아 모두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왕정으로 복귀하리라 짐작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총리는 지금까지도 제법 건실하게 나라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감탄하는 바였다.

“나중에 공식적으로 방문해 양국의 우호 관계를 다지고 싶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다만 공화정과 왕정은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니 가까이 지낼 수 없는 나라라 생각했다. 그들 역시 그리 생각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스쿠안의 총리가 보내온 서신에 담긴 호의적인 감정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전하께서 공화주의자들을 혐오하지 않으신다면 나쁠 것이야 없지 않겠어요?”

동맹국을 두는 것은 나라의 안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다만, 이 경우 사회적인 가치가 다르다는 것이 애매할 따름이었다.

“사실 돌아오는 길에 왕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계속 생각했어요.”

“……어떻던가요?”

“예시가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로비엔이 로잘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대답했다. 독주를 한 번에 털어 넣은 여파가 오는 듯, 열이 오른 뜨끈한 입술이 목덜미를 더듬었다. 로비엔이 말을 할 때마다 목덜미가 간지러워, 로잘린이 자꾸 움찔거렸다.

“선왕께서 어떻게 했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했는데, 남은 기억은 사람의 밑바닥뿐이라.”

하지만 이내 그 움찔거림은 멎어 들었다. 그가 어떠한 성적인 의도를 가지고 접촉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서였다. 로잘린은 위로하듯이, 해안가의 부드러운 모래처럼 느껴지는 로비엔의 금발을 부드럽게 훑어 내렸다.

“자신은 없어요. 하지만 선왕처럼은, 절대로…….”

“폐하께선 쓸데없는 걸 걱정하시네요. 기억하세요?”

“무엇을?”

“보가트 상단만 제게 준다면, 제가 당신의 안위를 위해서 움직이겠다고 약조했잖아요.”

로잘린이 그의 얼굴을 붙잡고 뒤로 밀어 시선을 마주쳤다.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 그럴 작정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폐하께선 괜찮으실 거예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든든하네요.”

로비엔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 게 들렸다. 로잘린은 잠시 밀어냈던 그의 얼굴을 다시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조금 전까지 다미안 래비어트를 보러 가겠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던 주제에, 그는 삽시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로잘린은 그가 잠이 드는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보다가 따라서 눈을 감았다.

부디 내일만이라도 별 탈 없이, 그에게 온화한 하루가 지나가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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