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일단은 비께 말을 전해야 할 테니…….”
물론 로비엔은 여전히 로잘린에게 어떠한 마음의 짐이나 고민도 얹어 주고 싶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그의 품 안에서 안락하고 편안하게 쉬게 해 주고 싶었다. 그것이 그의 사랑이었고, 그간 로잘린이 그의 부모에게 시달리며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로비엔 본인의 의견일 뿐이었다. 당사자인 로잘린이 그와 연관된 일을 모르거나, 다 지나간 후에야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
“왕세자 전하, 비전하께서 드셨습니다.”
“안으로 모셔라.”
무슨 일이 있다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 찾아온 걸 보면, 농담으로라도 로잘린이 모르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로비엔이 다소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로잘린을 맞았다. 밀리언은 로잘린이 나타나자마자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었다.
“갑자기 뵙고 싶어서요.”
로잘린이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로비엔이 직전까지 앉아 있던 테이블 바로 앞에서 멈추어 섰다. 이미 그가 자리에 서서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그 이상 넘어갈 수 없었다.
“거짓말이 많이 능숙해졌군요.”
“티가 나는 걸 보니 아직도 미숙한 모양이에요.”
저런. 로잘린이 짧게 혀를 찼다. 어느새 바투 붙은 몸은 떨어지면 못 사는 연인처럼 보였다. 얼마 전까지 냉랭했던 분위기가 꿈결인 양.
“혹시 다른 얘기를 더 들을 수 있을까 해서 클로티 부인을 만나고 가는 길에 잠깐이라도 얼굴을 뵐까 했어요.”
로잘린이 손을 들어 로비엔의 가슴팍에 대고 그 위로 제 얼굴을 내리눌렀다. 그렇게 하면 그의 평온한 심장 박동이 잔잔하게 전해져, 제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게 좋아서였다.
“그냥 클로티 부인을 좀 만나고 왔어요. 혹시 다른 얘기를 더 들을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원하는 이야기는 들었습니까?”
질문을 하면서도 로비엔의 얼굴은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무던했다.
“……협박만 했어요.”
로잘린이 담담히 대답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협박을 운운하는 제 비를 보며, 로비엔이 입술만 끌어 올려 웃었다.
“그래도 협박과 겁박이 먹히는 상대니 다행이군요.”
로비엔이 중얼거리듯 내뱉는 말에 로잘린이 귀를 쫑긋 세웠다. 묘하게 흐리는 말투에서 그의 고민이 읽힌 탓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거죠?”
“…….”
“전하의 협박과 겁박이 먹히지 않는 상대가 있나요?”
로잘린이 가까이 대고 있던 몸을 조금 떨어트리며 물었다.
어차피 말하려던 사실이라, 로비엔은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대답해 주었다.
“보가트 가문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어요.”
“무슨 일로요?”
“레이첼 후작 부인에게 비소를 제공했을 만한 곳이라는 이유로.”
“아.”
로잘린이 작게 소리를 흘렸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시행령 이후 비소를 대량 구매한 곳은 보가트 상단과 래비어트 상단뿐이고, 피베체 공작은 레이첼 후작 부인과 보가트 상단의 모략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품 안에 안긴 온기가 어떠한 고민도 없이, 이처럼 다사롭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로비엔의 손끝이 굴곡지게 늘어진 로잘린의 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굳이 보가트 공작이 그런 일을 하려고 하진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하지만 의심을 사기엔 충분한 정황이네요.”
그는 의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으나 타인에게 의심을 살 만한 정황은 충분했다. 심지어 드마셸은 비소의 유통을 허락한 행정 제안 기구의 감시자로 있었다.
게다가 로잘린 역시 장부가 수상하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따로 보관해 두지 않았던가. 드마셸이 그처럼 명을 재촉하는 멍청한 인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미묘하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게다가 그 일을 발란이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더욱 불안해졌다.
“제가 아버지와 함께 자세히 확인해 볼게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라도 더 면밀하게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로잘린의 대답에 로비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기어코 로잘린이 이런 일을 신경 쓰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불편함과 미안함이 가라앉아 있었다.
“저를 믿으시는 거죠?”
“물론 믿어요.”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그녀를 의심하는 기색은 비치지 않았다.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떨어지는 대답 역시 명백한 신뢰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미안해하지 마세요.”
로잘린이 손을 뻗자, 로비엔이 그 손바닥에 기대는 어린 짐승처럼 얼굴을 비벼 왔다.
“덕분에 레이첼 후작 부인의 억울함 쪽을 더 믿고 싶어졌습니다.”
“어째서요?”
로비엔이 생각하기에 보가트 공작가는 결백했다. 그러나 고위 귀족 가문들은 보가트 공작가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유는 레이첼 후작 부인에게 비소를 제공했으리라는 것이었다.
“보가트 공작가를 음해하려는 자들이 그녀가 살아 있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하지만 레이첼 후작 부인에게는 왕을 해할 이유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용의자라는 것이 의심스러운 가운데, 보가트 공작가를 밀어내려는 이들은 레이첼 후작 부인이 죽기를 원하고 있었다.
물론, 진실로 그녀가 왕을 죽였다는 생각에 의심스러울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수상한 일이었다.
“일단 어디까지, 무엇을 원하는지 두고 보려고 해요.”
“전하께서 원하는 대로 하세요.”
그게 무엇이든 그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또렷했다. 로비엔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잘못된 것일 리도, 자신을 해칠 리도 없다는 생각에서 발로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그 분명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로비엔의 얼굴에는 해결되지 않은 미묘한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를 가늠하듯, 가느스름해진 눈이 직전까지 그가 앉아 있던 테이블 위를 바쁘게 움직였다.
“한데 저 편지 봉투는 무엇인가요?”
“아, 별일 아니에요. 저건…….”
“교황청의 문장인 것 같은데.”
로잘린이 내내 로비엔의 얼굴을 받치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몸을 휙 돌렸다. 로비엔이 로잘린의 손을 다시 붙잡으려다가 실패하면서, 동작에 실패한 그의 손만 의미 없이 허공에 붕 떴다.
“읽어 봐도 될까요?”
이미 손에 편지를 쥔 주제에 읽어도 되냐고 묻는 태도가 발칙했다. 그러나 제 비가 무엇을 해도 좋은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저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지금 시기에 교황청에서 온 것이면 대관식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 같은데.”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로잘린은 바스락거리며 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잠시간 교황의 멋스러운 필체와 문장을 곱씹던 로잘린이 미묘한 표정으로 로비엔을 돌아보았다.
“베르크령을 주면 대관식에서 왕관을 씌워 주겠단 건가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로비엔이 순순히 인정하자, 로잘린이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하여간 순 도둑놈…….”
그리고 늘 그랬듯, 쉽게 종교를 욕하려다가 멈칫했다. 어찌나 그의 눈치를 보는지 도로록, 눈을 굴리는 소리마저 날 것 같았다.
로비엔이 피식 웃었다. 자신을 책망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야 긴장을 풀었는지, 배시시 웃는 얼굴이 잘못을 저지르고 예쁜 짓을 하는 아이 같았다.
“평화롭게 살기가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네요.”
로잘린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는 것인데, 자신들에게만 인고의 열매인 것 같았다.
“베르크령을 넘기실 건가요?”
로잘린의 물음에 로비엔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결정된 건 없지만, 넘겨줄 생각은 아직 없어요.”
“대관식이 걸려 있잖아요.”
종교의 가르침은 오랜 시간을 거치며 부패하고, 변화의 바람 앞에서 약해졌다. 자연스럽게 교황청의 권위도 이전과 같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도록 누려 온 권리를 보존하기 위한 수작질은 여전했다. 오히려 이 정도면 이전보다 더 발전했다 할 수 있을지도.
“대관식은 늦어져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그는 왕이 될 터였다. 이미 교황이 씌워 주는 왕관의 권위가 이전 같지 않은 한, 반쪽짜리라는 오명을 쓸 일도 없었다.
“……정말로 상관없으세요?”
로비엔의 무던함을 의미심장하게 지켜보던 로잘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로비엔이 고민 없이 긍정했다.
“고귀한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계속 말해요.”
“이 조건은 불공평해요.”
조건을 재고 따지는 것은 거래의 기본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콧대 높게 구는 상대일수록, 강하게 짓눌러 제 조건에 맞추는 데에서 오는 희열이 더 강렬했다. 잊고 있던 즐거움을 떠올리는 로잘린의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그리 말할 줄 알았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바가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라는 듯, 로비엔은 재촉 없이 로잘린의 입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교황은 어차피 전하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주고 싶어 해요.”
로잘린의 손끝에서 교황이 보낸 편지 끄트머리가 바스락거리며 구겨졌다.
“신성함이라는 권위를 내세우면서, 구겨진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펼 수 있을 테니까.”
구긴 편지의 끝을 잡아 펴며, 로잘린이 제 머릿속 가설을 펼쳐 놓았다. 로비엔은 의미 없이 다시 펴진 종이의 끄트머리를 응시했다. 한번 구겨진 종이는 이전처럼 깔끔하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거래는 신성의 위엄을 보여 주는 일과 왕관을 받는 것으로 끝나야 하는데, 건방지게 부수적인 요청을 하려고 든다면…….”
로잘린이 씩 웃었다.
“이쪽에서도 협박하는 수밖에요.”
로비엔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설명을 덧붙여 주기를 원하는 얼굴이었다.
“아시잖아요. 교황이 왕관을 내려 줄 수 없는 나라도 있다는 걸.”
“아.”
로비엔이 작게 탄성을 흘렸다.
“그런데도 그 나라는 잘 굴러가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오히려 콧대를 높이고 협조를 요청하지 않는다. 교황청은 자신들이 협조 요청을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 그런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앞을 볼 수 없는 자가 아니라면 알 만한 일이었다.
“교황의 힘을 더 약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로비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로잘린이 하고자 한 말을 완벽하게 이해한 얼굴이었다.
“누구보다 정통성을 가진 당신이 그 틀에서 벗어나겠다고 하면, 더 난리가 날 테죠.”
사실 로잘린은 누구보다도 로비엔이 그러기를 바랐다. 그녀는 신을 믿지 않는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였다. 모두를 사랑하는 자애로운 신이 진실로 존재한다면, 벌어지지 않아야 할 추잡스러운 일들이 세상에 차고 넘치게 많았으니까.
하지만 어쨌거나 이 땅에는 신을 믿는 사람의 수가 믿지 않는 이들보다 많았고, 왕족에게 신성함은 떼어 놓을 수 없는 무엇이었다. 보여 주기 식이라고 하더라도 그랬다. 그러니 로비엔 역시 땅을 내줄 생각은 없어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교황이 참석하지 않는다면, 대관식이 아니라 즉위식을 치르겠노라 하세요.”
그렇다면 강제로라도 끌어오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