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교황의 편지는 곧 주교를 통해 로비엔에게 전해졌다.
칼로 편지를 뜯은 로비엔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교황이 심중에 품은 말이 무엇인지 읽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왕관을 씌워 줄 테니 협상을 하자…….”
그가 원하는 것을 준다면, 그 대가로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 주겠다는 적나라한 속내였다. 아마도 원하는 것은 높은 확률로 와인의 산지인 베르크령.
가만히 듣고 있던 밀리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관식을 걸고 협상을 하자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흔한 일이기도 하지.”
로비엔이 짧게 혀를 찼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교황청에 호의적이지 않은 이들이 왕위를 승계받을 때 분탕을 치고, 뜯어낼 목적으로 하는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와 비교하여 교황청의 입지가 작아진 터라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설마 협상에 나설 생각이십니까?”
“글쎄.”
로비엔이 확신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실 교황으로부터 굳이 왕관을 받지 않아도 로비엔은 자동으로 왕위를 승계받아 왕이 될 수 있었다. 그가 왕이 되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의심치 않는 사실이었으므로. 다만, 추후 잡음이 일 것을 고려해야 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신이 반대하는 왕이라는 오명이었다. 자연재해나 기근으로 나라가 신음하는 때에는 왕실이 그 책임을 피해 갈 수 없었으므로. 왕족들이 달갑지 않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교황과의 협상에 임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베르크령에서 나는 와인은 칼라브리아의 특산품이라는 건 차치하더라도, 거주하고 있는 이들까지 교황청의 권한 아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베르크령은 왕의 직속령으로, 혹여나 교황청에 넘겨주게 되더라도 싸워야 할 영주는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신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대가로 땅을 통째로 갖다 바치는 일은 어떻게 생각해도 불공평했다. 이미 종교라는 존재가 뒤집어쓴 오명과 교황이 시시때때로 부려 온 탐욕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가장 쉬운 방법이기는 하겠지.”
“…….”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생각은 없어.”
로비엔은 그 누구보다 왕위를 이어받는 데 정통성을 가진 자였다. 왕의 적장자이며 왕세자였다. 교황이 그에게 왕관을 핑계로 땅을 내놓으라 강압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교황이 왕관을 씌워 주지 않는다고 왕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니, 대관식이 급할 일도 아니고.”
그러니 몸을 낮추고 길 필요는 없었다.
로비엔이 성의 없는 손길로 테이블 위에 교황으로부터 온 서신을 던졌다. 뭐가 되었든, 자꾸만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일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급한 건 그쪽이 아니라 선왕의 시해범을 찾아내는 일이야. 비의 가문에 대한 의심과 모해도 엮여 있으니까.”
다만 확실한 건, 우선순위가 교황과의 협상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눈을 감고 한 손으로 짚은 머릿속에는 여전히 카를로스 백작이 떠들어 댄 이야기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해당 시행령이 떨어지자마자 비소를 구매한 것은 보가트 상단과 래비어트 상단뿐입니다.’
곧 칼라브리아의 주인이 될 로비엔에게는 여전히 그 무엇도 선명하지 않은, 선왕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사실대로 밝힐 의무가 있었다.
‘……그들을 의심하는군.’
‘궁의들이 만장일치로 음독으로 인한 사망을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그럴 만한 재료는 비소뿐이지요.’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 시행령이 내려지자마자 선왕께서 급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보가트 상단과 래비어트 상단은 그 행정 제안 기구에 참석하는 자들이지요.’
특히 최근 리만 후작과 카를로스 백작, 그리고 피베체 공작과의 대화는 선왕의 시해 사유를 밝히는 데에 집중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피베체 공작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가 나서지 않아도 다른 이들이 그의 의견을 대신 주장해 줄 것을 믿는 것처럼.
그런 그의 태도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리부터 비소를 대량으로 구매하고 활용할 준비를 했던 자들은 그들뿐입니다.’
‘그들이 레이첼 후작 부인과 몰래 소통했다는 증거는?’
‘그것은…….’
‘가만히 있어도 왕의 장인이 될 보가트 공작이 이 일에 관여할 이유는?’
로비엔의 물음에 리만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조금 더 빨리 왕의 장인이 되어 더 큰 권력을 누리고 싶었을지도 모르지요.’
내내 입을 다물고 무언으로 그를 압박하고 있던 피베체 공작이 입을 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가느스름하게 눈을 뜬 로비엔의 시선이 그의 외삼촌인 피베체 공작에게로 향했다. 평소와 같은 피베체 공작에게서 미묘하게 느껴지는 차이는 바로 그의 시선이었다. 로비엔은 자신을 응시할 때마다 어딘가 낯선 온도가 감도는 눈동자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졸부와 다름없는 집안입니다. 더 빨리, 더 큰 권세를 누리고 싶었을지도 모르지요.’
‘공은 특히 보가트 가문이 의심스러운 모양이야.’
‘가능성이 있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말씀을 드린 것뿐입니다.’
노쇠한 척, 처음부터 끝까지 상황을 찬찬히 살펴보는 척, 피베체 공작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하나뿐인 비의 집안이니 굽어살피고 싶으실 테지만, 조금 더 객관적으로 살펴보심이 어떻습니까?’
‘…….’
‘왕비께서 얼마나 원통하시겠습니까.’
피베체 공작의 중얼거림에 카를로스 백작과 리만 후작이 고개를 주억였다.
피베체 공작은 그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고작 계집을 감싸느라 남편을 잃은 제 어미의 상처에도, 제 아비의 죽음에도 관심이 없는 냉혈한이라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사람이라, 문득 그럴듯한 의심이 파고들었다.
나는 정말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눈이 멀어 사실을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
‘전하, 밀리언입니다.’
그때 밀리언이 들어와 대화와 끔찍한 고민의 고리를 끊었다.
‘대화를 방해하여 죄송합니다, 전하. 급한 소식이라…….’
‘말씀하시게.’
피베체 공작이 느긋하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밀리언이 들고 온 소식을 재촉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의식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직후, 수염을 쓰다듬던 그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로비엔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피베체 공작의 표정은 아주 미묘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 순간, 로비엔의 마음속에 확신이 하나 섰다.
아니, 이것은 내가 사랑에 눈이 먼 탓이 아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살아난 것이 이들에게는 불쾌한 일로 보인다. 하지만 사실 그녀가 진실로 선왕을 시해한 범인이라면, 후에 그 목이 달아날 것이니 언제 죽여도 아쉬울 것 없는 일이어야 맞지 않은가.
‘신체적 이상은?’
‘구역질을 지속하는데, 아무래도 섭취한 것이 없다 보니 헛구역질만 하고 있다 합니다.’
‘대화를 나눌 상태는 되나?’
로비엔의 질문에 밀리언이 다소 고심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적어도 고개를 젓거나 끄덕일 정도는 됩니다.’
‘그대들에겐 미안하지만, 조사를 위해 자리를 비워야겠어.’
밀리언의 대답을 듣자마자 로비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명분이 분명한 그의 움직임을 붙잡을 수 없는 이들은 그저 수긍할 따름이었다.
‘나 역시 아들로서, 선왕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껴.’
‘…….’
‘죽음의 사유도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고 믿으며, 해결을 위해 내 방식대로 노력한다고 약속하지. 의심과 소문 따위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로비엔은 그 이상의 말을 덧붙이는 대신, 로잘린에게 칼을 겨눈 자들에게 경고했다.
‘그러니 그대들 역시 보가트 공작가를 의심한다면 합당한 증거를 가져와.’
물론, 왕은 늦은 밤 레이첼 후작 부인과 시간을 보내던 중 음독으로 사망했다. 누가 보아도 레이첼 후작 부인이 범인임이 확실했지만, 도리어 그 명확함이 손톱 옆에 일어난 거스러미처럼 거슬렸다. 피베체 공작과 카를로스 백작, 리만 후작의 몰아세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이유로 목숨은 붙여 두고 취조해 볼 셈이었는데 레이첼 후작 부인은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종종 의식이 돌아오긴 했지만, 기운이 없어 다시 의식을 잃기를 반복했다. 죽기 직전, 간신히 숨만 붙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드디어, 레이첼 후작 부인이 눈을 떴다고 했다.
‘안내해.’
로비엔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명령하자, 문 앞을 지키던 시종이 기민하게 문을 열었다.
로비엔은 밀리언의 뒤를 따라 레이첼 후작 부인을 만나러 가는 내내 생각을 지속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단독으로 계획한 범행이라면 그 목을 베면 끝일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직감은 계속해서 그것일 리 없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만일 그녀의 소행이 아니라면, 레이첼 후작 부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을 주동한 자, 가담한 자, 그리고 그 목적은 무엇인가?
불분명한 대상과 목적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뒤섞였다.
‘이곳입니다.’
‘열어.’
로비엔의 명에,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문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열렸다. 선왕의 정부인 레이첼 후작 부인의 그 어떤 흔적도 치우지 않은 공간 내에 초췌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기운 없이 늘어진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랜 시간 쓰러져 아무것도 못 하던 여자의 모습이 지저분하고 엉망이라기보다는 비련해 보였다. 왕이 스무 해를 넘도록 정부로 끼고 살았던 것은 저 사람 잡는 미색 탓이었을까.
로비엔은 누구의 접근도 불허한 채 홀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레이첼 후작 부인은 낭창낭창 흔들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앉았다.
‘왕세자 전하를 뵙…….’
‘그대의 뒷배였던 왕은 이미 죽고 없다.’
다짜고짜 떨어진 로비엔의 통보에 레이첼 후작 부인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눈동자로 입술을 달싹였다. 물론 그녀는 그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저 양쪽 볼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만이 무엇인지 모를 그녀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순히 슬픔도, 단순히 절망도 아닌 무엇.
‘내가 여기에 온 건 내가 왕이 될 거라는 사실이나 알리자고 온 게 아니야.’
‘…….’
‘그대는 국왕 시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다.’
그는 그 감정을 관조하며 담담하게 선고했다.
‘그대가 왕을 시해했나?’
‘아닙, 아닙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다급히 대답했다. 며칠이나 사경을 헤매고, 음식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스러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제법 가긍했다.
‘저는, 결코…….’
‘…….’
‘궁 안팎으로, 저를 경멸하는 자들이 넘쳐납니다. 한데 제가 왜, 유일한 제 편을…….’
그러나 말을 내뱉기도 어려운 듯, 말이 뚝뚝 끊겼다.
‘그럴듯한 증거를 대. 그렇지 않으면 용의자는 그대뿐이다.’
‘저는, 국왕 폐하의 사용인이 올린 차를, 마셨을 뿐…….’
가슴팍을 부여잡고 신음하며 간신히 대답하던 작은 몸이 결국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로비엔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돌아섰다.
레이첼 후작 부인의 말이 맞다. 그녀에게는 왕을 해칠 그 어떠한 사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레이첼 후작 부인은 왕의 죽음으로 권력의 기반을 잃는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슬프게도 레이첼 후작 부인이 왕을 죽인 사유는 갖다 붙이기 나름인 데 반해, 그렇지 않다는 어떤 증거도 존재하지 않았다.
‘밀리언.’
‘예, 폐하.’
‘레이첼 후작 부인이 정신을 차리거든 기운을 차릴 만한 음식과 물을 내줘. 그리고 외부인이 이 공간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켜라.’
문을 열고 나서며 로비엔이 명령했다. 죄인을 대접한다며 또 다른 난리가 날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명줄을 붙여.’
그녀는 확신범 취급을 받았지만 동시에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증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대화 몇 마디도 나누어 보기 전에 죽어 버릴지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어떤 형태로든 선왕을 시해한 자들의 목적에 이득이 될 것이다.
로비엔이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결코 그와 같은 일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