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75)화 (75/151)

# 75.

3왕자였던 앨런과 만났을 때 그녀는 고작 열여섯이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통속 소설 속 만남처럼 그가 길거리에서 위기에 처한 그녀를 구해 주었다.

그 당시 그녀는 왕세자와 암묵적인 약혼 관계에 있었으나, 제게 접근해 온 앨런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왕세자를 배반하고, 등 뒤로 그와 손을 맞잡으며 짜릿함을 즐겼다. 운명적인 만남이며,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스운 소리였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왕비가 된 줄리 피베체는 열여섯의 줄리 피베체를 신랄하게 비웃었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왕의 사랑은 어떠한 상처도 입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고통을 감내하도록 했던 것은 어떻게 보아도 사랑일 수 없었다.

하지만 열여섯의 줄리 피베체는 어리석게도 그 사실을 몰랐다. 사랑이란 것은 통속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매력적이고, 폭풍처럼 강렬하며, 향료처럼 자극적인 것으로만 생각했다. 소설의 결말처럼, 고통과 역경을 이겨 내고 나면 그 열매가 달콤하리라 믿었다.

과거에 통속 소설에 몰두한 자신을 꾸짖던 아버지, 전대의 피베체 공작의 혜안에 손뼉이라도 쳐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다. 따귀를 갈기든, 굶기든, 멍청한 짓은 하지 못하게 막았어야지. 왜 온화하게도 말로만 청개구리 같은 딸아이를 다루었단 말인가.

“이제 와서 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왕비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과거와 후회들은 지금에 와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왕이 죽었다는 기쁨에만 도취되어도 모자란 일이었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은 무섭도록 무표정했다. 도저히 직전까지 웃음을 숨길 수 없어 이불에 얼굴을 묻고 키득거렸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우습게 생각하던 계집의 손에 죽은 기분이 어떠세요, 폐하?”

흘러내린 머리를 대충 한쪽 어깨로 넘겨 수습하는 왕비의 시선이 벽에 걸린 왕과 자신의 초상화로 향했다. 그림 속 길쭉한 소파에 앉은 왕과 왕비는 조금의 접촉도 없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딱 그만한 관계였다.

사람 좋은 척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가증스러운 얼굴과 시선이 마주치자 타오르는 불길처럼 증오와 경멸이 치밀었다. 그것이 자신의 침실에 왕과 함께 있는 그림을 걸어 둔 이유였다.

저 사내가 자신을 기만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단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되기에. 그 얼굴을 보며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은 이 감정을 영원히 잊지 않도록.

그런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저를 기만한 사내에게 죽음이라는 마땅한 앙갚음을 해 주었다. 그의 하나뿐인 사랑의 목숨도 경각을 다투도록 만들었다.

물론 왕의 영혼이 허공을 떠돌며 그녀가 하는 일을 방해하려고 할지도 모르지만, 형체도 없는 것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억울하단 소리는 마세요.”

원래 양심이야 없던 사내니 그리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결코 억울하다고 생각해선 안 될 일이었다.

게다가 그를 무대 위로 세우는 신호가 있지 않았나.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모두 그의 죄였다. 왕비에게 눈치채지 못하는 것도 죄라고 가르친 것이 바로 왕이었다.

‘그 녀석이 어찌 내게 그럴 수 있느냔 말이야!’

이미 죽어 버린 왕은 당연히 모르겠지만, 자신 앞에서 로비엔을 향한 분노를 터뜨리던 날이 시작이었다. 바로 그날이 왕비가 마침내 왕을 단죄의 무대에 세우기로 한 날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화가 나셨어요.’

왕비가 사근사근 왕을 달래자, 그가 씩씩거리며 로비엔과 있었던 일을 순순히 털어놓았다. 로잘린을 해치려 한 왕의 계획을 알아차린 로비엔이 대놓고 그에게 분노를 터뜨렸다는 것이다.

‘그 아이, 원래 제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약하잖아요. 너무 화내지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제 아비에게 그런 태도를 보일 수가 있어? 내가 저를 어찌 키웠는데!’

왕은 로비엔을 그저 품에 끼고 오냐오냐했다. 어여쁜 자식이라 내보이고 자랑하기 바빴다. 로비엔이 지금의 로비엔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그 아이는 유모인 클로티 부인에게만 맡겨 놔도 홀로 알아서 잘 자랐다.

왕비는 왕과 대화하는 동안 심드렁한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왕가와 대치되더라도 그 계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겠다더군.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말에 관심 없다는 표정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때는 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드디어 기다려 마지않던 순간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진실로 마음에 둔 모양이네요.’

처음에는 로비엔에게 어울리는 짝이 아니라며 기함했지만, 이제 왕비는 로잘린이 좋은 패라는 것을 인정했다.

원하기도 전에 원하는 것을 가졌기에, 로비엔은 어떤 것에도 무감한 것처럼 보였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여인도 매한가지였다. 제가 원하기도 전에, 제 얼굴과 지위를 보고 달려드는 비슷한 것들이 사방에 널렸으니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가엾기는 하지만, 마리안느가 그처럼 홀대받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한데 로잘린이 나타났다. 그 어떤 계집과도 다른 모양으로. 그리고 완전히 로비엔의 코를 꿰어 버렸다.

‘두 분께 왕족 시해 혐의를 묻겠습니다. 죽은 아이 역시 왕족이었으니, 마땅한 죄목이지 않습니까?’

덕분에 왕이 왕비와의 사이에서 가진 것 중 유일하게 사랑하는 로비엔이 아비를 버리고, 제가 받은 사랑으로부터 되돌아서는 때가 왔다. 이 궁 안에서 유일하게 제 아비를 사랑하는 로비엔이 그를 외면하여,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의미가 없는 왕이 애도 하나 받지 못하고 죽을 때이기도 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왕비가 창가에 섰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달빛이 창문을 통과해 바닥으로 길게 늘어졌다. 왕비는 달빛을 따라 그녀의 죄악처럼 늘어진 그림자를 무감하게 응시했다.

사실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후회할 만큼 멍청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전 당신과 달리, 했던 약속은 모두 지킬 거예요, 폐하. 아니, 앨런.”

머리통을 기댄 창문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웠다.

“그게 당신을 죽어서도 더 불행하게 할 테니까.”

그러나 데면데면한 부부처럼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왕과 자신의 초상화를 지켜보는 왕비의 시선은 그보다 더 싸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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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은 아주 빠른 속도로 칼라브리아 국왕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대륙 내에 뻗친 종교의 힘이 약해지면서 그 세력이 작아지기는 했지만, 칼라브리아 내에 포진한 인맥은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신실하며 의미 있는 신자들이 사회의 최상위층에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랬다.

때문에, 교황은 왕이 죽은 날 새벽에 그의 죽음에 관한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칼라브리아의 왕이 죽었으니, 새로운 왕의 대관식에 참석하여 신의 이름으로 왕관을 전달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해 달라는 대로 해 주기는 영 아쉽단 말이지…….”

물론, 교황 역시 대관식에 참석하여 왕관을 넘겨주는 명예를 재차 갖게 된 것이 달가웠다. 지난 몇십 년간 이어진 성전(聖戰)의 실패, 종파의 갈라짐을 이유로 교황의 힘은 약해졌다. 불신자들이 늘어나면서 종교세에 반발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그에게도 자신이 여전히 신의 뜻을 전달하는 신의 대리자라는 명목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왕으로 즉위하는 로비엔에게도 자신을 드높일 영예가 필요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신으로부터 수여받는 왕관은 그의 위엄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대단한 것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로비엔은 왕관을 받기에 누구보다 정당한 자였다. 만일 교황이 반대한다면 오히려 그에 대한 반발이 돌아올 터였다. 다만 작은 이익 정도는 있으면 할 뿐이었다.

“아직 젊어 잘 모르는 듯하니…….”

교황이 두툼한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도도독, 두드렸다. 잔에 채워 놓고 입도 대지 않은 포도주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도리를 좀 일러 줄까.”

교황이 손을 뻗어 잔을 들었다. 입술을 축이고 넘어가는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었다. 교황령과 인접한 땅이지만, 칼라브리아 내에서 나는 와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땅을 얻고 싶었던 찰나였다. 그 땅에서 나는 고품질의 와인을 독점하고, 병에 교황청의 문장을 새겨 판다면 그럴듯한 수익 역시 벌어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를 만큼 속이 든든해졌다.

“밖에 누구 있느냐?”

교황이 호출종을 흔들자, 문밖에서 대기하던 하인 하나가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칼라브리아의 왕에게 서신을 보낼 수 있도록 종이와 펜을 가져오너라.”

하인이 곧 명령을 수행했다.

교황은 늘 그랬듯, 종이 위에 신의 뜻을 빌려 그가 말하고 싶은 문장을 써 내려갔다.

<신의 자녀, 칼라브리아의 왕세자 로비엔 피베체 르 칼라브리아에게.

지난 새벽, 불행히도 이 손으로 신께서 내린 왕관을 씌워 주었던 칼라브리아의 국왕 앨런 3세가 신의 품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친이자 든든한 주군을 잃은 그대의 슬픔을 감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하나 그대는 칼라브리아의 주인이 될 몸이니 한갓 슬픔에 잠겨 우울해하기만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책임으로 막막하다면, 베르크산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긴장을 녹인 후에, 주변을 크게 둘러보고 움직이는 편이 좋겠습니다. 맛과 향이 다른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좋아, 몸과 마음을 이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다만, 그렇듯 슬픔과 긴장을 내려놓더라도 한 가지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때에도 칼라브리아에는 새 어버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왕가의 자손으로 태어난 책임과 의무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테지요.

만일 그 과정에서 신의 종이 가진 손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요청하십시오. 미천하나마 힘이 되어 드릴 것이니.

깊은 애도와 함께, 교황 프란시스 14세로부터.>

굽이굽이 돌려 말했지만 실제 내용은, 와인의 특산지인 베르크 지역을 교황청에 바친다면 즉시 왕관을 머리 위에 씌워 주겠다는 뜻이었다.

“이것을 칼라브리아 수도의 주교에게 보내도록 해라. 그가 왕에게 서신을 전달할 테니.”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아, 주교에게는 꼭 내가 무척이나 슬퍼했노라고 왕에게 전하라고 덧붙이고.”

교황이 실링까지 마친 편지를 하인에게 내밀었다.

하인이 두 손에 공손하게 편지를 받아 들고 고개를 주억였다. 교황이 어디까지 관여하고, 어떠한 수작을 부리는지 알기에는 아직 어리고 순진한 소년이었다.

교황은 대충 손짓하여 하인을 몰아내고, 예배당으로 몸을 돌렸다. 예배당의 가장 앞, 그가 모시는 신상(神像)이 위엄있게 몸을 세우고 있었다.

과연 신께서는 나를 부덕하다 하실 것인가?

하지만 교황은 자신이 탐욕을 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가 줄어든 교황청을 다시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한 돈이 필요했다. 교리를 더 널리, 더 많은 사람에게 설파하는 것이 어디 어지간한 방법으로 되는 일인가. 그러니 자신은 교황으로서, 그 돈을 마련할 만한 마땅한 방법을 찾고 있을 뿐이었다.

신상이 헛된 욕심을 부리는 그를 질책하듯, 엄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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