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74)화 (74/151)

# 74.

왕의 죽음으로 궁 안팎이 온통 어수선했다. 로비엔과 헤어진 로잘린은 침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와 저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궁인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걸었다.

“클로티 부인을 만나러 가시는 건가요?”

곁을 따르던 마리가 물었다.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나에게는 아직 드러낼 수 없는 일이 많아, 동행하지 않았다.

“할 말이 있어서.”

죽이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생각났다. 최악의 순간에도 살아남을 방법을 아는 자라면, 죽이는 것보다야 그자가 아는 것을 캐내어 제 것으로 만드는 편이 좋지 않은가.

검은 드레스 자락을 추스르며 도착한 동편 감옥 안은 여전히 어떠한 소식도 전해지지 않은 듯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감옥의 가장 안쪽, 초췌해진 낯빛으로 벽에 기대앉은 클로티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근래 음식을 들이기는 했지만 제대로 먹지 못한다더니, 살이 내린 모양이었다. 적잖은 나이기도 하니, 정신적인 충격과 겹친 여파라 생각하면 그럴 법도 했다.

로잘린이 클로티 부인이 가르친 대로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허름한 칸 앞에 섰다. 인기척을 느낀 클로티 부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검은 구두부터 검은 레이스가 달린 모자까지 길게 움직이던 시선은, 완벽한 그녀의 학생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멈추었다.

“라비앵 클로티.”

“…….”

“충성의 대가가 이거라니, 굉장하지?”

로잘린이 비웃듯 중얼거렸다.

클로티 부인이 모멸감에 몸을 작게 떨었다. 로잘린이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그건 클로티 부인 자신이 가장 처절하게 느끼는 바였다.

“오늘 내가 여기 온 건 그대에게 거래를 청하기 위해서야.”

그 꼴에서 벗어나게 해 줄게, 마치 그처럼 들리는 달콤한 말에 클로티 부인이 홀린 듯이 창살 가까이 몸을 기울여 앉았다.

“이대로라면 당신은 곧 죽어.”

“…….”

“왕께서 서거하셨거든. 곧 왕세자 전하께서 왕이 되실 거고, 나는 왕비가 될 거야.”

아직 감옥까지는 전달되지 않은 소식이었다. 사실 죄인에게 알려 줄 이유가 없는 소식이기도 했다.

클로티 부인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를 투옥시킨 자들이 이 왕국 최고의 권력자가 된다니! 없는 죄목 따위를 만들어 자신의 모가지를 치는 일이 더욱 쉬워지게 될 것이다. 창살을 움켜쥔 클로티 부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로잘린의 날카로운 시선이 창살을 붙잡은 채 떨리는 손끝을 훑고 떨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왕비께서는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니,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겠더란 말이지. 나는 다시 아이를 잃게 되는 건 사양이거든.”

로잘린이 과장되게 슬픈 얼굴을 했다. 아이를 잃는다는 부분에서는 클로티 부인 역시 죄책감으로 움찔 몸을 떨기도 했다.

“그러니 내가 무어라도 쥐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

“그대의 가문과 목숨, 구명해 줄게. 사실대로 말해 주기만 하면 돼.”

“…….”

“당신이 한 일, 당신이 아는 것, 당신이 알게 될 것까지 전부.”

시라도 외는 듯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선명하게 들렸다. 클로티 부인이 꿀꺽, 목구멍 너머로 침을 삼켰다.

“제가 당신을 어찌 믿습니까?”

돌아온 대답은 얼핏 듣기에는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들개처럼 저를 경계하면서 노려보는 클로티 부인의 눈동자를 응시하던 로잘린이 작게 웃었다.

“각서라도 써 주면 되겠어?”

“각서…….”

클로티 부인이 로잘린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두 장을 써서 서명하고, 각자 하나씩 나누어 갖는 거지. 둘 다 그 서명의 힘에 묶여 배신 따위는 상상할 수도 없게 말이야.”

상단에서 일할 때나 써먹었던 것이지만, 구두 약속과 불안정함에는 이미 질려 버렸을 그녀의 마음에 확신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로잘린이 내건 조건에 클로티 부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왕은 죽었고, 왕비는 그녀를 버렸다. 어차피 곧 로비엔과 로잘린이 그녀를 죽일 거라고 생각한 왕비는 이제 와 구해 줄 의향 같은 건 없을 터였다. 자진하라고 권유하듯 명령했지만 자진하지 않은 그녀를 오히려 괘씸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각서를 먼저 주세요. 그 후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충성심 같은 것, 이미 배신당해 감옥 구석에 처박힌 자가 찾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또렷한 클로티 부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로잘린이 작게 웃었다.

“좋아.”

그녀가 제 편이 되리란 생각도 없고, 제 편으로 둘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서 적당한 이득을 취하는 관계에 있어서 이만한 사람과 조건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나중에 마리를 통해 서명된 각서를 보낼게. 그대 역시 서명한 각서를 내게 주면 우리가 오늘 한 거래가 효력을 갖는 거야.”

클로티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잘린은 제법 흡족하게 이루어진 거래가 만족스러운 듯 돌아섰다. 계단을 올라 감옥 밖으로 나서자,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빛을 낯설게 받아들였다. 이곳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익숙해져야 할 일이었다.

“다미안 래비어트는 정신을 차렸니?”

“아직도 종종 헛소리를 하기는 하지만 많이 좋아졌어요.”

마리가 옆으로 바짝 붙으며 대답했다.

자신의 궁으로 향하며, 로잘린은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로비엔의 말대로 생포된 다미안 래비어트는 총에 맞은 사냥감처럼 자루에 실려 궁으로 들어왔다. 오피움을 얼마나 대책 없이 들이마신 건지, 온몸은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대화는 당연히 어려웠다. 상대가 무슨 소리를 하는 지조차도 제대로 알아먹지를 못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오피움이 섞여 있던 액체를 반쯤은 토해 냈다는 점이었다. 단박에 중독 증세를 보이면서 숨이 넘어갈 정도의 치사량은 아니었기에 살아남았다.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대화해 볼 수 있게 자리를 준비해 주렴.”

이후에 정신을 좀 차리면 이야기를 해 보려고 했는데, 로비엔과 대화를 해 볼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 그나마 대부분이 마무리되었고 다미안 래비어트도 정신을 차렸으니 이야기는 해 볼 수 있겠지.

그녀를 없애고 싶어 했다던 왕이 죽고 나자, 모든 일이 제 궤도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외줄 위의 평화인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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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달빛이 방 안으로 길게 늘어지자, 왕비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제 주인이 슬픔에 잠겨 요란법석을 피우다가 간신히 잠이 든 만큼, 아랫것들은 알아서 몸을 숙이고 소리를 낮추었다. 그녀의 궁 자체가 오롯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침대 위에 곱게 뉘어 있던 몸을 일으켜 앉은 왕비가 손으로 얼굴을 가려 작게 하품을 했다. 며칠 내내 울고불고, 실신하기를 반복했더니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했다.

왕비가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슬리퍼를 꿰어 신고 침실의 문을 열어젖히자, 그녀의 침실 앞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흠칫했다. 마치 한밤중에 궁을 떠도는 귀신같은 모양새였다.

“폐하, 어찌하여 나와 계십니까.”

정신적, 신체적으로 불안한 왕비를 살핀다는 명목으로 궁에 머무르고 있던 리만 후작 부인이 황급히 다가와 왕비를 붙들었다.

“클로티, 클로티 부인은 어디에 있지?”

“……예?”

뜻밖의 질문에 리만 후작 부인이 당황한 얼굴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마음이 불안하고 어수선하니 클로티 부인이 보고 싶어.”

그녀는 단순히 시녀장이 아니라 왕비의 친우였다. 그 사실은 궁 안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리만 후작 부인이 안타까운 얼굴로 왕비를 바라보았다.

“클로티 부인은 여전히 갇혀 있지 않습니까, 폐하…….”

리만 후작 부인의 대답에 왕비가 침울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울어 놓고도 모자랐는지, 속눈썹 끝이 눈물을 방울방울 매달고 있었다. 안타까운 왕비의 모습은 주변의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애처롭게 했다.

“제가 왕세자 내외를 한번 찾아뵙고 잠시나마 클로티 부인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을 드리겠습니다.”

결국, 모질지 못한 리만 후작 부인이 왕비가 원하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정말? 그대가 그리해 줄 테야?”

왕비가 반색하며 리만 후작 부인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럼요.”

리만 후작 부인이 선선히 대답하자 왕비가 환하게 웃었다. 리만 후작 부인은 그제야 다소 안도한 얼굴로 왕비를 다시 침실로 밀어 넣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으셨으니 좀 더 쉬셔야 해요.”

왕비는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침대에 다시 누웠다.

다시 고요해진 방 안, 왕비는 리만 후작 부인의 걸음이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아마 로잘린은 자신에게서 버림받은 클로티 부인에게 재차 접촉할 것이다. 네가 아는 바를 말해 준다면 구명해 주겠다고 약속하겠지.

클로티 부인이 자진하지 않은 것은 생각 외의 일이었지만, 사실 크게 상관은 없었다. 로잘린과 거래를 하지 않도록 먼저 그녀를 그 철창 안에서 꺼내어 주면 된다. 제 가문과 목숨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가 없다면, 클로티 부인이 굳이 로잘린의 거래에 응할 필요가 없으니까.

“……흐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조금 귀찮아지기는 하겠지. 복잡하게 생각하느니 지금 죽이는 편이 나을까?

잠시 생각했으나, 그것조차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금세 접었다. 로비엔은 클로티 부인에게 들이는 식사 하나하나를 검사하도록 했고, 그녀를 지키는 이들의 수를 생각하면 사람을 보내 그녀를 죽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역시 알아서 죽어 버렸다면 편했을 텐데.

심드렁한 얼굴로 왕비가 몸을 모로 뉘었다. 동시에 생각의 방향이 바뀌었다.

왕이 죽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그녀를 왕비로 만들어 준 것 말고는 단 하나도 쓸모없던 그녀의 남편이 죽었다.

“…….”

이제 그녀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고 있었다. 만일 누군가 그녀를 발견했다면 슬픔에 너무 잠겨 버린 나머지 미친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왕비는 멀쩡했다. 그저 소리 내어 웃고 싶었다.

그것은 오롯한 기쁨이었다.

왕과 왕비는 그리 아름답던 관계도 아니었고, 동행으로 발맞추어 걷던 사이도 아니었다. 늘 세 번째 바퀴처럼 레이첼 후작 부인을 단 채, 삐거덕거리고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온 것은 오로지 왕비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늘 자신에게 관대하게 대해 준다는 듯 웃고 있던 낯짝이 얼마나 끔찍했던지.

속도 모르는 주제에, 그녀가 내놓은 계책을 흡족해하던 건 제법 우스웠다.

‘그 후에 방어하기에 급급할 보가트 가문은 역모로 몰아 무너트리면 될 일입니다.’

보가트 가문을 역당으로 몰아가기 위해서는 왕의 죽음이 필연적으로 필요했다. 역모를 언급했던 속뜻도 모르는 주제에, 계획이 마음에 든다며 동조하던 왕의 얼굴을 떠올리자 결국 왕비는 키득거리는 웃음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왕비는 이불에 얼굴을 묻고 웃었다.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흐를 만큼 기뻤다.

왕이 죽었다.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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