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로비엔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도 알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수사 과정에서 하나씩 드러날 겁니다. 일단은 후작저의 사용인들에게 레이첼 후작 부인이 평소에 어땠는지, 이상한 말을 한 적은 없는지 등을 알아보고 오도록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 밝혀지는 것들이 있다. 아마 이번 일도 그런 것이리라고 짐작했다.
“일단은 장례를 먼저 치를 예정이에요. 이미 음독사했다는 사실은 밝혀졌고, 시신을 계속 붙들어 놓고 있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니까.”
“…….”
“내일부터 일주일간 조문을 받고 난 후, 장례 미사를 지내고 왕실 사원에 시신을 안치할 거예요.”
인접국에도 왕의 사망에 대해 알리지 않을 계획이라고 했다. 왕의 사망 이유가 그리 명예롭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반란, 왕위 다툼, 혁명 등 다양한 요소들이 칼라브리아 주변에 혼재해 있어 국경을 여는 시기 또한 적절하지 않았다. 물론 칼라브리아도 그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작은 민란들에서 그친 정도라면 아주 조용하게 굴러온 셈이었다.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나면, 나는 자동으로 왕위를 승계받아 왕이 돼요. 로잘린, 당신은 왕비가 될 테고요.”
왕비. 낯설게 느껴지는 지위였다. 바로 직전까지도 미워했던 사람이 가진 지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 것이 아닌 양 느껴지기도 했다.
“갑자기 모든 일이 빠르게 변해 혼란스럽겠지만.”
“…….”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잘해 내 줄 테니까.”
로비엔이 새가 부리를 비비듯 로잘린의 둥그런 이마에 제 이마를 가볍게 비벼 왔다. 애정의 표현이기도 했다.
“전하를 위해서라면요.”
로잘린이 친애의 마음을 담아 속삭였다.
“내 안위와 관련 없어도?”
로비엔은 앙큼하게도 우리의 약속은 그와 다르지 않았냐고 물어 왔다. 혹은 안위와는 상관없이,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왕의 위엄을 유지하는 것이 곧 그의 안위인걸요.”
하지만 아직은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주기엔 일렀다. 로잘린은 가볍게 웃으며 응수했다. 그 질문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마음을 털어놓을 만큼 어리숙한 여자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듯이.
로비엔이 결국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고된 시간과 어지러운 마음이 삽시간에 녹아내렸다. 조금의 여유라도 나면 달려와 곁을 지키고 싶던 마음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바빠지시겠네요.”
그간 로비엔은 로잘린의 회복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곁을 지켰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는 그보다 더 무거운 책임이 주어졌고, 로비엔은 마땅히 따라야 했다.
“아마도.”
로잘린의 손끝이 로비엔의 이마 근처를 느리게 더듬었다. 로비엔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달싹이는 입술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식사는 늘 제때 챙기세요. 로단테 백작에게 확인할 테니, 거짓은 말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사실 그래도 자신을 혼자 두지는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감정쯤은 혼자서 이겨 내야 한다고 믿었다. 로비엔을 사랑하지만, 사랑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입 밖으로 내뱉어 고백하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기대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여겨선 안 된다. 삶의 중심을 유지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었다. 삐끗하여 쓰러졌을 때 누군가 붙잡아 주지 않더라도, 손과 무릎을 툭툭 털어 내고 일어나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예요?”
그게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안다는 듯 그가 물어 왔다. 로잘린은 그저 웃었고, 그는 더 캐묻지 않았다. 마지막 한 걸음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로도 좋았다.
아직은.
일주일간의 조문 기간이 끝나면, 왕의 관은 수도를 돈 뒤 왕실 전용 사원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 이후 왕실의 일원끼리만 모인 자리에서 장례 미사를 치르고, 사원 지하에 그 시신이 안치된다고 했다.
왕의 장례는 회의를 통해 급하게 준비되었다. 그에게 지병이 있었다거나, 죽기 전 며칠간의 말미라도 있었다면 조금 달랐겠지만, 하룻밤에 비명횡사한 탓이었다.
“이렇게 가실 줄 누가 알았을까요.”
조문을 위해 계단 앞에 선 로잘린의 등 뒤로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모두 놀라고 당혹스러워했으나, 그 속에 애도는 그다지 섞여 있지 않았다. 애초에 잘 알지도 못하는 왕이 죽은 게 뭐 그리 대수고 슬픈 일일까. 로비엔이라는 장성한 왕세자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질 염려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전하, 꽃을 받으십시오.”
라나가 로잘린에게 꽃 한 송이를 건네고 물러났다. 애도를 표하기 위해 입은 검은색 드레스나 검은색 베일과는 완벽하게 대조적인 색이었다.
“왕세자비 전하께서도 시녀를 새로 들이신 모양이네요.”
“전 루드 백작 부인이 아닙니까?”
수군거리는 소리가 편치는 않았다. 잊으려고 노력하는 이름을 되새기는 것 역시 불쾌했다.
“마땅한 시녀를 구하기가 어려우셨나 보네요.”
비웃는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그 뜻은 비웃음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로잘린의 평판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라나는 왕세자비의 시녀로서 당당하기 위해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어떠한 순간에도 자신이 로잘린의 평판에 관련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라나가 그렇듯 노력하는 동안, 로잘린은 왕의 관이 놓인 제단 앞으로 사부작사부작 걸음을 옮겼다. 어쨌거나 시부가 죽었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왕세자비를 흘겨보는 시선들 사이에서도 담담했다.
“흐윽, 폐하…….”
왕비의 울음소리나 슬픔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로잘린은 그의 관이 놓인 제단 앞에 흰 꽃 하나를 올려 두고 묵념한 뒤 물러났다.
한 시대를 왕으로 호령했던 사내도 결국 관짝 하나에 갇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떠나는 처지가 되었다. 권력도, 돈도, 아름다운 여자도 없이.
어차피 죽고 나면 다 똑같은데 무엇을 그리 욕심부렸을까? 왕가의 번영이 대체 무엇이기에.
로잘린이 무감한 눈으로 왕의 시신이 담긴 관을 올려다보았다. 3왕자비를 끝으로 직계 왕족의 순서가 끝났다. 귀족들 역시 차례대로 제단에 꽃을 바치고 왕을 향한 애도를 표현했다. 왕비는 우느라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있었다.
“왕비께서 아주 슬프신가 보네요.”
애정이라곤 하나도 없던 사이에도 그의 죽음이 저토록 슬픈 것일까?
사실 로잘린에게 앨런 3세의 죽음은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그는 로잘린을 해하려고 했고, 제 손을 빌지는 않았어도 그녀의 아이를 죽음으로 이끌어 갔다. 사실 응분의 대가를 치렀다는 생각도 했다. 감히 드러내어 말할 수는 없겠지만.
잠시 이어지는 조문 행렬을 구경하던 로잘린이 왕의 관이 놓인 홀을 빠져나왔다. 일주일이나 이어지는 귀족의 조문에 왕족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어서였다.
“왕비께서 쓰러지셨다!”
안쪽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오열하더니 결국 기운이 다해 쓰러진 모양이었다.
입구 근처에 서 있던 로잘린은 왕비가 근위병의 등에 기대어 업혀 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왕비의 시녀들이 울며불며 그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비엔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첼 후작 부인 역시 같은 차를 마셨고, 죽음 앞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녀가 국왕 폐하를 독살한 건가요?’
‘그랬을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로잘린은 전날, 로비엔이 담담히 털어놓던 사실을 곱씹었다.
왕을 독살하고 저 역시 따라 죽으려던 자살 시도가 실패한 정부. 하지만 왕의 총애로 말미암아 후작의 자리를 받은 정부가, 왕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가 왕을 독살할 이유가 있나?
“로잘린.”
의아했다. 하지만 진실을 알고 있을 사람은 여전히 사경을 헤매고 있고, 왕은 죽었다. 시간과 이후 등장할 증거들이 진실을 드러낼 수 있을까?
로잘린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로비엔을 바라보았다. 다소 까칠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는 성처럼 자리를 굳건히 딛고 서 있었다.
“전하.”
로비엔이 천천히 다가왔다. 가까운 거리에 선 그가 손을 뻗어 로잘린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로잘린은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 즈음에 머리를 기대었다. 오가는 이들이 왕세자 내외의 로맨스를 힐끔거리는 것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밀리언이 다미안 래비어트를 붙잡았다고 전해 왔습니다.”
물론, 그것이 꼭 로맨틱하기만 하지 않다는 것은 그들만 아는 일이었다.
“다미안을요?”
로잘린이 고개를 조금 들어 로비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로비엔이 그를 잡아들여서 하려던 일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비가 정말로 재판에 회부된다면, 증인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제 부정에 대한 재판 말인가요?”
“부왕의 범죄에 대한 재판에서도.”
왕을 재판에 세우려고 했었다니. 로잘린이 저도 모르게 놀라 벌어진 입을 다시 닫았다. 로비엔은 그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왕을 재판에라도 세우겠다는 의지를 내비쳤으니, 그가 생포하지 않았더라면 다미안 래비어트는 진즉 죽어 없어졌으리라. 만일 클로티 부인이 여전히 왕비 곁을 지키고 있다면 말이 달랐겠지만, 클로티 부인 역시 로비엔의 손아귀에 있으므로.
“물론 부왕께서는 이미 돌아가셨고, 그대를 재판장에 세우는 일은 이루어질 리 없으니 이제 무의미하지만.”
“…….”
“추잡한 소문을 없애고, 원천봉쇄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겠지요.”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을 사람인데, 그 와중에도 로잘린을 위한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했다. 그 사실이 로잘린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바로 대화를 시도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여요.”
“왜요?”
“오피움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라더군요.”
“그가 오피움에 취해 있었다고요?”
로잘린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되물었다. 로비엔이 긍정하자, 로잘린이 약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플 때야 모르겠지만, 재미나 환락을 위해서 오피움을 섭취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로잘린이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덧붙였다. 로비엔은 그제야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오피움이 주로 나는 곳은 동부, 카를로스 백작의 영지 근처였다. 그리고 카를로스 백작은 영지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 피베체 공작과 무척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하?”
로잘린이 잠시 생각에 잠긴 로비엔을 불러 상념을 멈추게 했다.
“잠깐 다른 생각을 좀 했습니다. 미안해요.”
로잘린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로비엔은 웃는 얼굴로 상황을 무마시키며, 로잘린의 가느다란 의심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아직 확실치 않은 생각으로 로잘린의 머릿속까지 복잡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다만, 다미안을 해하려던 자가 이미 죽어 버린 앨런 3세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보통 누군가를 죽이려는 자에게는 마땅한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