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72)화 (72/151)

# 72.

왕을 시해한 범인으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레이첼 후작 부인이었다. 가장 마지막까지 함께했으며, 마찬가지로 죽음의 강을 건널 뻔했던 왕의 정부.

모두가 소리를 높여서 궁 내 그녀의 거처와 저택을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땅한 주장이었다.

로비엔은 사용인들을 시켜 궁 안에 있는 레이첼 후작 부인의 거처를 조사하도록 하고, 병사들을 보내어 저택을 뒤엎을 것을 명령했다.

“여기에 이상한 자루가 있습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의 귀물이 담긴 상자 안을 살피던 하녀 하나가 손을 들고 소리쳤다. 반지나 들어 있을 법한 조그만 자루의 주둥이를 풀자, 소량의 가루가 발견되었다.

“이 가루가 무엇인지 조사하도록 해.”

높은 확률로 왕을 해쳤을 무엇. 로비엔이 손에 들린 자루를 밀리언에게 넘겼다. 밀리언은 그것을 재킷 주머니에 챙겨 넣은 후 서둘러 레이첼 후작 부인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로비엔은 선 자리에서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커튼을 걷어 내어, 한풀 꺾인 햇빛이 들이치는 침실의 구석구석까지 훤히 보였다. 자신의 침실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했는지, 잡동사니 없이 딱 필요한 가구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은 항상 여기서 머물렀나?”

“왕께서 궁에 처소를 마련해 준 이후에는 항상 이 방을 사용하였습니다.”

타인이 사용했을 리는 없다. 그러니 자루 안에 있던 가루의 정체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것이라고 판명이 나면, 범인은 레이첼 후작 부인으로 확정될 것이다.

하지만 기묘한 직감이 그를 멈추어 세웠다. 사경을 헤맨다는 레이첼 후작 부인은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는데, 모든 것은 지나치게 레이첼 후작 부인을 범인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십니까?”

난장판이 된 공간의 한가운데로 다시 돌아온 밀리언이 물었다. 한두 해 그를 모신 것이 아닌 만큼, 밀리언은 로비엔의 반응에 무척 기민했다.

“그녀가 범인이라는 정황은 명백한데, 레이첼 후작 부인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로비엔이 나직이 말했다. 밀리언 역시 이해 못 할 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이 쓰이신다면 레이첼 후작저에서 그녀를 수행하던 하녀들을 조사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의외의 단서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럴듯한 얘기였다.

“레이첼 후작저의 사용인들에게 레이첼 후작 부인의 평소 생활, 주기적으로 입궁할 때의 특징, 선호하는 물건, 평소에 자주 했던 말 등 사소한 것이라도 전부 확인해 봐.”

로비엔이 즉시 명령했다. 확실하게 레이첼 후작 부인이 왕을 해치려고 했다는 증거가 하나라도 더 발견된다면 다시는 꺼림칙함을 느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하겠습니다.”

“비께서는?”

로비엔은 레이첼 후작 부인의 침실을 빠져나오며 로잘린의 행방을 물었다.

“라나 메르센데티가 시녀로 정식 입궁하였다고 하니, 함께 시간을 보내고 계실 겁니다.”

로잘린이 친히 뽑은 시녀. 로비엔 역시 자주 마주치게 될 테니 얼굴 한 번쯤은 보아 두는 게 좋을 터였다.

“회의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잠시 펠리에 궁에 들렀다가…….”

“왕세자 전하. 모두 회의장에서 대기 중이라 합니다.”

물론 얼마쯤은 사심이었다. 왕이 죽었고, 그는 왕세자였다. 그는 왕의 장례식과 자신의 대관식을 준비하며, 죽음의 이유를 파헤쳐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전처럼 로잘린과 붙어 있을 시간과 이유 모두 마땅치 않았다.

적당한 이유를 찾았다고 생각한 로비엔이 펠리에 궁으로 향하겠다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그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동시에 밀리언의 가엾어하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회의를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지으시고 저녁을 함께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밀리언은 그간 풍랑에 흔들리는 배처럼 위태로웠던 왕세자 부부가 최근에서야 간신히 관계를 회복한 것을 알고 있었다. 단순히 연애 놀음을 하는 수준이 아니라 상처까지 공유한 부부. 마음을 확인하자마자, 왕의 사망 때문에 떨어져 있는 시간은 괴로우리라.

“비께 사람을 보내어 그렇게 전해 둬.”

“예.”

사랑하는 아내의 품이 무척이나 필요할 사내에게 원하는 것을 내주고 싶었다.

회의장으로 발길을 돌리는 뒷모습만큼은 무척이나 단단하여, 누군가가 필요해 보이지 않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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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로잘린은 그녀의 시녀로서 정식으로 입궁한 라나 메르센데티와 마주하고 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시기가 좋지 않아 유감이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할 때에 들었으니 무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 기쁩니다.”

로잘린의 유감 표시에 라나는 고개를 저었다. 겸손하고 우아한 여자. 그러면서도 왕비나 클로티 부인처럼 로잘린을 깔보지 않는 태도야말로 귀부인다웠다. 라나는 로잘린이 아는 사람 중에서 귀부인이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바쁜 건 왕세자 전하시지 내가 아닌걸요.”

“하면 제가 도와드릴 만한 일이 없을까요?”

“아직은. 그대 역시 적응하는 게 먼저일 테고.”

로잘린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말한 대로, 시기가 좋지 않았다. 왕이 사망했는데 아직 정확한 이유와 범인을 잡지 못했다. 게다가 왕의 장례식을 논하고 있는데 경거망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이전이라면 그리 고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로잘린은 로비엔에게 어떠한 부담도 더 얹어 주고 싶지 않았다.

물론 로비엔은 괜찮다 했고,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그대로 믿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출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마리. 전하께서 보내온 소식은 없니?”

“네, 따로 보내신 소식은…….”

마리가 죄라도 지은 듯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하던 때였다. 로비엔이 보낸 시종이 그가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해 왔다고 했다. 내내 무던하던 로잘린의 얼굴에 그제야 표정이랄 것이 보였다.

“마리. 주방에 왕세자 전하와 함께 식사할 거라고 전하렴.”

마리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방을 빠져나갔다.

“두 분 전하께서는 무척 돈독하시군요.”

하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라나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맞아요.”

로잘린이 담담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본래 주인이란 아랫것에게 그리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행간으로부터 의미를 읽고,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 그녀가 해야 할 몫이었다.

“여독이 있을 테니 방에 가서 푹 쉬어요. 하녀도 곧 붙여 줄게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얼마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건만, 그녀에게 배정된 방으로 가라는 로잘린의 태도는 일견 냉랭해 보였다.

“아, 혹시.”

“예?”

“궁 안에 그대에게 무례하게 구는 사람이 있다면 즉시 얘기해요.”

그러나 기분이 좋을 시기도, 좋다고 해도 티 내도 될 시기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했다.

라나는 혹여라도 왕세자비의 시녀로 들어온 자신이 무시라도 당할까, 로잘린이 살펴 주는 것을 알았다. 사교계의 암묵적인 규칙이,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더 친절하고 아름답게 웃어 주면서 짓밟는 것임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분이란 것도.

하지만 로잘린을 지지하는 세력은 곧 왕실을, 그리고 로잘린의 안전을 지지하는 세력이 된다. 여성들이 좌지우지하는 사교계는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은근히 강한 힘과 연대가 있었다. 자신이 그를 도울 수 있을까.

라나가 제게 주어진 방으로 향하는 내내 진지하게 생각하는 동안, 로잘린은 왕비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왕이 죽었다.’

클로티 부인이 괴소문의 배후 및 로잘린의 음해 세력으로 왕을 꼽았고, 왕이 인정했다. 왕비는 관여하긴 했지만, 로잘린의 소문이 조작된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죄를 물어야 하는 왕은 죽어 버렸고, 진실을 몰랐다던 왕비를 처벌하기는 모호했다. 로잘린을 재판에 회부하겠다는 계획을 취소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아이의 목숨값은, 내 억울함은 어디에 물어야 하지?’

잃은 아이만 생각하면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러나 죄를 묻기도 어려운, 그의 모친에게 보복하겠다고 달려들 수는 없었다. 어차피 왕의 권력을 빌려 부리던 위세니, 왕이 죽고 난 이후 왕비는 이전처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걸 생각할 때마다, 분노가 갈 길을 잃었다는 사실에 곧 막막해졌다.

그냥 이대로 묻고 잊어버릴까? 그러면 모든 게 평화로워질 텐데.

하지만 그러긴 싫다.

그렇지만 더 생각하기엔 머리가 아파.

아직 창문 너머는 환한 햇살이 밖을 밝히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몸은 차차 회복되고 있었지만, 아직 완벽하게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지는 못해 피로감이 쉽게 찾아왔다.

로잘린이 답답한 숨을 토해 내며 눈을 감았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니 잠시쯤 쉬었다가 일어나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식사는 걸러도 상관없으니 모두 물러나.”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들려온 목소리가 피곤한 몸을 깨웠다. 기다리던 사람이라서 그런지, 최대한 말소리를 줄여 명령한 것에 불과했는데도 눈이 번쩍 뜨였다. 로잘린은 그제야 제 몸이 소파에 기댄 것이 아닌, 따뜻하고 단단한 사내의 몸에 기대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깼어요?”

로비엔이었다. 바르작거리며 품에서 벗어나려는 기색에 로비엔이 기민하게 로잘린을 살폈다.

“피곤하면 더 쉬어도 돼요.”

로잘린이 고개를 저으며 로비엔의 어깨너머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녁 시간인걸요. 식사를 준비하라고 일러 뒀어요.”

“식사보단 그대와 이야기하거나, 편안히 쉬고 싶어요. 국상 기간엔 제대로 대화하기도 어려울 테니까.”

그저 가만히 손을 뻗어 와, 로잘린을 다시 품 안으로 끌어당겨 안을 뿐이었다. 본래 한 몸이었던 것처럼, 혹은 한 몸처럼 붙어 있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결국 로잘린은 제대로 된 정찬을 차리는 대신, 하녀들에게 간단한 저녁 식사를 침실로 올려보내라고 명령했다.

“오늘 하루는 어떠셨어요?”

“레이첼 후작 부인의 처소와 저택을 수사하도록 명령했고, 장례식의 규모를 결정했습니다.”

로잘린이 피곤한 기색이 어린 로비엔의 눈 밑을 살살 어루만지며 물었다.

로비엔은 담담한 목소리로 오늘 하루 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로잘린은 나직하지만 힘이 담긴 그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레이첼 후작 부인과 관련해서는 어떤 증거라도 나왔나요?”

“수상한 가루가 나와서 성분을 알아내라 했더니 비소라더군요. 다만…….”

치사량 이상의 비소는 급성으로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레이첼 후작 부인의 방에서 발견되었다면, 증거로서는 그만한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그녀를 범인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레이첼 후작 부인 역시 같은 차를 마셨고, 죽음 앞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녀가 국왕 폐하를 독살한 건가요?”

“그랬을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비소는 어디서 구한 걸까요?”

다만, 불확실한 의문들이 흙이 묻은 발자국처럼 점점이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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