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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71)화 (71/151)

# 71.

구름의 무리가 달까지 가린 밤, 날아든 비보는 생각도 하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로잘린은 실내용 드레스 위로 걸친 숄을 추스르며 서둘러 걸었다.

머릿속에는 별일 아닌 것처럼 담담하게, 뛰지 말고 천천히 오라고 말하던 로비엔의 얼굴만 가득했다. 그렇게 말한 주제에 어찌나 서둘러서 가 버렸는지, 이미 달려 나간 로비엔은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달빛 아래서 그토록 반짝이는 머리카락이라 근처에만 있다면 보이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로잘린이 다소 격해진 숨을 내리누르며 걸음을 멈추어 섰다. 궁 안에서 오열하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

로잘린이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랐다. 왕의 침실 앞, 꺼져 버린 그의 생명만큼이나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울고 있는 궁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마음의 준비를 하듯 꼿꼿하게 선 로비엔의 뒷모습도 보였다.

“전하.”

작은 목소리였는데도, 로비엔이 로잘린의 목소리를 용케 알아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화려하게 장식된 침실 문의 손잡이를 막 붙잡은 순간이었다.

스치는 표정으로 로비엔의 감정을 읽을 순 없었으나, 당연히 좋은 감정은 아닐 터였다. 어쩌면 어떤 미친놈이 죽고 싶은 마음에 왕이 죽었다고 헛소리를 한 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을지도.

로비엔의 곁에 가까이 다가선 로잘린이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곁에 있을게요.”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지은 뒤 로잘린의 손을 떼어 냈다.

“괜찮아요.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닐 테니 밖에 있어요.”

로비엔은 계속 힘든 일을 경험해 온 그의 비가 더 이상 고통스러운 광경을 목격하는 일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로잘린은 재차 매달렸다.

결국 로비엔은 로잘린을 말리지 못했다. 그는 본래 로잘린에게 더없이 약한 사내였으므로.

로비엔이 짧은 심호흡 끝에, 왕의 시체가 있을 침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엉망이 된 침실의 모습이었다. 일자 형태를 유지해야 하지만 비스듬하게 밀려난 소파. 바닥으로 엉망으로 토해 놓은 토사물과 테이블 위에서 이리저리 흐트러진 물건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져 깨진 찻잔. 모든 것들이 왕의 죽기 직전까지의 고통을 보여 주는 듯했다.

로잘린과 로비엔이 방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닫힌 문 너머로 울음소리가 멀어져 갔다.

엉망으로 사망한 왕의 시신은 대충이나마 수습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그러진 얼굴에 남은 통증의 그늘이나 급속도로 식어 버린 몸, 그리고 새파란 안색은 급작스러운 사망이라기에는 수상한 점이 많았다.

“……사망 직전에 특별한 일이 있었나?”

“레이첼 후작 부인과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로비엔의 물음에 시종장이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대답했다.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로비엔은 시종장의 떨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한 가지의 의문 때문이었다.

그의 떨림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비켜!”

그 순간, 육중한 문이 떠밀리며 그 안으로 쓰러지듯 사람이 들어섰다. 열린 문 너머로 발만 동동 구르는 궁인들이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아마 반쯤 미쳐서 막무가내로 침실로 달려든 왕비를 붙잡으려다가 실패한 모양이었다.

“아, 아아……. 아악!”

치장도 못 한 채 잠옷 차림으로 달려온 왕비가 침대에 누인 왕의 시신을 발견하곤 미친 것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흡사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들리는 비명이었다.

“폐하, 폐하!”

차가워지다 못해 뻣뻣해지기 시작하는 남편의 시신을 부여잡고 왕비가 오열했다.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탓에 덩치 큰 사내의 몸이 작은 힘에도 맥없이 흔들거렸다. 침실에는 시체가 되어 버린 왕, 로비엔, 로잘린과 왕비, 그리고 시종장뿐이었고, 시종장은 로비엔의 말이 있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로비엔, 궁의를, 궁의를 부르렴!”

“…….”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다. 폐하께서 왜!”

왕비는 땀과 눈물로 젖은 채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었다.

“오후까지만 해도 건강하셨던 분이야. 이렇게 가실 리가 없어. 왜…….”

왕비는 거리낌 없이 왕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비며 울었다.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의 어미와 아비가 그렇게 친밀한 부부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과하게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폐하, 폐하. 안 됩니다. 갑자기 이렇게는.”

흐느끼던 왕비가 침대 옆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로비엔은 반사적으로 의식을 잃고 넘어가는 왕비를 추슬러 안았다. 세상이 무너진 듯 울다가 기어이 혼절해 뒤로 넘어가고서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이불을 쥐어뜯고 울부짖던 게 무색하게 왕비의 손발이 서늘했다.

“처소로 모시고 침실을 수습해.”

“명 받들겠습니다.”

기절해서 늘어진 왕비의 몸이 아랫것들에게 들려 나가는 꼴을 지켜보던 로비엔이 고요해진 왕의 침실 안에서 명령했다.

“레이첼 후작 부인 역시 사망했나?”

“방 안에 쓰러져 있었으나 사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목숨을 붙여 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

로비엔이 담담히 명령했다. 왕이 없는 지금,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져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왕이 서거하셨으니 올해의 건국제 일정은 모두 취소한다. 이에 대해 알리고 장례를 준비하도록.”

로비엔의 시선이 허망하게 세상을 뜬 제 아비의 얼굴로 한 번 더 향했다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려 대답하고 물러났다. 왕의 침실에는 이제 죽은 자를 제외하면 로잘린과 로비엔만 남아 있었다.

토사물이며 여러 광경이 역겹기도 할 텐데, 로잘린은 담대하게도 그의 곁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안색은 다소 하얗게 질려 있었다.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닐 거라니까 말도 안 듣고.”

로비엔이 스스로에게 무신경한 로잘린의 태도를 힐난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으로 혼내는 것이 아니었기에 마음을 상하게 할 만한 무엇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를 잃은 당신을 어떻게 혼자 둬요.”

로잘린이 나직하게 말대꾸했다.

분명 나쁜 건 조금도 보지 않게 해 주고 싶었는데, 이제 더 상처 입지 않았으면 했는데. 자신을 혼자 둘 수 없다는 로잘린의 말대꾸가 무척이나 기꺼웠다. 우스운 일이었다.

“이 방을 나서면 아무렇지 않은 척하실 거잖아요.”

왕에 대한 신뢰는 박살 나 더는 같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의 아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왕의 죽음과 그가 왕세자로서 짊어진 무게 역시 매한가지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는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어요.”

“그래도 괜찮아야 해요.”

그는 이제 단순히 이후 왕이 될 존재가 아니었다.

로잘린의 손을 붙들고, 제 아비의 시신을 뒤로한 채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렸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왕이 죽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내를 죽이려고 하고, 제 자식을 죽인 아버지는 보고 싶지 않았다. 사랑했지만 동시에 원망스러웠다. 그의 죽음은 예상치 못한 바이기에 슬프긴 했지만, 잠시였다.

인륜이라는 것조차 경계가 흐릿한 곳이 바로 그가 발을 디딘 왕궁이었다. 그의 부모가 그리 가르쳤고, 그 역시 그렇게 배웠다.

혈족의 구분이 없는 끝없는 배신과 죽음의 위협.

그도 잊고 있었지만, 그것이야말로 왕족이 짊어진 왕관의 진짜 무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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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서 있는 말 위로 큰 자루 하나가 힘없이 늘어졌다. 곡물을 담았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홀쭉하고 길어, 그 모양새가 제법 수상해 보였다. 짐승 역시 무언가 불쾌함을 느낀 듯 발을 작게 구르며 반항했다.

“괜찮아.”

말의 주인이 익숙하게 고삐를 당겨 진정시키지 않았다면 포댓자루는 그대로 바닥으로 낙하했을 것이다. 사실, 자루 안의 인물은 그것을 바라기도 했다. 다량의 오피움을 흡입한 그의 몸은 도저히 생각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으니까.

조금 움직였나 싶으면 고작 손가락 끝이나 발가락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온 세상에 내리누르는 것 하나 없이 붕 뜬 기분이 몹시 즐거웠으나 동시에 불쾌했다. 그는 제 몸이 제 것 같지 않은 말도 안 되는 순간에도 히죽거렸다가, 이내 공포에 질렸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지? 누가 나를 데려가고 있는 거지? 여기까진 어떻게 왔더라?

생각을 이어 가려고 노력했으나 드문드문 기억이 끊겼다. 그저 입에 들이밀던 병의 주둥이, 나른함, 쏟아지던 액체, 기분 좋은 충만함, 어느 순간 늘어지던 몸과…….

피!

다미안 래비어트가 슬슬 감겨 가던 눈을 번쩍 떴다. 조금 전까지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으로 버둥거리자, 그의 몸이 들어 있던 포댓자루가 말 위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말이 놀란 듯 제자리에서 허우적거렸다.

사내가 말을 진정시키는 동안, 대충 한 번만 둘러 묶은 주둥이를 헤치고 다미안이 더듬더듬 기어 나왔다. 그러나 팔다리가 녹아 버린 듯 감각이 무뎌, 다리가 여러 개 달린 곤충이 미끄러운 바닥에서 움직이듯 허우적거리는 게 전부였다.

“거참 귀찮게…….”

진정시킨 말이 멈추어 서고, 안장 위에서 남자 하나가 훌쩍 뛰어내렸다. 다미안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버둥거리며 몸을 돌렸다. 다미안은 금방이라도 무너지려는 듯 떨리는 팔꿈치를 바닥에 디뎠다. 햇빛을 등진 사내의 거먼 얼굴과 그늘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누구, 당신, 누구…….”

의식을 붙잡는 것도 간신히 하는 일이었다. 이제 말을 막 배우는 아이처럼 더듬더듬 묻는 다미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사내가 쯧, 혀를 찼다. 그 순간 다미안은 기적처럼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기억의 파편을 허겁지겁 붙들었다.

‘……헉!’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던 골목에 드러난 두 개의 그림자가 그들을 멈추어 세웠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다미안의 입에 병의 주둥이를 밀어 넣고 있던 사내의 목이 뚫렸다.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사냥꾼 하나가 뜬 눈으로 죽었다. 병이 먼지 구덩이인 바닥을 구르고 자연스레 결박이 풀렸다. 다미안은 시뻘게진 얼굴로 기침을 하며 바닥에 액체를 토해 냈다. 그러나 이미 병에 담긴 액체 중 반은 들이마신 상태였다.

사냥꾼의 목이 뚫리면서 그의 얼굴에 튄 핏방울 몇 개가 아직 미지근한 온도를 띠고 있었다.

나도 결국 죽나?

다미안이 늘어지는 몸을 간신히 추슬러 벽에 기대며 거친 숨을 토해 냈다. 흐릿한 시야가 무너지는 가운데 방금 사람을 죽인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 전의 사내들처럼 근육질의 몸과 날카로운 눈빛을 가졌지만, 다미안을 향한 살의는 뭉뚝하게 구긴 얼굴.

‘왕세자 전하께 다미안 래비어트를 발견했다고 전달해. 무사하다고도.’

‘예.’

왕세자가 보낸 사람이다.

그 순간 안도의 한숨과 함께 시야가 닫혔다.

왕의 죽음을 알리는 선명한 검은 깃발이 펄럭거렸다. 기억의 마지막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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