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다미안이 숙소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수도의 하루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다. 아침 일찍부터 길거리에 사람들이 제법 있을 테니, 그를 찾아내기 쉽지 않을 터였다. 다미안은 그대로 로비엔을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음습한 골목을 돌아 나온 다미안은 기묘한 불안을 맞닥뜨리고 걸음을 멈추었다. 동이 트고 있었으나 길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다미안은 해가 뜨지 않은 것처럼 음울한 길거리를 낯설게 바라보았다.
“어딜 가시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다미안이 몸을 휙 돌렸다. 머리 위로 검은 후드를 둘러쓴 사내 둘이 다미안을 바라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근육으로 단단한 팔다리와 팔에 남은 선이 굵은 상흔들. 흔히 사냥꾼이라고 부르는 자들이었다.
“다미안 래비어트, 맞지?”
“……당신들은 누구지?”
다미안이 침을 꼴깍 삼키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우리가 누군지보다는 누가 보냈는지를 더 궁금해야 하는 거 아닌가?”
다미안의 해맑음이 우습다는 듯, 한 사내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왕세자가 보냈나?”
다미안의 물음에 그들이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왕세자가 보낸 것들을 따돌리느라 고생이 많았어.”
“……왕비. 왕비가 보냈군.”
“우리가 그 귀한 분을 어찌 알까?”
그렇지만 사냥꾼들을 보낸 배후를 알게 된다 한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미안은 자신이 한 걸음 주춤거리며 물러설 때마다 한 걸음씩 성큼 다가오는 사내들을 보며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 잡혀서 숨이 끊기느니 도망이라도 쳐 봐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든 즉시 다미안은 잽싸게 몸을 틀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속도로 뜀박질을 했다.
그 꼴이 우습다는 듯 픽 웃던 사냥꾼들이 눈빛을 바꾸어 그를 쫓아왔다. 해 봤자 일주일에 한두 번 승마나 했던 몸이 용병 생활을 했던 그들을 따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미안은 계속 사냥꾼들과의 거리를 확인하며 내달렸다. 그들과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수록 공포로 목이 졸렸다.
차라리 왕세자가 보낸 병사들과 마주치는 게 낫다. 그들도 분명 나를 찾고 있을 텐데. 어디에 있지?
짧은 시간 내에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방향을 틀기가 무섭게 다미안은 막다른 골목에서 사냥꾼들의 포위에 갇히고 말았다.
“걱정하지 마. 죽지는 않을 테니까.”
사내 중 한 명이 품 안에서 병을 꺼내 들었다.
“진정하라고 주는 선물이야.”
퐁, 하는 소리와 함께 병의 마개가 열렸다. 한 사내가 가까이 다가와 다미안의 몸을 단단히 붙들고, 다른 사내가 다가와 그의 입가에 병을 가져다 댔다. 다미안은 덧없는 것을 알면서도 온몸으로 버둥거렸다.
무엇인지 모를 것을 먹이려고 한다. 다미안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려 있었다.
“……!”
그는 강하게 잡힌 턱 때문에 벌어진 입안으로 기울어져 들어오는 액체의 냄새를 맡고 눈을 크게 떴다. 이 병에 담긴 액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오피움이다!
그는 알코올과 섞인, 입안으로 쏟아지는 액체의 쓴맛에 진저리쳤다. 삼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으나, 액체는 다미안의 목구멍으로 슬금슬금 넘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기울었다. 마리에게 초를 켜라 명하며, 로잘린은 테이블 위에 쌓인 종이 중 가장 위의 것을 끌어내렸다.
“무리하시면 안 되는데…….”
“항상 하던 일인데 무리랄 게 뭐가 있겠니.”
한동안 보가트 상단의 장부나 사업과 관련된 문제는 구경도 못 했다. 마리와 로비엔이 강경하게 만류한 탓도 있었지만, 로잘린 본인도 장부를 볼 정신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봐야 할 것들이 이렇게나 많았다. 며칠째 들여다보고 있어도 끝이 나지 않는 종이 무덤은 늘 새로운 막막함을 선사했으나 동시에 활력을 주기도 했다.
“전하께선 일하는 걸 너무 좋아하셔서 탈이에요.”
“이렇게 나고 자랐는데 어쩌겠어.”
어릴 때부터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면 버림받을 위기에 직면하며 살아왔다. 그 때문에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것이 두려워서 무어라도 해야 했었다.
언젠가는 그게 슬펐던 적도 있지만, 사실 지금은 그게 고맙기도 했다. 리리엔처럼 꽃밭 같은 해맑은 머리를 가지고 궁에 들어왔다면 아마 창졸간에 죽은 목숨이 되었을 테니까.
“전하께서 살피지 않으신 게 길어야 두어 달 정도인데, 뭐 잘못된 게 있을까요?”
“모르지. 조용한 게 더 수상쩍어서.”
거래처와 수량, 금액 등이 기록된 장부를 들여다보던 로잘린의 손이 갑자기 멈추었다.
‘요즘처럼 흉흉할 때 아이가 태어났어도 문제였을 겁니다.’
서툰 위로라도 건네듯 드마셸이 건넨 말이 생각났다. 로잘린은 아이를 잃은 것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적어도 일 년은 지나 버렸던가, 하고 아무 말 없이 드마셸을 응시했다. 그는 그게 제 위로에 감사하게 여기는 뜻이라고 생각했던지 이어 떠벌거렸다.
‘그리고 사내아이가 아니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로잘린의 눈동자에 드러난 건 명백한 경멸이었다.
드마셸은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 밥줄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나오는지를 분석하는 데에는 탁월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그가 로잘린 앞에서 이렇게 얘기한다는 것은 로잘린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우습고 슬프게도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왕세자비인 로잘린은 보가트 가문의 일원으로 존재할 때만 의미가 있었으니까.
‘별로 얘기하고 싶은 내용이 아니군요.’
그러나 로잘린은 분노하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무던한 표정으로 드마셸로부터 장부와 사업 계획서 따위를 건네어 받았다. 매주 살펴보던 것이 한동안 손을 놓으면서 제법 쌓여 무더기가 되어 있었다.
‘양이 조금 많네요.’
‘발란이 약용액과 사료 사업을 새로 맡아 그렇습니다.’
보가트 공작가는 정해진 레시피대로 약용액의 생산을 의뢰하고, 대신 모든 재료를 구매하여 생산자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그렇듯 생산된 약용액의 유통만을 논하는 정도로 우회로를 마련해 준 것은 로잘린이었다.
물론 왕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새로운 사업이라는 조건에서 비껴가게 해 주었다고 스스로 공치사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발란. 또다시 발란을 책임자로 내세운 드마셸의 속내가 너무 빤하지 않은가. 성공할 수밖에 없는 길을 걷게 하여 그에게 다시 상단을 넘겨주리라는 부정이 어찌나 뜨거운지.
‘그렇지 않아도 회의에서 화합물을 첨가하여 사료를 만들 거라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예, 소량 첨가하면 기생충 따위를 죽이는 데 도움이 되리라 하더군요.’
‘고려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살펴보는 것도 좋지만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전하.’
마치 저를 걱정하듯이 내뱉는 드마셸의 말에, 로잘린은 능숙하게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건 진짜로 걱정하지도 않으면서 입만 나불거리지 말란 의미였다.
로잘린은 그 이상으로 제 아버지와 기분 나쁜 발란을 떠올리는 대신, 쌓인 서류 더미로 관심을 돌렸다.
신사업과 관련해 왕에게 이익의 3할을 준다고 생각하면 좀 더 신중해야 할 텐데, 새로운 일을 벌인답시고 대량으로 이것저것 많이도 사들였다. 수익을 위해서라면 투자는 당연히 필요하지만, 큰 손이 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 발란이 얼마나 잘해 낼지는 미지수였다.
지금의 왕이 죽거나, 행정 제도가 바뀐다면 일이 좀 쉬워지기는 하겠지만…….
“마리, 이거 따로 빼놓으렴. 얘기해 보는 편이 좋겠어.”
갑자기 왕이 죽거나 할 일이야 없지 않은가.
로잘린의 부름에 다가온 마리가 받아 든 종이를 보관함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로잘린이 뻐근한 눈두덩을 부드럽게 손으로 문질렀다. 이 정도에 지치다니, 나름 왕세자비랍시고 궁 안에서 곱게 머무르며 몸이 편해진 모양이었다.
“잠자리를 준비할까요?”
눈치 빠르게 로잘린의 변화를 알아챈 마리가 물어 왔다.
“그러렴. 왕세자 전하께선 오늘 어떻게 하실는지 모르겠구나.”
막 침대로 달려가던 마리가 별걸 다 궁금해한다는 얼굴로 로잘린을 보았다.
“근래에 두 분이 떨어져 주무신 적이 없지 않나요?”
그것도 그렇긴 하지. 로잘린이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최근 로비엔은 바빴다. 왕의 보좌, 왕의 대행. 왕이 곧 선위하려는 게 아니냐는 말이 돌 정도로 왕이 할 일을 그가 대신하고 있는 탓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달리 로잘린은, 왕의 의도는 로비엔을 정신없이 바쁘게 만들어 제게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렇듯 제 일에 왕의 일까지 병행하느라 바쁠 텐데도 그는 아주 늦은 시간에라도 스며들어 다만 몇 시간이라도 그녀 옆에서 쪽잠을 자곤 했다. 물론 로잘린은 잠든 상태라 그를 맞이해 주진 못했지만, 아침을 맞이하는 건 늘 함께였다.
그를 도울 방법이 없을까? 로잘린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불규칙하게 두드렸다.
“정리만 끝내고 목욕 시중을 도와 드릴게요, 전하.”
“너는 바쁘니 다른 하녀를 불러 주렴.”
그리고 클로티 부인에게 곧 라나가 시녀로 입궁할 테니 미리 준비를 해 두라고 해야지.
“…….”
그 사람은 이제 여기 없지. 로잘린이 아차 싶은 얼굴로 웃었다.
그러고 보면 나름대로 일 하나는 잘했는데.
제 사람으로 만들 수만 있었다면 확실히 큰 도움이 되었을 사람이었다. 그래서 왕비의 사람인 걸 알면서도 그리 호의를 베풀었던 것이고.
로잘린이 미묘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생각은 자연스럽게 클로티 부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동편 감옥에 갇힌 클로티 부인은 사실을 말해도,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 로잘린에게는 그랬다. 그러나 수족으로 부리던 왕비에게는 그런 가벼운 무게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비는 놀랍게도 그녀에게 자결할 것을 권했고, 더 놀랍게도 클로티 부인은 자진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비엔에게 실토하겠다며, 제가 아는 바를 이야기했다.
그렇게 클로티 부인은 살아남았다. 마치 지금 숨이 붙어 있다면,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아는 사람처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끝을 모르고 파고들던 추리는 로비엔이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에 끝이 났다. 로비엔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생각에 잠겨 있었던가 하며 로잘린이 머쓱하게 웃었다.
“일찍 오셨네요.”
“비께서 무리하고 계신단 이야기를 들어서요.”
부드럽게 웃는 낯이었지만, 로잘린은 그 얼굴에 섞인 희미한 걱정과 도통 그의 말을 들어 먹질 않는다는 비난을 읽었다.
“예전엔 항상 하던 일이었대도요. 그리고 이제 정말 잘 준비 하려고 했어요.”
일러바쳤을 사람이야 뻔하다. 로잘린이 종종걸음으로 도망치는 마리를 흘끗 보며 변명했다.
“전하야말로 계속 바쁘시잖아요. 놀아 줄 사람이 없으니, 저도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로비엔의 탓으로 떠넘겼다.
“내 탓이군요.”
“네.”
새침 떠는 대답에 그가 작게 웃었다.
“오늘 밤은 자유니, 비께서 원하신다면 놀아 드릴 수 있습니다.”
“잘 시간에 뭘 하고 놀아 주실 건데요?”
로잘린이 키득거리며 되물었다.
“두 분 전하, 죄송합니다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다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평화롭게 이어지던 연인들의 대화를 끊었다.
“들어와도 좋아.”
로잘린의 허가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잽싸게 열렸다. 급히 달려오기라도 한 듯, 이마에 땀을 매단 밀리언이 뜸 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당장 소네트 궁으로 가 보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지?”
“……국왕 폐하께서 서거하셨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