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69)화 (69/151)

# 69.

로비엔의 긴 손가락이 찻잔의 동그란 모양을 훑다가 슬쩍 밀었다. 가볍게 미는 행동에도 액체를 품은 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흔들렸다. 계단에서 떨어지기 직전까지의 로잘린이 하릴없이 흔들렸듯이.

“왕세자비를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하셨다 들었습니다.”

로비엔의 언급에 왕비가 불쾌한 얼굴로 눈을 치떴다. 로잘린이 일일이 그에게 일러바쳤다고 생각했는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할 방법은 그것뿐이니까.”

“반려인 제가 원치 않아도 말입니까?”

“로비엔! 정신 차리지 못해?”

왕비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지금도 왕세자비의 부정에 관한 진실은 밝혀진 바가 없어. 그 애가 진실로 왕실을 농락하고 있는지 누가 안단 말이야? 왕세자까지 되어서, 고작 가여운 마음에 눈이 멀어 이토록 어리석게 굴다니!”

“고작 소문 따위로 재판에 회부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오히려 담담하지만, 어딘가 서늘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왕비는 문득 제 앞에 버티고 선 이 단단한 남자가 제 아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언젠가 작고 연약했던 아이, 혹은 소년은 더는 거기에 없었다. 그저 제 부모를 향한 단단한 신뢰가 부서지고,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려는 남자만 남아 있었다.

“로잘린은 무결해요.”

“그건 그 소문의 당사자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를 일이지.”

그쯤 되자, 왕비로서도 오기가 돋았다. 재판에만 가면 로잘린이 질 게 분명한 싸움을 왕비가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대답에 로비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는 그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뭐가 되었든 증인 없이는 사실관계를 밝혀낼 수 없는 소문에 불과합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니?”

“클로티 부인은 이미 왕족 시해 혐의에 관여되었으니 증인의 효력이 없고.”

그 증언에 효력이 있다 한들 그의 손아귀에 있다. 왕비는 그제야 로비엔이 제일 먼저 클로티 부인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워 가두고, 자신에게 내주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사감, 그러니까 배신감만으로 처리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망친 다미안 래비어트는 추적 중입니다.”

이전까지는 다미안 래비어트를 불러들였다가 오히려 소문에 불을 붙이는 일이 될까 봐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일이 여기까지 흘러와 버린 이상, 수사를 위한다는 목적으로는 못 할 것 없는 일이었다.

왕비가 곧 희미하게 웃었다. 가장 중요한 증인이 될 둘 중 하나는 이미 로비엔의 손아귀에 있고, 다른 하나는 쫓기는 중이다. 법정까지 가게 된다면……. 이미 손아귀에 있는 클로티 부인은 죽여도 상관없고, 설득해도 상관없다. 나머지 하나는 추적하는 척하다가 죽여 버리는 게 가장 깔끔한 해결책일 터였다.

아무리 재판장에서 왕의 편에 선 자들이 그의 편을 들고자 해도, 로비엔이 협박 내지는 설득, 그리고 죽음으로 증인들을 입막음해 버린다면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클로티 부인이 전부 실토했습니다.”

실토? 왕비의 몸이 미미하게 움찔거렸다. 직전까지 짓던 희미한 웃음 역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무엇을?”

로비엔이 왕비와 또렷하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는 왕비의 진심을 확실하게 듣고 확인해야 했다.

“부왕께서는 보가트 상단을 언제고 무너뜨리고 싶어 하셨고, 로잘린을 좋아하지 않으셨다더군요. 그러므로 보가트 상단이 더 커지기 전, 그리고 로잘린이 궁 안에서 자리를 잡기 전에 쳐 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고.”

왕비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제 아들이 어디까지 말하는지 들어나 보겠다는 태도였다.

“그래서 비의 부정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미안 래비어트로부터 받은 귀걸이를 증거로 만들어 비를 실각시킬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클로티 부인이 부왕께 그 귀걸이를 바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이야기가 드러날수록, 왕비의 눈동자도 잘게 흔들렸다.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는 그녀의 목 근육이 불편하게 움직였다. 찻물에 시선을 둔 왕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었다. 마치 충격을 형상화한 것처럼 느껴졌다.

“부왕께서도 인정하셨습니다.”

“…….”

“그러니 이런 일이 없었더라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을지,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로비엔은 그런 왕비의 충격을 관조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궁금한 것은 단 하나, 이에 대해 알고 계셨는지. 그뿐입니다.”

“오, 몰랐다. 나는 정말로 몰랐어.”

왕비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해명했다. 그녀는 정말 억울한 듯, 앉은 자리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다급히 자신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클로티 부인이 찾아와서 네 비가 다미안 래비어트라는 자와 뭔가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얘기했어. 자주 불러들이고, 서신을 나누고, 보석 장신구까지 주고받는다고. 궁 안에서 이상한 소문마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고 전하더구나. 말했다시피 나는 왕실의 윗전이고, 사실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었어.”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로비엔은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왕비의 눈을 살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서 어떠한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안도와 기묘한 불안이 뒤섞인 숨결이었다. 부모 모두를 잃는 것보다, 둘 중 하나만 잃는 것이 그에게는 최선이었다.

“그러니 로잘린을 재판에 회부하겠다는 말을 거두어 주세요.”

“……로비엔.”

왕비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그 말을 거두시지 않는다면, 이미 이 사건을 알고 계셨다는 뜻으로 알아듣겠습니다.”

로비엔의 단호한 목소리가 왕비의 망설임을 끊었다.

“이렇게 말씀드렸는데도 멈추지 않으신다면, 저 역시 같은 방식을 고수할 수밖에요.”

“그게 무슨 소리니?”

왕비가 설마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절대로 벌어질 리 없다고 믿는 일을 언급하지는 않으리라는 듯이.

“두 분께 왕족 시해 혐의를 묻겠습니다. 죽은 아이 역시 왕족이었으니, 마땅한 죄목이지 않습니까?”

“로비엔!”

왕비가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다.

“제정신이니? 감히 왕과 왕비를, 네 부모를 왕족 시해 혐의로 재판장에 세우겠단 소리를 해?”

“최악의 방법이지만, 최후의 수단이니까요.”

로비엔은 담담했다. 왕비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아니. 법원은 왕의 권한 하에 있어. 네가 무슨 수로 그들을 움직일 것인데? 지금 반역을 일으켜 왕이라도 되려느냐?”

“그럴 필요도 없어요. 법원이 주장하는 것을 들어주면 그만입니다.”

채신머리없다는 생각도 잊었다. 왕비는 입을 작게 벌린 채 낯설기 짝이 없는 제 아들을 응시했다. 로비엔의 말이 모두 진심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였다. 로잘린을 해하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한, 로비엔은 정말로 그들을 법정에 세우려고 들 것이다.

그토록 제가 맡은 역할과 책임에 충실했던 아이가 이토록 눈이 돌아 버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왕비가 허탈하게 웃음 지었다.

“……어떻게든 지키겠단 거구나.”

더 자극하지 않는 편이 좋다. 하지만…….

“로비엔. 나는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네 비를 건드리지 않을 거야. 재판도 당연히 진행하지 않을 것이고.”

결론을 내린 왕비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제 앞에 앉은 로비엔을 응시했다.

“하지만 네가 한 말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반성하렴. 감히 네게 왕세자라는 지위를 준 부모를 법정에 세울 수도 있다고 말한 무례함과, 그로 인해 파생될 위기에 대해서는 고려치 않은 생각의 부족함에 대해서.”

왕을 법정에 세운다는 것은 쉽게 고려해서는 안 될 문제였다. 왕 역시 법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해당하는 시기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왕실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구나. 다음 세대의 왕은 네가 될 텐데, 네 위엄을 스스로 깎겠다고 어미를 협박해?”

어떻게 제 어미에게! 왕비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로비엔을 힐난했다. 기껏 틀어 올린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손으로 헤집을 수는 없어,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기도 했다.

“후. 그래. 이렇게까지 하는 데에는 그 애한테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거겠지.”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왕비는 종전까지의 격분을 내리누르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리하기까지는, 이미 아이를 잃은 후 눈이 돌아 있는 아들을 더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몇 번이나 상기해야만 했다. 지금 로비엔의 상태를 봐서는, 아이를 잃게 된 직접적인 사유를 그녀에게 묻지 않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로잘린에게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제 비이니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

“모자란 아비라 아이는 잃었어도, 아내까지 그리 잃을 수는 없으니까요.”

진심을 털어놓는 로비엔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가 사라졌다. 감정을 갈무리하는 속도가 왕과 왕비의 자식다웠다.

“어머니께선 이해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제멋대로 하겠다고 한 주제에 이해를 운운하다니. 제 아들이지만, 참 우스운 녀석이 아닌가 생각하며 왕비가 피식 웃었다. 언제 물어뜯을 듯 언성을 높이면서 대화를 나누었냐는 듯, 둘 사이의 분위기는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로비엔, 나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왕께선 너를 생각하셔서 그런 걸 거란다.”

“…….”

“그러니 네 아버지를 너무 미워하지는 말려무나.”

왕비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그만 가 보렴. 네 비에게 좋은 소식 전달해야 하지 않겠니?”

로비엔이 무언가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왕비가 선수를 쳤다. 평소와 같은 얼굴과 부드러운 목소리는 더 이상의 논쟁을 원하지 않으니 그만 나가 달라는 표현에 가까웠다.

그쯤 되어 제가 원하는 결과를 모두 얻어 낸 로비엔은 그만 나가 달라 등 떠미는 왕비의 표현을 받아들였다. 그는 순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떠나기 위해 짧게 인사하는 제 아들을 앞에 두고서도 왕비는 찻잔을 들어 올릴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다만, 묘한 시선만이 떠나는 로비엔의 뒤로 길게 머물렀다.

“대화는 잘 나누셨습니까?”

왕비의 궁을 나서자마자 밀리언이 다가와 물었다.

“내가 변한 건지, 원래 이랬던 건지 잘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워.”

“예?”

로비엔이 씁쓸한 얼굴로 왕비의 궁을 돌아보았다.

사실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걸 해 주고 싶은 마음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타인의 마음을 찢고 짓밟는 것은 사랑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도취일 뿐이었다.

로잘린을 마음에 품은 지금,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누구도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