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구름이 겹겹이 겹쳐진 탓에 달빛이 가려 사위가 유난히 어두웠다. 막 여관방에 들어선 남자가 초에 불을 붙이고 후드를 머리 뒤로 넘겼다. 그제야 방과 사내의 얼굴을 비출 만큼의 빛이 찾아들었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충혈된 눈동자, 초췌한 낯빛. 시원스레 웃던 그 미남자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인 모습의 다미안 래비어트였다.
“…….”
래비어트 저택에 비해 보잘것없는 숙소를 둘러보던 다미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뜻밖의 도망자 처지가 되어 버린 저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서였다. 피곤이 밀려들었다. 다미안이 지친 얼굴로 침대 발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쿠키가 무척 맛있네. 그대도 좀 들어 봐.’
다미안은 머릿속에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되짚어갔다. 첫 시작은, 베르타 궁에서 정확히 그를 지정한 연락이 왔을 때였다. 문득 발랄하게도 들렸던 왕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슬픈 일이지만 왕세자비는 진짜가 될 수 없을 거야.’
처음 왕비에게 보석을 판매하겠다고 베르타 궁에 갔던 날이었다. 차와 간단한 다과를 내어 티타임까지 함께하던 왕비가 뜬금없이 그런 말을 꺼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왕께서 로잘린을 쳐 내려고 마음먹었으니까.’
반지가 마음에 들었는지 한참이나 반지를 들여다보던 왕비가 미소 띤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다미안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버석거리는 쿠키를 씹던 것도 잊고 멍청한 얼굴로 왕비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대가 왕세자비를 좋아한다는 건 이미 알아. 아주 파다하게 소문이 났더군.’
‘모두 지난 일입니다.’
‘그래?’
왕비가 제법 안타깝다는 기색으로 눈을 깜빡였다.
‘하면 어쩐다. 왕궁에서 내쳐진 왕세자비는 곁을 지켜 줄 사람 없이 혼자가 되겠구나.’
왕궁에서 내쳐지고, 반려인 로비엔에게서도 버림받고, 제 아비에게도 이용 가치가 없으니 외면당하고. 결국은 홀로 남겠구나.
왕비가 신파극이라도 읊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미안은 여전히 왕비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입을 다문 채였다.
‘나는 여인으로서 그런 처지가 될 왕세자비가 가여워.’
‘…….’
‘그래서 그 애가 그보다는 나은 상황이 되도록 돕고 싶고, 거기엔 다미안 래비어트, 자네의 힘이 필요해.’
왕비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과 받침이 부딪치는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깃털처럼 가볍고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다미안은 로잘린이 왕비와 같이 행동할 수 없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얼마나 숨 막히는 생활을 해 왔을까? 그리고 지금은 모르겠지만, 이용 가치가 다한 후에 버림받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상처받을까?
‘제가 무엇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간단해. 로잘린과 만나는 자리를 만들고, 증표가 될 만한 물건을 건네어 줘. 그리만 하면 클로티 부인이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할 거야. 그 후엔 혹시라도 로비엔이 자네를 찾거든, 내가 따로 연락하기 전까지 숨어 있어.’
왕비가 그렇게 얘기하며 미소 지었다. 아주 다사로운 미소였다.
다미안 래비어트는 한동안 고민했으나, 결국 왕비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왕이 그러기로 마음먹은 한, 제아무리 똑똑한 로잘린이래도 궁 안에서 버틸 수 없을 터였다.
그래서 증표인 에메랄드 귀걸이를 가지고 로잘린을 찾았다. 하지만 사실 그것 대신, 로잘린에게 왕이 그녀를 내치기로 마음먹었다고 경고해 줄 의향도 없지 않아 있었다.
‘여자를 안고 싶거든 창부를 찾아가.’
그러나 로잘린은 그런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한 번 결혼했던 여자여도, 버림받더라도 저를 품어 주겠다고 마음먹은 다미안 래비어트를 상처 입힌 것이다. 그게 못내 자존심이 상했다.
로잘린을 추락시키는 데에 이바지해,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비웃어 주고 싶었다. 네가 아무리 똑똑해도 별것 없는 계집이라고, 그리 권력을 얻었다고 자부하더니 지금 네게 남은 게 나 말고 무엇이 있느냐고.
미친놈처럼 눈이 돌았다. 가문도, 상단도 생각하지 않고.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도, 다미안은 최근 로잘린과 관련된 꿈을 자주 꾸었다. 로잘린을 갖고 싶다는 강한 욕망에서 파생된 꿈이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다만, 상상 속에서는 항상 그리 아양을 부리며 안겨 오던 여자가 실제로는 그를 경멸하듯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만 도망치고 왕세자를 찾아가.’
‘아버지…….’
‘널 죽이지는 않을 거야. 죄목도 없지 않으냐. 왕족 시해 미수 혐의를 뒤집어쓴 클로티 부인도 여태 살아 있어.’
그래서 그렇게 체스판 위에 놓인 말처럼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바로 오늘, 아비인 이안과 간신히 접촉하고 난 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로잘린을 마침내 가질 수 있을 거라는 비틀린 생각에 눈이 멀어서 왕비가 시키는 대로 하고 보니, 막막한 지경에 이르고 만 자신이 그제야 보였다.
다미안이 떨리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마른세수를 했다. 결혼 전에도 로잘린에게 이처럼 집착하지는 않았는데, 왜 사춘기 어린 남자아이처럼 이런 짓을 했지? 이토록 충동적으로 변한 스스로에 대한 의문도 따라붙었다.
‘어차피 그 소문을 네가 낸 것도 아니지 않으냐. 목숨을 구걸하는 편이 골백번 나아. 왕세자가 원하는 대로 왕세자비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고, 구매자와 판매자로 만난 게 전부라고 그리 말만 하면 모두 끝날 일이다!’
다미안은 이안이 답답하다는 듯 저를 설득하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말이 맞다. 로잘린이 불러서 왕궁에 출입한 것을 죄라 할 수 없다.
게다가 왕세자비가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준 선물을 클로티 부인이 그리 사용할 줄은 그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는 진실로 그 선물이 어떻게 이용될지는 알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붙일 죄목이 있었다면 로비엔이 그리 비밀스럽게 사람을 보내어 만나자고 접촉할 것이 아니었다. 당장에 끌고 갔어야 맞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미안의 협력을 원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래비어트라는 가문의 이름을 영원히 버리고 도망 다니고 싶지 않다.
그래,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고만 하면 된다. 왕비도 그들의 대화 전부를 실토하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거기까지는 이해해 줄 것이다.
다미안은 그제야 긴장으로 굽어 있던 어깨를 폈다. 문밖에서 소리 없이 서성이는 발걸음을 알아차리기엔 그는 신체적인 기감과 거리가 멀었다.
“어서 오렴.”
왕비가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로 제 아들을 맞았다.
가을이 왔다고는 해도 아직까진 제법 더운 날씨인데도, 로비엔은 모든 옷을 다 갖추어 입은 상태였다. 신기한 건 그 답답한 모습이 금욕적으로도 보인다는 것이었다.
“아직은 날이 더운데 좀 편안하게 입지 그랬니?”
“느긋하게 풀어져 있을 때가 아니니까요.”
조금 편안한 옷을 입는 게 어떻겠냐는 물음에 돌아온 대답이 제법 서늘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어느 순간에도 긴장을 내려놓지 않겠다는 뜻인 것이다.
왕비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경고인지, 아니면 앞으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긴장해서 로잘린을 지킬 거라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조금 묘한 얼굴이 되었다.
“차 두 잔을 내오렴. 다과는 필요 없다.”
아들이라곤 하나 어찌 되었건 손님이다. 왕비가 손님맞이를 명령하자, 하녀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래, 어쩐 일로 오랜만에 이 어미를 찾았을까?”
문이 닫히고 오롯이 둘만 남게 되자, 왕비가 다정하게 물었다. 클로티 부인이 로비엔의 선 밖으로 밀려났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클로티 부인에게 국한된 일이지 왕비에게 해당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시다시피 저희 부부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었기에.”
“그래, 알다마다. 몹시 유감이란다…….”
왕비가 무척이나 안타깝다는 얼굴로 말을 흐렸다.
“로잘린은 이제 좀 괜찮니?”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너는 괜찮고?”
왕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로비엔의 손등에 제 손을 얹었다. 로비엔은 보드랍고 길쭉한, 고생 한번 한 적 없는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당연히 괜찮지 않습니다.”
예의상이나마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올 것으로 예상했던 왕비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왕비는 이내 안쓰러운 표정을 얼굴에 걸었다. 무척이나 빠른 표정 변화였다.
“그래도 죄인인 클로티 부인을 잡아 가두었으니 마음 풀려무나. 너희 둘 다 아직 젊고 건강하니 아이는 곧 다시 생길 거야.”
“아직 아이 생각은 없습니다. 비의 몸도 너무 약해졌어요.”
다사롭게 로비엔을 위로하던 왕비의 행동이 멈칫했다. 진의를 파악하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은 자연스럽게 침묵을 동반했다. 그 침묵이 깨어진 건, 하녀가 둘 사이로 찻잔 두 개를 내려놓은 이후였다.
“그리고 그 전에, 이 일을 소상히 밝히고 싶습니다.”
하녀가 다시 방을 나설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로비엔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날, 궁에는 무슨 이유로 오셨습니까?”
로비엔의 질문에 왕비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너도 알다시피 궁에 무엄한 소문이 돌기에 진의를 파악하고자 했단다.”
“…….”
“나는 물론 너를 사랑하고, 네 가족을 지켜 주고 싶지만……. 왕비의 자리는 어미로서 무조건 품는 자리가 아니란다. 만일 그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면, 나는 왕가의 어른으로서 그걸 좌시할 수 없어. 정결하고 모범이 되어야 할 왕세자비가 신혼부터 정부를 두고 왕실을 농락하다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 않니?”
왕비가 차가운 낯으로 위엄 있게 이야기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왕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게 맞았다.
“그걸 탓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면, 내가 손을 뿌리쳐서 로잘린이 계단에서 떨어졌다고 원망이라고 하고파?”
다소 날카로워진 왕비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항상 유순했던 아들이 저를 취조하듯 캐묻고 있다는 것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건 사고였을 뿐이야. 너도 알지 않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로잘린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은 클로티 부인을 끌어들이는 것을 용납한 것이다.
로잘린의 낙상은 그 누구도 의도치 않은 사고였으나, 로잘린과 로비엔은 원망할 사람이 필요했다. 왕비로서도 죄가 없는 클로티 부인을 포기한 것은 그런 로비엔과 로잘린의 억울한 처지를 고려한 처사였다.
진실된 의도와는 상관없이,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저는 그날 로잘린이 계단에서 나가떨어지지 않았더라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을지, 자꾸 의문이 들더군요.”
중요한 것은 겉면이 아니라 속내였다.
사실 클로티 부인을 잡아 족치고 화풀이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고작 하나의 장기 말에 불과했으므로. 배후를 찾아내지 못하면 로잘린은 언제고 다시 위협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