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67)화 (67/151)

# 67.

행정 제안 기구는 이미 왕의 허가를 받아 발족하였고, 궁 안에 빈 건물 하나가 그들의 활동을 위해 배정되었다.

시작부터 근본적으로 제한을 설정해 두어, 발언권을 가지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기관. 실제 그들이 제안한 내용이 시행령으로 내려져도 그 공은 감시자들의 것이 될 예정이었다.

사실상 허울 좋은 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평민들에게 왕실이 그들의 의견을 듣는 자세를 취하겠다는 형식상의 태도. 그러나 그들은 그마저도 제법 기꺼워했다. 어쨌거나 자신들의 의견을 계속 전달할 수 있다는 데 의의를 두는 듯했다. 어쨌거나 알지 못하는 것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은 분명히 달랐으므로.

대신 그들은 로비엔의 참석을 필수적으로 요청해 왔다.

“왕세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물론 왕이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로비엔을 포함한 그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시종이 문을 열자, 이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로비엔에게 인사를 올렸다.

로비엔의 시선이 빠르게 참석자를 훑었다. 카를로스 백작, 드마셸, 발란, 래비어트 상단의 상단주. 그리고 여타 참석자들. 그 안에 다미안 래비어트는 없었다.

로비엔에게 마음이 상한 왕도 매한가지였다. 로비엔은 빈 의자를 힐끗 보았다가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두 알다시피, 부왕께서 참석하지 않은 관계로 오늘 회의의 전권은 내게 대리되었다.”

그는 아버지인 왕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알에서 막 깨어난 오리가 어미를 쫓는 것 같은 마음으로. 실제로 왕인 그가 무엇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제대로 모른 채, 막연한 동경이었다.

안타깝게도 보람 없는 일이 되었지만. 한숨처럼 긴 숨이 샜다.

이제는 같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 없는 아비의 존재는 그의 마음을 흔들 수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시작하지.”

로비엔이 자리에 앉으며 회의가 시작되었다.

“오늘 안건은 비소 화합물의 유통과 사냥을 위한 민간 총기 배부입니다.”

로비엔이 안건을 소개하는 사회자에게 짧게 시선을 두었다. 왕가에서 꽤 중히 금하는 사안들이니만큼 왕족, 특히 왕의 허가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각 사안에 대해 분명한 이유를 들어 나를 이해시켜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이들에게 그것은 기회였다. 왕세자인 로비엔 역시 왕족이라 보수적인 면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현 왕인 앨런 3세보다는 유하고,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행정 제안 기구를 따로 두고 평민 세력을 제 밑으로 편입시키는 것만 봐도 그랬다. 적절한 이유만 따라붙는다면 더욱 쉽게 시행령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

“먼저 비소 화합물의 유통 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래비어트의 상단주 이안 래비어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그의 태도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로비엔을 살피는 이안의 눈은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많은 조사를 거친 결과, 저희는 비소 화합물의 유통이 칼라브리아 백성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라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 성분을 이용해 화장품을 만드는 척 수많은 사람을 독살한 예가 있어 병원을 제외하곤 유통이 금지된 것인데, 굳이 모든 사람에게 유통할 이유가 있나?”

로비엔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실 해당 성분은 독살에 이용된 경우가 잦았고, 몇백에 달하는 사람을 죽인 무서운 것이기도 했다.

특히, 비소 화합물을 이용해서 화장품을 만든 여자는 마지막 마녀로 몰려 죽었다. 그녀가 만든 화장품에 비소가 섞여 있었고, 귀부인들이 제 남편을 죽이는 용도로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밝혀진 직후, 비소 화합물의 유통은 금지되었다. 정당한 목적이 있는 금기 사항이었던 만큼, 해제하기 위해서도 마땅한 이유가 필요했다.

“정확히는 약용액 형태로 제조하여 민가에 유통하는 일입니다.”

“상세한 설명이 필요해.”

“물론 아시다시피, 비소는 독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사들은 오히려 그 점에 주목했습니다. 적당한 비율을 찾으면 병의 원인균에 독소로 작용하여 약이 될 수도 있다고요.”

로비엔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한 논쟁은 이미 그 역시 들어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최근 왕립 병원에서 보가트 상단의 후원을 받아, 비소 화합물을 이용한 약용액을 개발하였습니다.”

이미 사람들에게 시험도 완료했다. 이안은 새로 개발된 약용액이 신경통, 매독, 간질, 피부병 등 다양한 부분에서 효과를 보인다고 했다. 그 정도면 거의 만능 약이나 다름이 없었다.

병원을 찾을 수 없는 이들이라도 약용액을 어디서나 구할 수 있다면 삶의 질은 어느 정도 개선될 것이다. 더 많은 자가 접할수록, 사회적으로 더 많은 이득이 될 터.

“반대로, 비소가 가진 독성이 사료에 소량 첨가된다면 가축들 체내의 기생충을 죽이는 데도 이바지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건 아직 실험해 봐야 아는 일인 모양이고.”

“그렇습니다.”

이안이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약용액의 유통과 사료 개발 목적으로만 사용되도록 유통하는 조건이라면…….”

“그 두 가지면 충분합니다.”

이안이 반색했다.

“왕께 첨언해야 하니, 사료에 첨가하는 경우 독으로 작용하지 않는 범위를 찾아 첨부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이안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순순히 내려진 긍정의 답에 유난히 이안과 드마셸의 얼굴이 밝아졌다. 유통을 담당하는 상단을 가지고 있으니 가장 먼저, 가장 큰 혜택을 볼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리라. 로비엔은 그들을 시큰둥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특별히 혜택을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닌 탓에 그 꼴이 보기 좋지는 않았다. 사실, 로잘린의 부친인 드마셸이 조금만 더 싫었다면 길게 생각하지 않고 싫다고 말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민간 총기 배부에 대해서 발언을 시작하게.”

로비엔의 말이 끝나자마자, 중간 즈음에 앉아 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낯설지 않은 얼굴에 로비엔이 기억을 더듬었다. 레이첼 후작 부인이 주최한 모임에서 봤던, 제법 주취했던 사내였다. 이 그룹 내에서 그는 사상가 길버트로 불리고 있다 했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근래 산과 인접한 지역에서 맹수 출몰이 증가하였습니다.”

칼라브리아 내에서 총기의 사용은 제한된 계급과 근위대에게만 허락되어 있고, 활은 오래도록 배우지 않은 자가 아니면 사용하기 어렵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칼이나 창만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근거리 무기다 보니 당연히 다치고 죽는 자들이 제법 되었다. 대다수의 경우 장거리에서 총을 이용하여 제압할 수 있다면 무의미한 피해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줄줄이 토해 내는 이야기를 들으며 로비엔은 매끄러운 턱을 부드럽게 쓸었다. 고민의 증거였다.

“영지를 다스리는 자들은 무엇을 하기에 백성들이 맹수들을 직접 처리하고 있나?”

로비엔의 질문에 유일하게 이 자리에서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영지를 가지고 있는 카를로스 백작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엄연히 따지자면, 무의미한 피해는 영주의 탓이 맞았다.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세금을 받고도 마땅한 거래의 대가를 제공하지 못한 셈이 아닌가.

“보통 돈을 주고 사람을 부리지만, 밤늦은 시간 갑작스럽게 출몰하는 맹수들을 관리하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전하.”

내놓는 말이라곤 변명에 가까웠다. 애초에 산과 가까운 영지는 그 둘레로 초소를 마련하고 상시로 관리하는 자들을 두면 될 일이지 않은가.

로비엔의 얼굴에 마뜩잖은 표정이 떠오른 것을 발견한 카를로스 백작이 입을 다물었다.

“밤이 늦으면 그건 영지민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 생각한다는 건가? 그것참 시혜적인 발상이군.”

로비엔이 비꼬듯 이야기하자, 카를로스 백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총기 소유 배부에 관한 내용은 영주들의 불성실함이 기반인바, 기각해야 하지만.”

“…….”

“당장 민가의 피해가 만만찮은 바를 고려해, 사냥꾼과 영지 관리에 관련된 사병까지만 소유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그들에게 맹수 개체 관리를 시키지. 그리고 이후 관리가 되지 않는 영지에 부과할 수 있는 책임에 대해서도 논하는 시간을 갖도록.”

모두가 그리하겠다며 고개를 조아리는 가운데, 카를로스 백작만이 로비엔을 응시했다.

다음 왕위 계승권자이자 왕이 가장 사랑하는 적장자. 하지만 이전까지는 현명하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전체적인 그림을 보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요청이 합당하다면 허락을 내리고, 그렇지 않다면 거부했다. 중간 지점이나 대안을 찾아내는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

하지만 오늘 그가 마주하고 있는 왕세자는 이전과 어딘가 달랐다.

“카를로스 백작, 할 말이라도?”

“……아닙니다.”

그의 시선을 느낀 듯, 회의 안건이 적힌 종잇장을 팔락거리던 로비엔이 물어 왔다. 그제야 제가 무례할 정도로 왕세자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느낀 카를로스 백작이 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회의가 끝났으니 편하게 사적인 대화나 나눠 보지.”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이안 래비어트. 그대의 아들은 어디에 가고 그대만 혼자 참석했지?”

제 이름이 불리자, 이안이 숨기지 못한 긴장으로 몸을 파르르 떨었다. 로비엔의 시선이 그의 얼굴로 차게 떨어졌다.

이안과 로비엔 사이로 여러 시선이,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대의 아들과 나누어 보고 싶은 대화가 많은데, 부름에 도통 답하지를 않더군.”

“……아직 부족한 바가 많은 녀석이라 그렇습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나누기에는 적절치 않은 대화였으나, 그건 그들만 아는 속사정일 따름이었다.

“부족함이란 것이 하루 이틀 안에 채워지는 것도 아닐진대.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

“차라리 감히 왕세자를 기다리게 하다니, 죽이겠다고 협박해야 답이 오려나 궁금하던 참이야.”

“……!”

로비엔은 심상한 목소리로 이야기했으나 이안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적어도 멍청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던 아들이 어떠한 언질 하나 없이 벌여 놓은 일이 그의 목까지 죄어 오는 것이 순간순간마다 느껴졌다.

“좋은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어.”

가능한 한 빨리.

로비엔이 턱을 한 손으로 괸 채 담담히 덧붙였다.

“곧 좋은 소식으로 연락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재촉인가, 협위인가? 구분은 되지 않았으나, 이안 래비어트는 그저 왕세자가 원하는 대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다미안을 찾아내야 한다. 이안의 마음속에 결연한 의지가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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