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비극적이다. 이것이 비극이 아니면 무엇일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이 해치려 했다. 로잘린은 어떤 얼굴로 봐야 하고, 그의 가족들은 그가 어떻게, 어느 수준까지 벌할 수 있을까?
그는 혼란한 머릿속과 지긋하게 이어지는 가슴의 통증을 안은 채 로잘린이 있는 방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전하.”
편지라도 쓰고 있었던 모양인지 테이블 앞에 앉은 로잘린이 그를 발견하곤 놀란 얼굴을 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로잘린이,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울지도 못해서 어딘가 고장이 난 사람처럼 굳어 버린 제 남편을 바라보는 로잘린의 표정이 미묘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런 표정일까.”
로잘린이 다정하게 물었다. 그녀도 어린아이를 다뤄 본 경험은 없지만, 이 순간은 어린아이를 대하듯 부드럽게 대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상처였으니까.
“그대의 말이 맞았어요, 로잘린.”
아니나 다를까, 그 다정한 물음에 답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처럼 그가 입을 열었다.
목적어는 없었으나, 로잘린은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이미 예상하던 것이라 큰 충격은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듯 먹먹해 보이는 저 사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안아 드릴까요?”
로잘린이 물었다.
그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늘어트렸다.
로잘린에게 로비엔은 늘 태산처럼 단단하게 느껴지는 남자였다. 그러나 오늘, 제가 기댈 곳을 잃은 어린 왕자님은 비가 내린 뒤에 물러진 지반 같았다.
로잘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팔을 뻗어 목을 끌어안자, 익숙하게 뻗어 온 손이 로잘린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그는 언젠가 그녀에게 고백하던 날처럼 울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슬픔은 짐작할 수 있었다.
부모 자식 사이가 모두의 환상처럼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법이란 걸 새삼스레 깨닫게 되기도 했다. 부모와 나의 세계는 달라, 언젠가 나의 불가침 영역을 침범해 오는 날에는 허울 좋았던 관계조차 산산이 조각나 버리기 마련이므로.
로비엔은 늦은 밤까지 작게 몸을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 로잘린은 밤새 그런 그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 이른 새벽을 맞이하는 순간 로비엔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걸터앉은 채 한숨을 내쉬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잘린 역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 때문에 잠을 설쳤군요.”
“걱정되어서요.”
그런 로잘린의 움직임에 로비엔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로잘린은 꾸며 내거나 거짓을 고하는 대신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세상에서 비련함이라고는 다 짊어진 것 같은 가엾은 사내를 안아 주기로 마음먹었다.
로잘린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로비엔을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따뜻하지만 단단한 몸이 품 안에 가득 찼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왕의 의지대로 이 일을 모르는 척 묻었어야 했을까?
“말도 안 되지만 그냥 묻어 버렸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궁 안에 존재하는 최대 권력자가 겨눈 칼끝. 사실 그것은 오로지 로잘린과 죽어 버린 아이를 향해 있었다. 그러나 로비엔이 그녀를 사랑하고 아이를 사랑했기에, 동시에 그 역시 아프게 하는 무기가 되어 버렸다.
“우린 인간이라, 살아남았다는 사실과 살아갈 미래에 초점을 맞추는 게 당연하니까요.”
그 사실은 로잘린에게도 죄책감이란 형태로 맺혔다. 그건 그녀가 특별히 희생정신이 강하다거나 착한 여자라서가 아니었다. 로잘린이라는 존재만 없었다면, 혹은 그녀가 진실을 파고들지 않았다면, 이 가족은 모양 좋게 유지되었을 테고 그는 슬퍼하지 않았을 테니까.
사실 그 누구보다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기대나 조금 남은 게 전부였던 허울뿐인 가족관계일지라도, 그들을 저버리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왕은 그것을 알았기에 이토록 당당한 것이리라.
로잘린이 로비엔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기척을 느낀 듯, 로비엔이 제 상체 앞쪽에서 교차돼 있는 로잘린의 팔을 풀고 몸을 돌렸다.
“내 고통은 내 몫일 뿐이에요.”
“전하.”
“그대의 몫은 사실을 알아내는 일이고, 나 때문에 주저할 필요 없어요.”
로잘린은 그의 눈에 있는 미련이나 망설임 따위를 발견하기 위해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어디서도 그런 감정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말하는 목소리조차, 담담하지만 확실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말했잖아요. 두 번은 잃을 수 없다고.”
“…….”
“이젠 몰라서도, 외면해서도 안 돼.”
로비엔이 단호히 대단했다.
단순히 그녀의 감정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얘기가 아니란 걸 알기에, 로잘린 역시도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가 이만큼이나 자신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 이만큼이나 아이에게 애정을 주었다는 것 역시.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착한 여자는 못 돼요.”
로잘린이 한 손을 들어 그의 오른쪽 볼에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전하께서 하신 말, 그대로 믿을게요. 나중에 가서 물리고 싶다고 하셔도, 후회한다고 하셔도 소용없어요.”
로잘린의 말에 로비엔이 작게 웃었다.
“그렇게 해요.”
작게 이어지는 대답에 로잘진은 그에게 바투 몸을 기대었다. 위로하듯 가만가만 머무르다 떨어진 입술이 재차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로비엔은 부리끼리 부딪치는 듯 가벼운 입맞춤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를 가늠하기 위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동시에 눈을 감지 않은 두 쌍의 눈동자가 지척에서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 로잘린은 그의 눈에 서린 작은 불꽃을 볼 수 있었다.
로비엔은 금욕적으로 보였고, 실제로도 일상생활에서는 그런 편이었지만 자신에게 먼저 접촉해 오는 로잘린에게만은 예외였다. 그는 이미 그녀에게 육체적으로도 하릴없이 이끌리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순간에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탓이었다.
맞붙은 입술부터 코, 눈까지 천천히 시선을 끌어 올린 그가 한 손으로 로잘린의 턱을 아프지 않게 움켜잡았다. 부드럽게 당기는 힘에 이끌린 그녀의 입술이 로비엔의 입술에 짓눌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이렇게라도 나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로잘린.”
“…….”
“아직 그대의 몸은 회복이 덜 됐어요.”
사산이라고는 하나 아이를 낳았던 몸이다. 근육 하나 없이 말랑한 몸이 단기간에 회복하기엔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성욕에 눈이 멀어 제 비를 괴롭히기에는 그는 너무 이성적이고 현실적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말했잖아요. 내 고통은 내 몫이라고.”
로비엔이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
로잘린이 몸을 일으켜 앉으며 엉망이 된 잠옷 자락을 정리했다. 공기 중에 온통 드러났던 살결은 다시 가려졌으나, 그가 잠시 숨을 정리하고 몸을 진정시키는 동안 어쩐지 민망한 기분은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로잘린만의 감정이었던 듯, 가까이 다가온 커다란 손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나는 나가 볼 테니 좀 더 자요.”
“어디 가시려고요?”
“오전에 회의가 있어요. 참석을 요청해서 가 봐야 해요.”
로잘린이 여러 일로 도통 신경 쓰지 못하는 동안에도 그는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이 사람의 무서운 점이란 이런 게 아닐까. 상처받는 순간에도, 완벽하게 무너지지 않는다.
“다녀오세요.”
로잘린이 제 얼굴을 훑고 떨어져 나가는 그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침대 밖에서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웠다. 창문 너머로 완전히 깨친 햇빛이 스며들었다.
지나가지 않을 것 같았던 기나긴 밤 역시, 완전히 흘러간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