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로잘린은 라나 메르센데티를 시녀로 삼기 위해 독대하고 있다고 했다.
로비엔은 로잘린이 라나 메르센데티와 대화 중이어서 그를 만날 수 없었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로잘린에게 산책을 청하려 했던 생각은 어리석었다. 잠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등 뒤로 땀이 흐를 만큼 햇볕이 따가웠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로잘린이라면 산책을 하다가 쓰러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하늘은 무척이나 높고 청명했다. 로비엔은 하늘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곧 건국제가 머지않았음을 기억해 냈다. 날씨가 유달리 따뜻해 이른 봄에 로잘린을 비로 맞아들였는데, 벌써 가을의 중간에 있었다.
“전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로비엔이 등 뒤를 돌아보았다. 밀리언이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클로티 부인이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왜? 실토라도 하겠다던가?”
로비엔의 조소 섞인 물음에 밀리언이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티 부인이 실토할 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듯, 로비엔의 얼굴에 떠올랐던 비틀린 미소가 거짓처럼 사라졌다.
“물론 전부 신뢰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만, 일단은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밀리언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사실 클로티 부인이 진실을 말하리라는 어느 정도의 확신이 있어서였다. 그는 지난밤 동편 감옥에 붙여 둔 사람으로부터 클로티 부인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배후가 매몰차게 그녀를 버린 것이리라.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로비엔은 제게 인사하는 간수들을 가볍게 지나쳤다.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가장 안쪽 공간이 그의 목적지였다. 성큼 내디딘 발걸음 끝에 클로티 부인이 보였다.
유서 깊은 백작가의 영애로 나고 자라 시녀장까지 했던 여인이 머무르기에는 누추하기 짝이 없는 공간에, 클로티 부인이 무릎을 꿇은 채 로비엔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도 제법 낯선 꼴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로비엔을 마주한 적이 없었으니까.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모두 나가 있도록.”
로비엔이 손짓으로 감옥 안에 상주하던 이들을 모두 물렸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생긴 건가?”
눅눅한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까지 들릴 만큼 고요한 감옥 안, 클로티 부인은 발발 떨면서도 제 할 말을 하고자 입을 열었다.
“왕세자비 전하는 제가 아는 한 무결합니다.”
“그건 나도 이미 아는 바야.”
로비엔이 차게 대꾸했다. 멍청한 사람도 아니고, 당연한 얘기나 하자고 그를 끌어들인 것이 아닐 테니 인내심을 발휘하자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다미안 래비어트가 왕세자비 전하께 에메랄드 귀걸이를 바친 것도 사실입니다. 두 분께서 방 안에서 대화 중이실 때 제게 건네주었지요. 그것을 왕세자비 전하께 바치지 않았기에 그분이 모르셨던 것입니다.”
“……누구에게 바쳤지?”
“국왕 폐하께, 앨런 3세께 바쳤습니다.”
……누구?
바닥으로 무신경하게 던져 두었던 시선이 끼긱거리는 소리가 날 것처럼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언젠가 공포에 질렸던 얼굴 대신, 초연한 얼굴로 앉은 클로티 부인이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국왕 폐하께선 왕세자비 전하를 못마땅해하고 계십니다. 해서, 전하께서 왕이 되기 전에 그 무릎을 꺾을 방도를 찾아오라 하셨기에…….”
“거짓을 고하면 이 자리에서 목을 벨 것이다.”
로비엔의 말에 클로티 부인이 침을 꼴깍 삼켰다. 침 넘어가는 소리가 제 귓가를 스치는 것마저 소름이 끼치는 공간의 침묵 속에서, 그녀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선이 똑바로 마주쳤다. 얼마쯤 흔들리는 눈동자, 그러나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그녀는 대화를 이어 갔다.
“방금 고한 것은 모두 진실입니다.”
“…….”
“그 해괴한 소문을 퍼뜨리라 명령하신 것도 국왕 폐하십니다. 이 궁 안에 머무르는 자가 어찌 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하여 명령하신 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이내 클로티 부인은 바닥에 몸을 넙죽 엎드렸다. 윗전의 명령을 따랐을 뿐인 것이 죽을죄가 되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는 듯이.
“……전하.”
그 순간 그토록 아끼던 왕자님의 충격 같은 건, 클로티 부인이 알 바가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아직 그대의 말을 믿을 수 없다.”
“…….”
“부왕과 대화를 나누어 보기 전까진 못 들은 것으로 하지. 또한, 사실로 밝혀지더라도 그대는 모든 일이 마무리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로잘린이 이미 그의 부모를 의심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런데도 아니기를 바랐다. 그것은 로잘린에게도, 그에게도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지 않은가.
로비엔은 더는 들을 게 없다는 듯 차게 돌아섰다. 그러나 머릿속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들로 복잡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물을 포함해 먹을 것을 제공하되, 독이 들진 않았는지 검사하고 들이도록 해라.”
그런 순간에도 간수에게 클로티 부인에게 들일 음식을 검수하라고 말할 수 있는 이성적인 판단이 우스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배운 가르침이었기에.
“전하, 어디로 가십니까?”
“부왕을 뵈어야겠다.”
“언질 없이 들렀다간 허탕을 치실지도 모릅니다. 잠시만 기다리셨다가…….”
동편 감옥의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다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밀리언이 감히 로비엔을 붙잡았다. 그러나 로비엔은 그런 부관의 손을 밀어내고 성큼 걸음을 디뎠다.
기실 궁 안에서 그가 갈 수 없는 곳은 거의 존재치 않았다. 로비엔은 왕자들 중에서도 특히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탓이었다.
“부왕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서재에 계십니다.”
“왕세자가 잠시 뵙고자 한다고 말씀드리도록 해.”
시종장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자리를 비웠다 돌아왔다. 그는 소리 없이 로비엔을 왕의 서재로 이끈 뒤 문을 열었다. 책 하나를 손에 든 채, 왕이 그를 돌아보았다.
“언질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이지? 갑자기 아비가 보고 싶어 왔을 리는 없고.”
로비엔은 왕의 푸근한 미소를 복잡한 마음으로 응시했다.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렴.”
왕이 들고 있던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두 손끼리 마주 잡아 깍지를 꼈다. 느긋하게 등을 기댄 자세가 경청하겠다는 태도를 드러냈다.
로비엔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제게는 다정하기 짝이 없는 아비의 눈을 낯설게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클로티 부인을 가둬 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다마다. 네 유모였던 사람이라 그리 무서운 짓을 할 줄은 몰랐다만 역시 사람 속은 모를 일이지.”
왕이 참 안타깝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가 오늘 제게 고하기를.”
“…….”
“제 비가 다미안 래비어트에게 선물받은 것을 폐하께 바치고, 비의 부정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라는 명을 받았다 하더군요.”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그는 어느새 다정했던 표정을 말끔히 지운 제 아비의 얼굴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어차피 곧 죽을 것으로 생각하여 두었더니 쓸데없는 소릴 한 모양이구나.”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곧 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속내를 거짓 없이 드러냈다. 입가에만 흐르는 미소는 제 아들을 상처 입힌 것을 알면서도 잔인하도록 여유로웠다.
“네가 그 되바라진 평민 계집에게 마음을 준 것 같아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일을 이렇게 그르치다니.”
쯧, 혀를 차는 소리가 귀에 대고 접시를 깬 것처럼 크게 울렸다. 그는 충격을 받은 아들의 얼굴에도 개의치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차피 이미 알게 된 것. 그래, 솔직히 말하마.”
“…….”
“언제까지 그 천한 것을 네 비로 둘 셈이냐? 네가 아무리 마음을 줬다 한들, 그것의 출신을 생각하면 정부로 둬도 충분하지 않으냐?”
신분, 계급에 대한 강한 우월감이 있음은 당연히 알았다. 로비엔 자신과 그의 가족은 왕족이니까. 그러나 제 아버지가 가진 속내가 이토록 추악하고, 끝을 모를 정도로 아득한 것인지는 몰랐다.
그것만이 그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변명이었다.
“기회가 왔을 때 쳐 내고 왕가를 부흥시켜야 하지 않겠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추문을 이용해 왕세자비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관심이 없어질 때까지 뒷방에나 둬라. 리만 공녀가 아직도 성혼하지 않았다 하니 그녀를 왕자비로 맞이해. 그리되면 보가트 가문의 세력도 한풀 꺾일 테고, 리만 가문의 권력도 흡수할 수 있다.”
왕은 어차피 들킨 것, 제 아들의 동의까지 구해 움직이겠다는 기세로 로비엔에게 주절거렸다.
어찌 보면, 완벽한 왕족의 관점에서 본다면 왕의 말이 맞았다. 그들은 더 나은, 더 좋은 가문끼리의 융합을 원하고 그것이 왕가의 발전이 되기를 소망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로잘린이 아이를 낳게 할 생각도 없으셨습니까?”
“어차피 후사로도 두지 못할 것,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으냐?”
왕은 로잘린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가 곧 보가트 가문의 권력으로 작용한다는 걸 안 이상, 로잘린을 해치지 않고서는 보가트 가문을 짓밟을 수 없었으니까. 그리되면 자연스럽게 로잘린의 태에서 난 것 역시 불명예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로비엔에게도, 그 아이에게도 나은 선택이 아닌가.
왕은 진실로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의 손녀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저를 닮았을 수도 있었어요.”
“어차피 사내아이도 아니지 않았느냐? 로비엔, 냉정하게 생각하렴.”
힘이 빠진 아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왕은 오히려 로비엔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전에 로잘린과 로비엔이 평행선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왕과 로비엔의 관계가 평행선이 되었다. 로비엔은 그것을 깨달았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계집아이라도 낳아 보가트 가문의 환심을 샀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로잘린이 아니라 제가 보가트 공작가에 팔려 간 것이나 마찬가지니.”
로비엔의 말에, 왕이 눈을 크게 떴다.
“현재 왕가가 누리고 있는 것의 태반이 보가트 가문에서 온 것이니까요.”
“너, 방금 뭐라고……!”
“저는 계속 로잘린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노력할 겁니다. 왕가와 대치되더라도.”
로비엔은 인사 한마디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이 멈추라고 몇 번이나 소리를 질렀지만 귀담아듣지 않았다. 시종장은 망설이는 기색으로 왕과 로비엔을 번갈아 보다가 조용히 서재의 문을 닫았다.
조금 전까지 등 뒤가 시끄러웠던 것이 거짓인 양, 고요해진 문을 뒤로한 채 로비엔이 성큼 걸었다. 칼날처럼 따가운 볕이 그를 사냥감처럼 노리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