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왕비의 하녀가 지하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간수들이 지키고 있는 공간을 지나쳐, 가장 안쪽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클로티 부인을 발견했다. 며칠 전에 차려입었을 드레스는 바닥을 구르며 먼지투성이에, 구겨져 엉망이 되어 있었다.
“클로티 부인. 왕비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벽에 기대어 잠시 선잠이 들었던 클로티 부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내 도움이 필요했던 그녀는 창살을 붙잡고 속삭이는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 왕비께서 나를 버리실 리가 없지!
반쯤 기어서 창살 근처로 다가간 클로티 부인이 하녀가 전해 준 편지를 전달받아 허겁지겁 펼치기 시작했다. 왕비는 아주 똑똑하니까, 이 누명에서 벗어날 방법을 제게 알려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녀의 눈이 편지의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 나가는 동안, 제 할 일을 마친 하녀는 미련 없이 클로티 부인을 두고 돌아섰다. 왕비는 하녀에게 편지를 읽고 난 후의 반응까지 지켜보라고 명령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녀가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막 밟았을 때였다.
“……!”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놀란 하녀가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어 섰다. 뒤돌아본 시야에 클로티 부인이 잡혔다. 한 손에 들린 편지를 형편없이 구긴 채 바닥으로 엎어져 흐느끼는, 드물게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볼일 다 봤으면 나가지 않고 뭐 해? 당장 나가!”
클로티 부인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억억거리며 울었다. 그러나 하녀는 클로티 부인을 오래 지켜볼 수 없었다. 간수가 귀찮다는 기색으로 하녀의 등을 떠밀어 내보낸 탓이었다.
“오밤중에 이게 무슨 짓이오? 정신 나간 것도 정도껏 하지.”
간수가 귀가 아프다는 듯 창살을 걷어차며 윽박질렀다. 온종일 클로티 부인을 지키고 있으며 시달린 것에 짜증이 난 터였다. 게다가 현행범으로 붙들려 온 클로티 부인은 그에게 한갓 범죄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클로티 부인이 귀족으로 나고 자랐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녀의 성격상 간수의 행동에 무례하다고 지적할 만도 했다. 하지만 클로티 부인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어떠한 생각도 이어 가지 못한 채, 더럽고 축축한 바닥에 이마를 대고 서럽게 울기만 했다. 그저 절망만이 이 순간 그녀의 친구였다.
“허으윽, 흑, 끄윽…….”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돌아온 것은 사랑하던 왕자님께 버림받는 일, 그리고 짓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이 감옥에 갇히는 일이었다. 시킨 일을 수행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라곤 어째서 시키지 않은 짓을 했냐는 발뺌과 가문을 생각하여 자결하라는 편지뿐이었다!
나는,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죽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저를 지켜 줄 수 있다고 믿었던 왕비는 이미 자신을 버렸고, 오히려 자진한다면 가문의 명예만은 구해 주겠다고 했다.
여태까지 무엇을 위해서 움직인 것이었을까. 결혼을 앞두고 있다가 자신 때문에 모두 엎어져 버렸을 아들이 생각났다. 여태껏 살아 있다면 클로티 가문의 명예에 먹칠했다며 길길이 날뛰고 있을 남편의 얼굴도 떠올랐다.
클로티 부인은 눈을 감은 채 흐느꼈다. 여전히 손에 꼭 쥔 왕비의 편지는 그녀의 처지만큼이나 볼품없이 구겨져 있었다.
라나 메르센데티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왕비의 응접실 문턱을 넘었다.
그저 작은 위로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냈던 편지에 돌아온 왕세자비의 답장은 직접 만나 얘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조금 흘려 쓴 듯한 필체에서는 그녀의 감정을 읽을 수 없어서, 라나는 무척 긴장한 상태였다. 혹시라도 주제넘은 소리를 했다고 경을 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백작 부인으로 수도에서 한동안 기거했지만, 라나는 궁정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윗분들의 기준에는 무언가 마땅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눈에 띄지 않게 심호흡을 몇 번 하고, 허벅지 위에서 초조하게 손을 맞잡으면서 기다리기를 잠시. 문이 열리고 로잘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나 메르센데티가 왕세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다시 보네요. 반가워요.”
로잘린이 부드러운 얼굴로 라나를 맞이했다. 한껏 긴장했던 마음이 다소 부피를 줄였다. 직전까지의 고생으로 다소 피곤해 보이는 낯이긴 했지만, 로잘린의 얼굴에서 어떤 불쾌함도 발견할 수 없어서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오히려 로잘린은 제법 친근한 목소리로 라나의 근황을 물어 왔다.
“왕세자비 전하의 은혜를 입어 편안히 지냈습니다.”
간신히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로잘린이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메르센데티 양을 해치려고 부른 게 아니니까요.”
“메르센데티 양이라니…….”
“혼인이 무효 처리가 되었으니, 미혼의 아가씨잖아요.”
라나가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이혼이 아니라 무효 처리가 됐다고는 해도, 그녀는 결혼하고 아이를 둘이나 낳은 부인이었다.
“그냥 편하게 라나라고 불러 주십시오, 전하.”
“그래요, 라나.”
하녀가 차를 가져왔다. 로잘린의 무감한 시선이 잠시 원형의 파동을 그리는 찻물에 닿았다. 라나는 그 모든 것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무표정하고 그늘이 비치긴 했지만, 슬픔에 잠겨 버린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라나는 그 점이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몸은 어떠십니까?”
라나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로잘린이 고요히 시선을 들어 올려 라나와 눈을 마주쳤다.
“괜찮아요. 시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는 건 마음 쪽이었지만, 라나의 편지를 받은 이후로 많이 좋아졌거든요.”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로 저는 바랄 게 없습니다.”
라나가 가슴 앞에서 두 손을 포개어 잡은 채 부드러이 웃었다.
“사실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어요.”
로잘린은 그런 라나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그녀를 부른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라나는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로잘린을 응시했다.
“알다시피, 내가 지금 시녀가 한 명도 없어요.”
“아…….”
“원래 있었던 시녀들은 일전에 한 번 정리되었고, 최근 시녀장이었던 라비앵 클로티는 나를 위험에 빠뜨려 독방에 수감되어 있거든요.”
사실 시녀쯤 없어도 상관없었다. 드마셸을 제외하면, 여전히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로잘린에게 알현 요청을 하는 이가 없었으니까. 클로티 부인이 맡아 주던 일은 자신이 하면 그만이었고, 들어오는 편지들은 중요하지 않다면 마리에게 답장을 하라고 해도 무관했다.
그러나 로잘린은 라나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과 같은 처지를 경험한 사람에 대한 동병상련이기도 했고, 그녀가 처했던 비극 앞에서도 귀부인답게 대처했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리 우아한 사람은 못 되거든요. 누군가 조언하고, 말 상대가 되어 줄 사람이 필요해요.”
“저는 그저 한미한 자작가의 일원일 뿐입니다, 전하.”
라나는 겸양의 태도를 보이며 어름어름 물러섰다. 로잘린은 조금 식은 찻잔을 들어 올려 향긋한 찻물을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대에게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라나.”
“…….”
“내가 그대를 구해 주기는 했지만,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을 테니까.”
이제 라나 역시 혼인에 큰 의미를 두지 않지만, 아가씨 때처럼 혼담이 들어오지 않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뭐가 되었든, 이혼 소송에서 이름이 오르내린 터라 라나를 단순한 피해자로만 보지 않는 자가 많았다. 라나의 부모는 그녀를 안타까워할 뿐 어떠한 부담도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라나는 자신이 메르센데티 자작가의 명예에도 먹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음을 모르지 않았다.
“물론 내가 격이 떨어지는 왕세자비라, 엄청난 영예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찌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라나가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대의 부모도, 그대도, 조금쯤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로잘린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무척 당당해 보이는 미소기도 했다.
“어째서 제게 이런 기회를 주십니까? 격이 떨어지는 시녀를 두었다, 전하께 누가 될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라나는 자신의 은인에게 도리어 폐를 끼치게 되는 것이 아닐지 걱정했다. 자신에게는 더없는 기회이나, 로잘린에게는 어느 모로 보아도 딱히 이득으로 보이지 않아서였다.
“사심이에요. 아예 없는 것보다는 누구라도 한 명 있는 것이 명예에도, 내 생활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
“나를 대하는 그대의 태도가 진심이었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점도 마음에 들어요. 귀부인 같은 우아한 자세도.”
로잘린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이 말했다. 달칵거리는 소리에 로잘린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가 풀어졌다. 물론 어지간해서는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잠시였다.
“물론 싫다면 강요하지 않아요, 라나. 이러기 위해서 그대를 도운 건 아니니까, 편할 대로 해요.”
라나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 역시 로잘린의 배려라는 것을 알 것 같아서였다.
“……제가 전하께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귀족으로 나고 자라면서 가장 중요히 여긴 것은 가문의 이름이었다. 결혼 전에는 메르센데티, 결혼 후에는 루드. 그 이름이 그랬다. 라나에게는 목숨과도 같던 명예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산산조각이 날 위기에 처해 이대로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던 가장 절망적인 순간, 예상치도 않았던 손길을 건네 온 사람. 모두가 눈을 흘기며 미워하지만, 결코 그런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 라나에게는 로잘린이 그랬다.
어차피 이미 한 번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삶이니, 로잘린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바칠 수 있었다. 편지 역시 그런 마음으로 보낸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하겠노라고.
하지만 한 점 오점이라도 된다면 그것은 피하고 싶었다.
“글쎄. 그건 나도 모르죠. 나는 그대가 내 사람이 되어서 움직여 주기를 원할 뿐이에요.”
로잘린은 감정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하는 태도가, 라나가 알고 지냈던 많은 귀족과는 분명히 달랐다. 라나가 곧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토록 부족한 게 많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두고자 하신다면…….”
라나가 잠시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제게 왕세자비 전하를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십시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제게 영예를 내려 줄 것을 청했다.
로잘린은 정식으로 궁에 들어오기 전까지 얼마간의 말미를 주었다. 라나 메르센데티는 이제 왕세자비의 유일한 시녀이자, 그녀가 직접 뽑은 유일한 시녀가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