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왕족 시해 미수 혐의라니,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말입니까!”
제가 무엇을 했다고 왕족 시해 혐의를 뒤집어쓴단 말인가? 클로티 부인이 흥분해서 눈을 까뒤집고 소리 질렀다.
로잘린은 감흥 없는 얼굴로 그녀의 발작을 지켜보았다.
“아이까지 가진 나를 계단에서 떠밀었으니, 그게 왕족 시해 의도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제가, 제가 언제 당신을 계단에서 떠밀었습니까!”
왕비가 뿌리치는 힘에 휘청거리다 혼자 나가떨어진 게 아닌가. 그걸 본 자들이 한둘이 아닌데 제게 왕족 시해 혐의를 묻는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게 가능할 리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클로티 부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가능하지 않다면 어떻게 이렇게 협박함에 거리낌이 없고 당당할 수 있단 말인가?
“왕비께서 나를 밀치셨을 리는 없고, 하면 내가 혼자 멍청하게 넘어지기라도 했단 소리인가?”
로잘린이 물었다.
클로티 부인은 대답하지 못한 채 손을 달달 떨었다. 감히 왕비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이 오리라 예상도 못 하고 일을 저질렀어?”
허탈한 일이었다. 저토록 별것 아닌 인간의 눈치까지 봐 가며 살살 맞춰 준 결과가 이따위라니.
“아들이 곧 혼사를 앞두고 있다지.”
로잘린이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예상치 못한 화젯거리에 클로티 부인이 흠칫하며 로잘린을 올려다보았다.
“아들 앞길을 막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전부 사실대로 말해.”
“어찌, 어찌 제 아들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으려 합니까!”
클로티 부인이 고르고 골라 괜찮은 가문의 영애로 엮었을 테지만, 그것을 깨 버리는 일쯤은 아주 손쉬웠다.
클로티 부인이 숫제 비명을 지르듯 소리를 질렀지만, 로잘린은 무심히 넘겼다.
“너도 내 자식을 죽였잖아.”
클로티 부인이 아득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로잘린과 로비엔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로잘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식보다 충성인지, 아니면 제 뒤에 있는 배후가 보호해 줄 것으로 철석같이 믿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입을 다물겠다…….”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로잘린이 작게 웃었다.
“밀리언.”
그 꼴을 지켜보던 로비엔이 제 부관의 이름을 불렀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제 주인의 부름에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고 밀리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죄인을 지하 감옥에 가둬라. 물 한 모금도 주지 말도록.”
밀리언이 명을 받들어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두 명의 기사가 바닥에 거의 널브러진 클로티 부인의 양팔을 하나씩 붙들고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막막한 얼굴의 클로티 부인이 휘청거렸다.
“잠시.”
클로티 부인을 끌고 나가려던 기사들이 로잘린의 부름에 멈추어 섰다. 로잘린은 매끄러운 동작으로 클로티 부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게서 소중한 것을 하나 앗았으면 너도 빼앗겨야지.”
그게 내 셈법이거든.
언제 가까이 다가와 위협적인 말을 내뱉었냐는 듯, 부드러운 동작으로 물러난 로잘린이 로비엔의 품에 기대었다.
“또 어지럼증이 있습니까?”
로비엔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로잘린을 내려다보며, 한쪽 팔을 그녀의 허리에 둘러 감았다. 로잘린이 아양을 부리듯 머리를 그의 가슴팍에 기대며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마녀 같은 것! 클로티 부인은 도움을 요청하듯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첫아이를 어이없게 잃은 왕세자비를 가련하게 바라보면서 저를 경멸하는 낯선 궁인들의 시선 앞에 아연해졌다. 그제야 허허벌판에 홀로 버려진 자신을 깨달았다.
“괜찮으신가요?”
로비엔은 반항 한번 못 하고 끌려가는 클로티 부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로잘린의 목소리에 시선을 내렸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여름날의 숲 같은 눈동자가 잘 세공된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이 눈에 속절없이 이끌렸지. 하지만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마지막 남은 기회를 놓쳐 버렸다면, 영원히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그렇게 생각하자, 곱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새삼 애틋해졌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좋든 싫든 전하를 어릴 적부터 키워 온 사람이잖아요.”
더구나 클로티 부인에게 뒤집어씌운 것은 누명이었다. 로잘린은 까닭 없는 악녀는 아니었지만,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성녀 같은 유형도 아니었다. 클로티 부인을 위협한 것을 후회하거나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마음이 걸릴 뿐.
살랑거리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겨 주며 그는 작게 미소 지었다.
“나는 그녀가 당신에게 했던 짓들을 알고 있어요, 로잘린.”
“…….”
“어린 날의 나를 길러 줬다는 것이 그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도.”
다정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걸린 아름다운 얼굴. 하지만 그가 그런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아주 제한적인 사람들뿐이었다. 그중 한 명이었던 라비앵 클로티는 그 얼굴을 볼 수 있는 자격을 잃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선하고 관대한 사람이지만, 그 관대함은 어디까지나 그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의 일이었다. 그 수준을 넘어서면 날이 벼려진 칼을 들어 단숨에 심장에 꽂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의 아름다움과 다정함에 속아 제멋대로 굴다간 모가지가 날아가기 쉬웠다.
“제가 비겁하다고 생각하진 않나요?”
“그대가 왜?”
로비엔이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물었다. 라비앵 클로티는 자신을 계단에서 밀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려고 달싹이는 입술이 그의 손길에 다시 닫혔다.
“미안하지만, 로잘린.”
“…….”
“그대가 눈 뜨기도 전에 왕족 시해 미수 혐의로 그녀를 가둔 것은 나였습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자를 벌하기 위해, 없는 죄를 만들어 묻는 게 문제가 되냐고 묻는 무해한 얼굴을 보며 로잘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당신도 이 궁 안에서 나고 자란 고귀한 혈통이었지.
분명 로잘린은 그런 왕족들의 태도에 데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지금 그의 행동은 혐오스럽기보다는 기꺼웠다. 이만큼, 또는 그 이상, 그가 자신에게 준 마음을 알 수 있었으니까.
커다란 방 안, 홀로 남은 왕비가 의자에 앉아 피곤한 눈을 문질렀다.
방금 전달받은 소식에 의하면, 클로티 부인은 왕족 시해 미수 혐의로 로비엔의 명령 하에 지하 감옥에 갇혔다. 며칠 전까지는 제 궁 어딘가에 꼭꼭 숨겨 두고, 제 채근에도 대답 한 번을 하지 않아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던 것에 비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그 앤 하여간 중간이 없다니까…….”
왕비가 작게 중얼거렸다. 클로티 부인이 알아서 일찍이 발 빼고 도망쳤더라면 아마 크게 문제는 되지 않았겠지만, 그 어리석은 여자는 그러질 못했다. 로비엔은 책임 소재를 묻기 위해 그런 클로티 부인을 붙잡았고, 악에 받친 로잘린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배신자로 낙인찍힌 그녀는 로비엔에게서 영영 버림받을 것이다. 아니, 이미 버림받았지. 제 유모라고 제법 아끼던 인물이었는데도 미련 하나 없이 누명을 씌워 말끔하게 잘라 낸 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사실 그렇게 된 이상, 클로티 부인은 왕비에게 있어서 더는 쓸 만한 패가 아니었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남든 로비엔은 결코 로잘린이나 자신 곁에 그녀를 두지 않을 테고, 그럼 그녀는 어떠한 흥미로운 사실도 그들에게서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
“이대로 죽어 없어지게 내버려 두는 편이 나으려나.”
왕비의 긴 손톱이 테이블 위를 톡, 톡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흐음, 상황을 가늠하듯 흘러나오는 비음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곧 왕비는 마음을 정했다. 그녀는 하녀를 불러 편지지와 펜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발발거리며 나갔다 온 것이 테이블 위로 편지지와 펜을 올려 두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왕비가 가볍게 펜을 집어 들어 사각거리며 문장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글자가 번지지 않도록 완성된 편지를 조금 말린 뒤, 작게 접은 왕비가 재차 하녀를 호출했다.
“동편 지하 감옥으로 가서 클로티 부인에게 이 편지를 건네주렴.”
클로티 부인이라면 죄를 지어 갇힌 사람인데, 어째서? 그러나 그것을 물을 만큼 눈치 없는 것은 아니라, 하녀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잖니. 나라도 챙겨 주지 않으면 누가 챙겨 줄까.”
말하지 않아도 그 속을 안다는 듯, 왕비가 제법 가련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하녀의 손바닥 위에 작게 접은 종이를 올린 왕비가 어서 나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하녀는 몸을 숙여 그녀에게 인사한 후 떠났다. 왕비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창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문 밖으로 막 건물을 빠져나간 하녀가 보였다. 그녀의 종종걸음은 왕비의 명대로, 동편 감옥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이 보낸 편지를 읽고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녀는 제가 쓴 편지의 내용을 떠올리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다시 왕비 홀로 남은 방 안에서는, 작은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친애하는 클로티 부인에게.
무거운 마음으로 이 편지를 작성합니다.
어릴 적 나이대가 비슷한 공녀를 만난 후, 왕비로서 입궁하기까지 10년, 우리는 좋은 친구로 지내 왔지요. 입궁한 후로도 그대는 나의 시녀로서 수족이 되어 주었고, 왕세자 로비엔의 유모로서 아주 많은 일을 해 왔기에 나는 그대를 몹시 아꼈습니다.
그런 그대가 베르타 궁의 시녀장이 되던 날은 내게도 아주 특별했답니다. 그대의 성공이 내게도 몹시 기꺼웠고, 나는 그대가 더욱 많은 영광을 누리기를 바랐습니다.
그러기 위해 그대가 할 일은 분명했지요. 왕가의 번영을 위해 힘쓰고 조력할 것, 단 한 가지였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맡겼던 일들은 모두 그와 같은 목적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클로티 부인, 어찌 이번엔 그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을 하였습니까? 아무리 왕세자비가 평민 출신이라고는 하나 분명 왕세자의 정비이며 어엿한 왕족인 것을, 어찌하여 감히 그녀를 해치려 하였습니까? 나를 포함하여 모두가 덧없이 사라져 간 왕세자의 첫아이 생각에 마음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신분제에 얽매여 살았다 한들 씻지 못할 죄를 지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대가 아무리 나의 가까운 벗이었고 수족이었다 하더라도, 그 죄를 내가 대신 사하여 줄 수 없지요. 그대의 가문도 끔찍한 죄의 여파를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자진하여 목숨을 끊는다면, 나는 칼라브리아 왕의 비가 아닌 라비앵 클로티의 친우로서 가문의 명예만은 지켜 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가문의 영달을 생각하길 바라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그대의 벗, 줄리 피베체 르 칼라브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