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62)화 (62/151)

# 62.

밀리언이 집무실로 들어서는 로비엔을 향해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옥을 걷는 듯 파리한 얼굴이었던 로비엔의 안색이 한결 나아져 있었다.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왕께서도 한동안 왕세자 전하를 편히 쉬게 하라 명령하셨으니까요.”

예상치 못한 비극을 맞닥뜨린 아들 내외가 조속히 회복하기를 바란다는 게 이유였다.

로비엔은 왕이 준 한동안의 말미를 수용했다. 그에게도 로잘린의 일에만 힘을 쏟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다미안 래비어트를 추적하는 데에만 총력을 기울여.”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 꼴을 만들어 놓은 다미안 래비어트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어떻게 알았는지, 다미안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밀리언은 그 소식을 전달하던 순간, 로비엔의 눈빛을 영원히 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계속 추적하고 있습니다. 곧 잡힐 테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극도의 분노로 핏발이 선 눈동자와 격렬한 감정의 파도. 마치 자신의 목에 칼을 댄 듯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바로 잡히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다행이야. 그랬으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을 테니까. 증인으로 삼을 수 있는 자가 죽어 없어지면 안 되지.”

물론 그 격랑은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집어삼킬 자와, 마땅한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래비어트 가문의 일원들에게 사람을 붙여 둬. 특히 그 아비 이안 래비어트와는 언젠가는 접촉할 테니까. 그리고 다미안 래비어트를 발견하면 무조건 생포해 궁으로 들여와.”

“…….”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

몸은 얼마든지 상해도 상관없다는 소리를 하는 왕세자의 얼굴은 얼마쯤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견 잔혹해 보이기도 했으나, 그가 잃은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께서 시녀를 들일 모양이니 하인들에게 적당한 방을 하나 마련해 두라 일러.”

“어느 가문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메르센데티 자작가.”

로비엔의 대답에 밀리언이 아, 하며 작은 탄식을 흘렸다. 위세가 대단한 가문은 아니긴 했으나, 그런 가문일수록 평민 출신 왕세자비에게 콧대를 세울지도 모르는 상황을 생각하면 오히려 적합했다. 이전에 쫓겨난 시녀들이 그랬으니까.

“왕세자비 전하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밀리언은 자연스럽게 로잘린이 회복에 차도를 보이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왕세자비가 도통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동안, 그의 주군은 속에서부터 곪아 가고 있었으니까.

“시녀를 들일 생각을 하시는 걸 보면 어느 정도는 회복이 되신 듯하여.”

사실 밀리언은 원래 로잘린을 좋아하지 않았다. 왕의 적장자인 로비엔의 명예와 평판을 깎아내리는 수치처럼 느껴지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인상은 차근히 바뀌기 시작했다. 로잘린은 로비엔에게 조언을 할 줄 알았고, 세상을 볼 줄 알았다. 로비엔의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겠다 짐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왕과 왕비로부터 끝없는 멸시를 받던 로잘린은 아이를 잃었다. 동정을 품지 않기란 어려웠다. 그도 세 아이의 아버지였으니까. 어리고 연약한 아이와 임산부를 가엾어하는 맘은 당연했다.

“어느 정도 회복은 되었지만, 아랫것들에게 매사 신경 쓰라고 일러둬.”

싸늘하게 굳어 있던 로비엔의 표정이 다소 허물어졌다. 밤마다 찾아 헤매던 것이 저를 안아 주던 품이었는지, 그와 같이 잠들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로잘린의 몽유병도 사라졌다. 대신, 로비엔이 늘 로잘린을 향한 걱정과 초조함으로 얼룩져 있었다.

밀리언은 이제 로잘린을 자신의 또 다른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문대로 로잘린이 손아귀에 움켜쥔 것이…….

“그리하겠습니다.”

로비엔의 심장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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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갇힌 게 며칠째지?

클로티 부인이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며 손톱을 잘근거렸다. 그녀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했고, 그녀에게 지시를 내린 주인은 클로티 부인을 지켜 주겠다고 호언장담했었다.

그러나 지금 클로티 부인은 로잘린이 계단에서 낙하해 아이를 잃은 이후 독방에 갇힌 채, 하염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왕비를 포함한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고, 그녀에게 어떠한 연락을 취하지도 않았다.

왕비께서 한평생을 함께한 자신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만은 자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버려진 채로 느낄 수 있는 것은 공포뿐이었다.

클로티 부인은 덜덜 떨며 복도에 서 있던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던 로비엔의 표정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선하고 다정한 왕자님의 얼굴이 그토록 무섭게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특별히 자해한다거나 하는 행동은 하지 않고 조용했습니다.”

그때,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렸다. 로비엔의 부관인 밀리언의 목소리였다. 그가 이렇게 보고할 대상, 왕세자가 직접 이곳으로 행차했단 뜻이었다.

클로티 부인이 작게 침을 삼켰다. 조용한 방 안에 꿀꺽, 하는 침 삼키는 소리가 울리는 순간 내내 굳게 잠겨 있던 문이 밀려났다.

“…….”

조금은 수척해 보이지만 평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의 로비엔이 문밖에 서 있었다.

“라비앵 클로티가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클로티 부인.”

그러나 목소리만은 평소와 다름이 없어서, 클로티 부인으로서는 그의 감정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화가 났는지, 어쩔 수 없는 일이려니 묻으려는 것인지, 자신을 벌하고자 하는 것인지, 용서하려는 것인지.

설마하니 어릴 적부터 저를 길러 준 유모를 해치려나 싶으면서도, 기묘하게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에 불안한 마음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저벅저벅, 가까워지는 로비엔의 발소리를 들으며 몸을 떨었다.

그가 방 안으로 완전히 발을 디디자, 문이 굳게 닫혔다.

“어릴 적 나를 길러 주었던 자애롭고 친절한 유모를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어서 마음이 무거워.”

그저 문이 닫혔을 뿐인데, 무언가 잠기는 소리처럼 들렸다. 어쩌면 그것은 이 아름다운 왕자님의 마음일지도. 클로티 부인은 황망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대는 그대의 아이들보다도 나를 더 귀애했으니까.”

“전하.”

“권력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알아. 그걸 모를 정도로 천치는 아니야. 그랬기에 궁 안에서 그대에게 더 힘을 실어 주었던 것도 있지.”

물빛 눈동자가 클로티 부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결코.”

로비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클로티 부인은 확신했다. 한정된 로비엔의 마음에서 클로티 부인은 쫓겨났고, 그녀를 쫓아낸 뒤 문은 잠겨 버렸다.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물을 게 있어서 여기까지 왔으니 꼭 답변해 주길 바라.”

“말씀하십시오.”

클로티 부인이 엉망인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대답했다.

“그날 내 비를 찾아와, 무슨 얘기를 했지?”

“저는. 그저, 그저…….”

“똑바로 이야기해.”

“저는 그저 제가 듣고 본 대로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다면, 맡은 바라도 해낼 수밖에. 조금 전까지도 달달 떨던 주제에, 클로티 부인이 고개를 번쩍 들며 이야기했다.

“왕세자비 전하께서 계속 그 사내와 은밀히 접촉하시는 걸 이 라비앵 클로티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귀걸이도 다미안 래비어트가 왕세자비 전하께 바친 것입니다. 저는 거짓 없이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전하!”

그러고는 제 진심을 믿어 달라는 듯 무릎까지 꿇은 채 소리를 높였다.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내고 싶은 건지, 문밖에 들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왕세자비 전하께서 부정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습니다. 해서 이 라비앵 클로티가…….”

그 순간이었다. 로비엔이 이 방으로 들어온 이후 조용히 닫혔던 문이 벌컥 열렸다. 왕세자가 안에 있다는 걸 생각하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무도한 짓이었다. 클로티 부인이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려던 찰나, 낯설지 않은 얼굴을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드레스가 무거워 보일 정도로 낭창거리는 팔다리, 아직은 고된 안색. 그것들은 분명 사람을 가련해 보이게 만드는 요소들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 아이를 잃은 여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서슬 퍼런 기색의 로잘린이 드레스 자락을 추스르며 들어섰다.

“로잘린.”

클로티 부인이 로비엔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로잘린의 이름을 부르기는 했지만, 무람없음을 탓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아직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았으니 쉬고 있으라고 했잖아요.”

로잘린이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떼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클로티 부인에게 다가왔다.

그래 보았자 마른 나뭇가지 같은 팔을 가진 계집애일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두려울까. 사나운 짐승에게 쫓기는 듯 벌떡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클로티 부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로잘린은 그런 클로티 부인을 보며 가만히 웃었다.

“괜찮아요. 어찌나 크게 떠드는지 소란해서 누워 있을 수도 없던걸요.”

“…….”

“그나저나,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보겠어요, 클로티 부인?”

이제 막 스물, 저깟 어린 계집이 감히 저를 위압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이 궁 안에서 자신이 살아온 세월이 있고, 왕과 왕비가 제 뒤에 있는데.

“이 라비앵 클로티의 이름을 걸고 당신이 부정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다고 말씀…….”

그 순간이었다. 로잘린이 삽시간에 악을 지르듯 소리치는 클로티 부인을 향해 다가왔다. 무릎을 굽혀 앉는가 싶었는데, 직후 찢어지는 마찰음이 울렸다.

클로티 부인이 말을 잃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잘린이 한 손으로는 클로티 부인의 멱살을 움켜쥐고, 한 손으로는 매섭게 뺨을 갈긴 것이었다.

삐, 하는 소리가 들렸다가 이내 귀가 먹먹해졌다.

“어디, 감히 어디에 손을……!”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린 클로티 부인이 분노로 얼굴을 붉히며 소리칠 때였다. 다시 한번, 로잘린의 손바닥이 클로티 부인의 뺨을 후려갈겼다. 클로티 부인의 지친 몸이 허공에서 반쯤 기울었다.

“감히? 내가 아랫것에게 손도 올릴 수 없나?”

궁 안에서 명확한 계급을 따지자면, 왕세자의 비인 로잘린은 클로티 부인의 윗전이었다. 그녀에게 존댓말을 하며 비위를 맞춰 줬던 것은, 오롯이 로잘린의 관대함이었다.

“로잘린.”

그때, 로비엔이 나직하게 로잘린의 이름을 불렀다. 클로티 부인은 그제야 구명줄을 찾은 사람처럼 로비엔을 바라보았다.

“전하, 이것을, 이것을 보십시오. 부정을 저지른 것으로도 모자라……!”

“그리 때리면 손이 상합니다.”

제 억울함을 토로하려던 클로티 부인의 입이 다물렸다.

로비엔이 몸을 낮출 때까지는 자그마한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클로티 부인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로비엔은 클로티 부인의 뺨을 갈긴 로잘린의 손을 붙든 채 로잘린을 일으켜 세웠다. 있는 힘껏 내려친 탓에 붉어진 손바닥을 꽤 안타깝게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매만지기까지 했다.

그런 클로티 부인을 발견한 건 로잘린이었다. 로잘린의 얼굴에 떠오른 선명한 비웃음이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

“전하께서 내가 아닌 너를 안타까이 여기시리라 생각했나 보지?”

꿈도 크지. 로잘린이 키득거리며 작게 웃었다. 그러나 이내 그 미소는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그대를 왕족 시해 미수 혐의로 고발할 작정이야.”

그저 칼날 같은 눈빛이 그녀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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