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한풀 부드럽게 꺾인 달빛을 타고, 침대 위에 몸을 겹쳐 앉은 연인이 있었다.
로잘린은 로비엔의 가슴팍에 등을 기댄 채 그의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로비엔은 그런 로잘린을 품에 안은 채 목덜미에 턱을 기대어 있었다. 로비엔이 내뱉는 따스한 숨결에 얇은 잠옷이 규칙적으로 파르르 떨었다.
“전 루드 백작 부인, 라나 메르센데티를 기억하세요?”
“기억해요. 그대의 도움을 받아 최근 명예 회복을 했다는 것까지도.”
“그녀를 궁으로 부를까 해요. 시녀로 삼을 겸.”
로잘린의 의견에 로비엔은 반대하지 않았다. 지옥의 구렁텅이까지 빠졌다가 살아난 라나 메르센데티라면 로잘린에게 충성을 바치고도 남을 사람으로 보였다. 지금처럼 예민한 때라도 특별히 걱정하진 않아도 되리라.
“이러려고 그대가 그렇게 끌렸나 보군요.”
“사실 최근에 그녀에게서 두 통의 편지가 왔었어요.”
오늘의 대화는 순전히 그녀 덕분이었다. 그녀가 제 경험에 빗대어 로잘린에게 당신은 슬프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부드러이 일러 주던 순간, 로잘린은 깨닫게 되었다.
슬프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상처를 직시하고 마음의 소리를 듣는 일은 여태껏 해 본 적이 없었다. 두려웠다. 그대로 슬픔에 잠겨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고 말까 봐. 식사를 거르고 잠으로만 회피하던 무기력함은 그에서 발로한 것이었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로잘린은 편지가 엉망이 될 정도로 손에 쥔 채 울었다. 이제 그 두 번째 편지는 거의 알아보기조차 어려웠다.
“그녀의 편지로 정말로 아이를 잃었다는 것도, 생각보다 그 아이를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어쩌면 전하께서도 저처럼 부정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자연스레 그렇게 짐작하게 되었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회피해 왔던 대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동에 놀라고, 기뻐하고, 아이가 성장해 갈수록 미래의 일을 그려 보며 웃던 그 얼굴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자신에게 대가 없이 베푸는 선의, 친절, 배려, 그리고 늘 따라붙는 시선과 질투 같은 무엇. 그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한 애정임을 확신하고 싶었다.
“부정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눈으로 보는 순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로비엔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나를 원망하는 눈빛을 받게 되는 일이 두려웠어요. 고의는 아니었지만, 당신을 계단으로 떨어뜨려 자식을 잃게 만든 사람의 자식이니까. 나를 볼 때마다 떠올리고 원망하게 될까 봐.”
그 역시 자신이 가졌던 불안과 두려움을 토로했다.
“그래서 찾아오지 말라는 말대로, 찾아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로잘린이 약에 취해 몽유병 증세를 보이며 제 품으로 안겨 드는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미친놈처럼 그대로 영원히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을 원망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다정하게 웃어 주는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비겁하게도 어차피 다음 날 기억하지 못하니 그 곁에 있자고 생각하게 됐어요.”
“…….”
“그렇게라도 당신 옆이 좋았어.”
로비엔이 서글프게 중얼거리며 동그란 머리 위에 입을 맞추었다.
“왜 일찍이 마음을 말해 주지 않았어요?”
“당신이 내 위선을 발견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나를 제대로 보지 않았으니까.”
자신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 좋아한다, 사랑한다고 고백해 봐야 로잘린은 듣지 않았을 것이다. 만에 하나 그의 마음을 믿었다고 해도 제 마음을 넘겨주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을 조금이라도 믿게 만든 후에, 로잘린 역시 자신에게 기대어 얼마쯤의 호감이라도 품게 한 후에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다.
늘 속내를 알 수 없었던 그가 털어놓은 진심은 생각보다 깊고, 무거웠으며, 짐작보다 더 오래전에 시작된 것이었다.
“전하께서 더는 이전과 같은 태도로 저를 대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러니까 이젠 전부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추측하고 실망하다가 오해하는 건 싫어요.”
그러니 용서하지 않을 수가 있나. 로잘린은 로비엔에게는 당연했지만, 자신에게는 이해할 수 없어 원망스러웠던 순간에 대한 그의 사과를 그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로잘린이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제 어깨에 괴어 둔 그의 볼에 한 손을 얹었다. 그가 손바닥에 편안히 기대어 왔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
“그러니 하고 싶은 말 편하게 해도 괜찮아요.”
지치고 긴 하루였으니, 평소와 같이 이대로 기대어 잠들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로비엔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는 로잘린의 미묘한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계속 그녀의 시선이 가는 방향과 행동을 쫓아왔다는 그의 말을 증명하듯이.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자고 일어났을 때처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로잘린은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모든 게 심증뿐이었고, 그의 마음을 확인한 것과는 별개로 그가 이 문제에서 제 편이 되어 줄지 확신할 수 없어서였다.
“저는 다만.”
로잘린이 로비엔의 볼에 대고 있던 손을 떨어뜨리며 다소 어두운 낯빛을 했다.
“괜찮아요. 그대가 하는 말 다 믿으니까.”
그가 고요하게 내쉬는 숨결이 쇄골을 간지럽혔다. 진심이라는 듯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박동이 안정감을 주었다.
로잘린은 몸을 돌려 로비엔의 품에 더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어리광 부리는 아이처럼 구는 몸짓을 받아 주며, 로비엔은 로잘린을 안은 두 팔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몸짓이 신뢰를 말할 수 있다면 이런 것이지 않을까. 로잘린은 그리 믿었다.
“……저를 음해하려고 한 범인으로 국왕 폐하와 왕비 폐하를 의심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토록 무서운 말도 그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무섭도록 궁의 생리를 잘 알고, 정치와 심리전에 능하며, 마음에 차지 않는 아이의 출생부터 엉망으로 만들어 내 손발을 묶을 수 있는 사람.”
“…….”
“제가 알기론 이 궁 안에 단둘뿐이니까.”
믿고 싶지 않겠지. 사실 믿고 싶지 않기로는 로잘린도 매한가지였다. 아무리 로잘린의 출신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해도 글로리는, 그들의 아들인 로비엔의 아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작 어미의 출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저들의 손주인 아이를 해치려고 마음먹다니.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이를 가진 후 방어적으로 굴던 태도를 버리고, 억지로 외면하던 것을 그만두고 나자 하나둘씩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제가 기억도 다 못 하는 일들이 다미안 래비어트와 저의 추문 속에서 역사가 되어 있었고, 처음 보았던 장신구는 제가 그에게 선물 받은 것이 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그 모든 역사에는 하나같이 클로티 부인이 끼어 있어, 그녀가 증인이 되었다. 로잘린의 사람인 척하고 있지만 왕비의 사람인 클로티 부인이 이 사건의 유일무이한 목격자였다. 뭐가 되었든 로잘린과 동행했던 그녀의 말은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다.
그렇다면 클로티 부인은 무엇 때문에 자신을 해하려고 하는가? 보석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를 증거로 만들면서까지, 거짓된 증언을 하면서까지 그런 행동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왕비께선 귀를 막은 채 클로티 부인의 말만이 진실이라고 이야기하셨죠.”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처럼. 그건 단순히 로잘린의 행실을 불신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클로티 부인이 내뱉는 말이 진실로 둔갑할 수 있도록 깔아 두는 밑밥 같은 것일 뿐.
“부정한 여인이라며 재판에 회부하겠다고도 하셨고요.”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로비엔이 단호하게 얘기했다.
“알아요, 전하께서 그렇게 두지 않으시리라는 거. 그렇게 되더라도 지켜 주실 거라는 것도.”
그의 말을 믿는다. 그가 제게 적나라하게 내보인 마음의 진실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니까. 루드 백작처럼 제 아내를 버리고 싶어 안달 난 사내도, 비겁하기 짝이 없는 기만자도 아니니까.
“하지만 전하께서도 예상하시다시피, 그 모든 건 저를 무력화하기 위한 일이에요.”
로잘린의 자존심을 꺾고, 명예를 더럽혀 무릎을 꿇은 채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만드는 것. 클로티 부인이 고작 그것을 목적으로,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로잘린을 위협할 리는 없었다.
로잘린을 꺾으려는 목적이 있는 자는 다른 사람이다. 아마도 일이 잘못되더라도 그 목숨과 명예를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한 든든한 뒷배.
“전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든, 저는 그렇게 짐작해요.”
“…….”
“하지만 솔직히 그게 사실이라 쳐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마 왕과 왕비 역시 그것을 알고 행동에 나섰을 터였다. 안다 한들, 왕국의 최고 권력자인 그들을, 제 반려의 부모인 자신들을 네가 어쩔 수 있겠냐고 생각했겠지.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사건의 사실관계를 낱낱이 밝히고 명명백백하게 해결할 방법은 왕과 왕비의 명예를 해치는 일뿐이었다. 그들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아들인 로비엔이 그 일에 동참할까? 아니, 최소한 로잘린이 행동하는 동안 그가 묵인할 수 있을까?
“사실 내 부모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전하.”
“하지만, 추적의 끝에 내 부모가 있다면…….”
슬프겠지. 어찌할 바 모를 것이고. 그게 그의 부모라면 더욱 처절한 비극이었다.
“내가 어리석어서 당신을 다치게 하고, 아이를 잃었어요.”
“…….”
“두 번은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나는 걱정하지 말아요.”
로비엔이 느리게 눈을 감고 로잘린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추측이 맞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전하.”
“정확히 조사하고, 대응할 수 있는 시간만 조금 부탁할게요.”
그에게는 천지가 개벽하는 사건이니만큼, 모든 정황과 증거가 의심의 여지 없이 명백해야 했다.
단호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얼마쯤의 체념이 섞여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고통은 단순히 아이를 잃었다는 슬픔만이 아니었다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로잘린은 자신을 끌어안은 로비엔의 팔을 풀고, 몸을 뒤로 조금 물렸다.
이 가련한 왕자님을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전하께서 잘못한 건 없어요. 내가 당신을 미워할 수 없었던 건, 그래서야.”
그래서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명확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잘못한 게 없고, 자신은 그를 미워할 수 없으며, 아이의 죽음은 둘 중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음을. 슬프지만 이대로 가슴에 묻고, 이 밤이 지나면 차차 잊어 가야 한다는 것을.
로잘린이 몸에 무게를 실어 로비엔을 뒤로 밀었다. 풀썩하며 이불이 들썩이는 소리와 함께 무방비하게 드러누운 그를 내려다보았다. 서럽게 울던 탓인지 붉게 달아오른 눈가가 애처로웠다.
로잘린은 그의 옆에 모로 누워 머리를 품 안으로 끌어안고 짧게 입 맞추었다. 자연스럽게 로비엔의 팔이 로잘린의 허리를 둘러 감았다.
시간은 지나가고, 언젠가 익숙해진 고통은 무뎌지리라.
다만 몸을 겹치고 기대어,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것만이 그 밤의 유일한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