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60)화 (60/151)

# 60.

“나한테 원하는 게 뭐냐고요.”

로잘린이 재차 물었다.

“없어요. 내겐 그럴 자격도 없고.”

“아무 상관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다면 매일 밤 찾아오는 이유가 뭐예요?”

얼굴을 보면서 제대로 얘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도망가고 싶은 사람처럼 로잘린의 시선을 미묘하게 피하고 있었다.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닌 건 아니잖아요.”

“우리가 무슨 사인데요?”

“……당신이 싫어할지라도, 부부 사이죠.”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할 때는 저도 모르게 머뭇거리는 주제에, 귓가에 내려앉는 목소리는 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게 무척이나 담담했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그는 정말로 감정을 느끼는 회로 어딘가가 고장이 난 게 아닐까? 로잘린의 얼굴에 아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정말로 모든 게 그녀의 짐작과 착각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소매를 움켜쥔 로잘린의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실렸다.

“날 보면 몰라요? 피를 나눈 부모와 자식 간도 엉망인 마당에,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 부부가 된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해요?”

몸에 감긴 그의 팔을 밀어내기 위해 몸에 힘을 주어 봤지만, 창밖으로 밀려나는 몸을 그가 재차 감싸 안을 뿐 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로비엔은 절박할 정도로 그 몸을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생긴 건 오기와 분노였다.

“놔! 그 별거 없던 사이에 그나마 공유할 수 있었던 거라곤 자식뿐이었는데 그 아인 죽었고, 당신은 슬퍼하지조차 않잖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나도…… 슬퍼요. 로잘린.”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에 돌아온 건, 지친 듯 자신도 슬프다는 대답이었다. 그게 로잘린이 마지막까지 둘러치고 있던 둑을 무너트렸다. 로잘린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 질렀다.

“거짓말!”

억지로 묻어 둔 것이 부피를 더해 터져 나오듯, 묻어 둔 감정이 기괴할 정도로 몸을 불리며 그녀에게 엉겨 붙었다. 가녀린 몸에서 나오는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으로 몸부림치며 로잘린이 울부짖었다.

“어떻게 그런 표정으로, 그런 목소리로 슬픔을 논해!”

막무가내로 저를 두드려 패고 쥐어뜯는 손길을 앞에 두고도, 로비엔은 묵묵한 얼굴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힘을 주어 더 안으로 끌어당겨, 눈치채지도 못한 새에 로잘린은 그의 품에 안긴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로잘린이 터뜨리는 감정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가엾은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고, 어미로서 비탄에 잠기지 않는 것은 그녀가 정이 없거나 독해서가 아니다. 전부 경험해 본 적도 없는 막연한 슬픔에 가라앉기 싫어 자기 보호적으로 군 것뿐이다.

“거짓말. 다 거짓말이지. 나한테 보여 준 것들도, 아이를 아끼는 척한 것도 다 거짓이잖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당신한테 가족이라곤 진짜 피를 나눈 왕과 왕비, 그리고 당신 형제들뿐인 거잖아.”

끔찍해. 로잘린이 중얼거렸다. 동시에 몸에 감긴 그의 팔에서 힘이 조금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당신도, 당신 가족도, 이 궁 안의 전부가 다 나를 조롱하고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것 같아. 끔찍해!”

고장 난 것처럼 손이 덜덜 떨리고 눈물은 줄줄 새어 나왔다. 억지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잠에만 빠져들면서도,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떠올렸던 아이의 얼굴이, 숨 한번 쉬지 못하고 떠났다는 그 이야기가, 바로 직전까지도 움직이며 제가 있다고 알리던 몸짓이 차례차례 기억을 빼곡하게 메웠다.

로잘린은 얼굴의 양옆으로 어찌할 줄 모르는 두 손을 가져다 댄 채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나는 잃은 게 이렇게나 아프고 서러운데, 왜 당신은 조금도 슬퍼하지 않아?

사실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래서 자꾸만 생각했다.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방향으로 생각하며, 어차피 이뿐인 관계였으니 이대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를 걱정하던 눈빛이,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정들어 가던 시간이, 그녀에게 다 해 주고 싶어 안달 난 사내처럼 굴던 몸짓이 떠올랐다. 의식조차 없는 순간에도 그 곁을 지켰다는 남자의 마음도 알 것 같았다.

그 모든 게 다 거짓이었을까? 차라리 말로 거짓을 말하면 말했지, 그토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몸짓으로 거짓을 말할 수 있었을까?

미워하고 싶은데 미워할 수가 없었다.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금, 그토록 지친 목소리로 자신도 슬프다고 말하던 그의 목소리에서는 이유를 찾기보단 그저 삶의 고단함만을 느꼈다. 다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왕비가 그 시선으로 제게 물었던 모든 것이 진실이었던 것이다.

“당신은 내가 아이를 낳다 죽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말았을 거야. 그러니 아이가 죽은 게 무슨 큰일이겠어.”

언제 이렇게 그에게 의지하게 되었던가? 피를 나눈 아버지도, 형제자매도 필요에 따라 이용하면서 살 뿐이었는데. 누구에게도 애정을 기대하고 온기를 기대한 바가 없었는데. 언제 이렇게 마음의 빗장을 풀어 문을 열어 버렸지?

하지만 사실 이제 와 알면 뭐 할까.

로잘린은 허탈하게 웃었다. 피곤했다. 그저 다시 잠으로라도 도망치고 싶어 바르작대는 몸이 멈춘 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린 후였다.

조금 먹먹하게 들리는 목소리, 그가 얼굴을 묻은 곳에서 젖어 드는 머리카락.

“……나도 그 아이가 궁금했어요.”

한쪽 팔은 그녀의 머리통을 휘어 감고, 다른 팔은 등으로 둘러 어깨를 끌어안은 그대로 그가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먹먹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로잘린이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눈을 깜박였다.

“시도 때도 없이 생각이 나더군요. 눈을 뜨면 눈동자 색깔은 무엇이었을지, 그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 자랐다면 당신을 닮았을지 나를 닮았을지. 그것만 생각해도 하루가 다 갔어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지 않은 감정까지도 읽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잘린이 미약한 힘으로 로비엔을 밀어냈다. 아무리 두드리고 쥐어뜯어도 밀려나지 않던 몸이었는데, 그 약한 힘에 물러났다.

마주친 얼굴이 비통함과 물기로 젖어 있었다.

“당신이 그런 것처럼, 이 감정은 묻어 둔 채 회피하고 싶었어요. 애써 감추고 있는 것이 터져 나온다면, 돌이킬 수 없이 잠겨 버리고 말 테니까.”

겁이 났다. 그도 그랬을 거였다. 아이로 인한 기쁨과 상실, 모두 처음이었으니까.

그래, 왜 당신은 슬프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무표정한 얼굴로 있다고 그게 슬픈 게 아닌 건 아니었는데. 그 눈동자에 침잠한 그 감정을 왜 그리 무심히 지나쳤을까?

당신도 아이를 잃은 아버지였는데.

“그리고 어차피 당신은 날 원망할 테니까.”

“…….”

“슬픔이 그 마음에 묻혀서 빨리 잊히길 바랐어.”

로잘린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뭐가 됐든 제 가족이 연루되어 있음을 그도 모르지 않았다.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에게는 그토록 다정하고 선한 사람들이 제 아내에게는 그토록 잔인해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원망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까.

제 사람들에게 애정과 관심만을 쏟는 관계에서 자라 온 이 남자가, 그 사랑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이었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선량한 사람이, 타인에게는 얼마든지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걸 결국 알게 되었다.

“날 원망하고 미워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로비엔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로잘린은 바람 빠지듯 새는 웃음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당신이 끔찍하다고 말하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어.”

어쩌면 이대로 영원히 원망하고, 밀어내고, 끔찍하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순간이 아득했다. 이 마음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상, 절대로 그렇게는 살 수 없었다.

“내가 안일했어. 난 그렇게는 못 살겠어.”

어차피 벗어날 수 없는 관계인 것은 둘 모두에게 같은 일이니, 굳이 마음을 하나하나 펼쳐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이대로 자연스럽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평화롭게 살아간다면 인과대로 서로에게 기대며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이 그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마음에만 품은 감정, 드러내지 않는 마음. 그런 건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다는 걸. 인간은 보상을 바란다. 감정에도 매한가지였다. 그는 로잘린의 마음을, 스치듯이라도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바라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로잘린이 맹렬히 거부하며 그를 증오한다면, 그렇게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해도 좋아.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게.”

“…….”

“계속 곁에 있어 줘. 증오하지도, 끔찍하게 생각하지도 말고.”

그 말을 하는 내내, 그는 계속 울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는 알까. 로잘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날렵한 턱과 볼을 겹쳐 잡은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사이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왜?”

이유를 물으려는데, 이상하게 목이 잠겼다. 애참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해.”

로비엔이 감았던 눈을 떴다. 물기에 젖은 푸른 눈동자는 그 자체로 물을 품은 호수 같았다. 이전에 그에게 선물할 요량으로 샀던 블루 다이아몬드 같은 건 그 아름다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만일 이게 우리가 아는 그 감정이라면.

“……사랑해.”

감은 그의 눈 사이로, 눈물 줄기가 타고 내렸다.

울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로잘린은 저도 모르게 다른 손을 들어 가슴 가운데 오목한 곳을 짚었다. 가슴 한가운데가 지끈거리는 고통 같은 것이 있었다.

이 필연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게 사랑이라면, 왜 인간은 그토록 사랑이란 감정에 목매는 것일까?

하지만 동시에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감정 없이는 저토록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없으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색조차도 처음 보는 것처럼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색조, 그게 그 사랑이란 감정이었다.

로잘린이 가슴을 짚었던 한 손을 마저 들어 그의 얼굴 양쪽을 감쌌다.

“나는 아직도 당신 가족들이 싫어. 왕가의 명예니 자존심이니 내세우며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는 꼴만 보면 치가 떨려. 떠밀려 아이를 잃은 것도 미칠 것 같아.”

“……알아요.”

“그래서 당신도 싫어하고 싶었어.”

그건 진심이었다. 위선과 연기로 점철된 관계가 끔찍했다.

“그런데 당신이, 자꾸만…….”

하지만 다정하게 속삭이고, 부드럽게 안아 주던 모든 게 좋았다. 사실 나는 이렇게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곤 했다.

“싫어하고 싶은데 싫어할 수가 없었어.”

로잘린이 웃었다. 눈앞의 미인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우는 반면에.

로잘린이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끌어당겼다. 짠맛이 나는 입술을 부드럽게 부딪친 순간 깨달았다.

아, 내가 아직도 울고 있었구나.

여전히 어린아이, 혹은 울보처럼 우는 첫째 딸 글로리의 아버지, 로잘린 칼라브리체 보가트의 남편, 그리고…….

로잘린 보가트의 남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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