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겁증과 의심병은 시험을 지속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추측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길 바랐다. 그가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궁금했는데, 마리를 취조한 이후로도 며칠째 로비엔은 밤마다 로잘린의 침실을 찾았다.
토악질하고 지쳐서 누운 자신의 곁에서 그가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던 첫날엔 억지로 잠이 든 척하느라 숨을 쉬는 것조차 어색했다. 여전히 숨소리가 거칠어 깨어 있는 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지나고, 그가 밤마다 찾아들면서 억지로 숨을 조절하는 것쯤은 우습게 되었다. 로잘린은 늘 눈을 감은 채 잠든 척했고, 로비엔은 늘 침대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아 문을 등지고 누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둘 다 눈이 마주치면 큰일이 나기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굴었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네.’
로비엔은 로잘린이 아픈 것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하는 상황을 겁내고 있었다.
‘원래 왕족들에게 자식 하나 죽은 것쯤은 별거 아닌가?’
그러나 아이를 잃은 고통을 같이 나누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확신할 수 없었다. 그날, 자신을 바라보던 매끄러운 눈동자에는 죄책감은 있었으나 슬픔은 없었다. 물기 하나 없던 눈동자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왜 아이를 잃은 것도, 내가 배신감을 느낀 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당신은 이 늦은 밤 나를 찾아와 이토록 애틋하게 시선으로 어루만지고 있을까? 왜 나는 오지 말라고 말했던 주제에 밤마다 당신이 찾아오는 것을 묵인하고 있지? 대체 우리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부당한 분노임을 알았다. 그러나 이유 없이 그가 미웠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길게 흘러내렸다. 다행히도 그녀는 소리 내어서, 몸을 떨면서 우는 방법을 몰라 로비엔은 알지 못했다.
그가 조용히 떠나는 기척을 귀로 쫓으며 생각했다.
당신의 진짜 마음을 알고 싶어.
며칠 뒤, 라나 메르센데티는 왕세자비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자신에게는 은인인 왕세자비가 뜻밖의 횡액을 당해 몸 고생과 맘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다.
“…….”
그러나, 편지의 내용은 무척이나 담담했다. 아이를 잃은 슬픔이나 괴로움은 비치지 않았다.
재판에 참석하였을 때 그녀의 억울함이 왕세자비의 눈에 보였다고 했다. 마침 왕세자와 몰래 나섰던 커피 하우스에서 존 비테와 전 루드 백작이 결탁했다는 것을 발견한 후에는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었다고도 했다. 그래서 도와준 것뿐이니 지나친 감사를 표할 필요는 없다는 편지는 깔끔하다 못해 삭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이에 대한 언급은 고작 두어 줄 정도였다. 라나 메르센데티는 단정한 필체를 따라 읽었다.
“무사히 태어나리라 생각했던 아이를 불의의 사고로 잃게 되어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리 슬프지는 않아요. 궁의나 산파의 말로는 사산하는 것도 흔한 일이고, 임산부가 죽는 일도 허다하다 하니, 목숨을 건진 것이 오히려 다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문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로잘린은 천하에 다시없을 무감정한 여자였다. 어머니가 될 자격도 없어야 마땅할 정도로. 하지만 아이 잃은 어미에게 이성을 논해선 안 된다.
“라나.”
라나 메르센데티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두어 번의 노크 소리와 함께, 이제는 노부인이 된 메르센데티 자작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나 메르센데티가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 제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필요하면 하녀를 보내시라니까요. 계단 오르기도 힘들어하시면서 여기까지 왜…….”
“계속 방에만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피크닉이라도 나가는 게 어떻겠니?”
“조금 이따 나가시는 건 어떠세요? 왕세자비 전하께 답장을 하려던 참이에요.”
메르센데티 자작 부인이 희미하게 인상을 썼다. 기억을 더듬기 위함이었다.
“네 명예를 지켜 주셨다는 그 왕세자비 전하 말이냐?”
“네. 최근 사산을 하셨다는데 충격이 무척 크신 것 같아요.”
라나 메르센데티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딸아이를 허망하게 잃고 지옥까지 떨어진 적이 있던 라나 메르센데티는 왕세자비의 무던함이 무감정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렴.”
메르센데티 자작 부인이 온화하게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실수로 인성도 덜된 남자를 만나 고생만 하다 돌아온 딸이 무척이나 안타깝고 소중한 터였다.
라나 메르센데티는 그런 어머니를 등지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왕세자비 전하께.
전하께 답장을 받는 영광을 누린 라나 메르센데티가 다시 인사드립니다.
무사히 태어나리라 생각했던 아이를 불의의 사고로 잃게 되어 혼란스럽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뜻밖에도 슬프지 않고, 아이 대신 전하께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신다고요. 감정이 없음을 자책하지 마세요.
제 경험담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저는 사실 두 아이를 잃었습니다. 첫아이는 사산하였고, 둘째 아이는 아시다시피 예쁘게 자랐으나 병으로 잃고 말았지요. 첫아이를 잃었을 때는 사실 크게 슬프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무서웠고, 절차상 가진 관계로 낳은 아이일 뿐이었으니까요. 품에 안아 얼러 본 적 없는 자식이기에 아쉬움만 남았지요. 그러나 근처의 모든 사람이 제게 너무 슬퍼하지 말라 위로하기에, 슬프지 않다고 하면 비정한 어미가 될까 봐 슬픔을 꾸며 내었습니다. 죄책감만 들었지요.
그렇게 땅에 묻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한데 한 계절이 지나고 나니 딱 한 번, 품에 안아 본 아이가 생각이 났습니다. 전 루드 백작이 다시 자손을 낳아야 한다며 그 몸을 들이댈 때는, 딱 죽고만 싶어졌습니다.>
라나 메르센데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로서도 과거의 음울한 기억을 꺼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머니.”
“그래, 라나.”
“어머니께서도 제 자매를 잃은 적이 있다고 하셨죠?”
메르센데티 자작 부인이 긍정했다.
“그래. 그때는 아이를 낳는 것보다 지키는 일이 더 어려웠으니까.”
“슬프지 않으셨나요?”
“슬펐다. 하지만 슬픔에 잠길 여유가 없었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모두 같은 시기에 같은 정도의 슬픔을 느끼고, 표현할 수는 없다. 라나 메르센데티가 다시 펜을 들었다.
<첫아이를 잃었을 때의 저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어요. 저는 그저 상실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소중한 무언가를 영원히 잃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 공포가 두려워 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늦게서야 깨달았습니다.
그제야 눈물이 펑펑 나더군요. 어떻게 아이가 죽은 지 한 계절 만에, 짐승의 새끼를 친다고 말하듯이 말할 수가 있냐고 전 루드 백작을 원망했습니다. 하루건너 하루는 끼니를 거르고 있었다는 것도 뒤늦게서야 알았습니다. 시집올 때 챙겨 온 드레스들은 형편없이 헐렁해져서 맞지 않았어요.
저는 슬프지 않은 게 아니었습니다. 대면하기 두려운 남편을 피해 출산 전까지 아이에게 의지했어요. 태어나면 이것도 하자, 저것도 하자 속삭였던 순간들이 어찌 거짓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한 몸처럼 체온을 나누던 순간이 어찌 없던 일이 되겠습니까? 거짓으로 꾸며 내 애도하고 애통해했던 가식적인 순간이 저를 더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물론 전하께서 이처럼 뒤늦은 고통을 느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아무렇지 않다고 하셔도 저는 전하께 어찌 그럴 수 있냐고 되묻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로 강인하게 버티신다면 오히려 좋은 일입니다.
삶의 형태는 다르고, 슬픔을 느끼는 시기도, 표현하는 방식도, 그 크기도 모두 다르기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어린 날의 저와 같이 그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시기만을 바랍니다.
가을 햇볕이 좋은 어느 날.
라나 메르센데티.>
늦은 밤이었다. 늘 그랬듯, 잠들어 있는 모습이라도 몰래 훔쳐보고 싶어졌다. 잠이 오지 않아서 술을 제법 들이켜고 난 후라 그런지, 머리가 깊은 고민을 거부했다. 로비엔은 충동에 정신을 의탁한 채 몸을 일으켰다.
궁인들의 물갈이가 죄다 이루어진 참이라 그런지, 궁 안의 분위기가 제법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조용히 인사하는 아랫것들을 빠르게 지나쳐 로잘린이 잠들어 있을 방 앞에서 멈추어 섰다.
혹시라도 숨소리가 들려 깨면 안 되니까, 혹시라도 숨소리에 섞인 술 냄새를 알고 깨면 안 되니까. 고민 없이 발걸음을 옮긴 것치곤 신중하게 심호흡을 한 로비엔이 조심스럽게 문을 당겼다.
그러나 당연하게 시선을 던진 침대는 비어 있었다. 놀란 로비엔이 방 안으로 성급히 발을 디뎠다. 평소처럼 기척을 지우는 것조차 잊은 상태였다.
“비께서……!”
바로 다음 순간, 자연스럽게 움직인 시선이 기묘하도록 선명하게 다가오는 달빛을 따라 움직였다. 창문 아래로는 평소와 다른 그림자가 늘어져 있었다.
언젠가 그와 대화를 나눌 때 그랬던 것처럼 창틀에 걸터앉은 인영. 그러나 제정신도 아닌 상태로 궁을 헤매고 돌아다니던 때처럼 맨발에 잠옷 차림을 한, 조금 강한 바람만 불어도 휘청하며 창밖으로 몸이 넘어갈 것처럼 생긴 여자가 거기에 있었다.
바로 직전까지 로잘린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는 것도 잊은 채, 희게 질린 얼굴로 애타게 다가온 로비엔이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여긴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저를 둘러 안은, 단단하지만 떨고 있는 두 팔.
다정한 목소리가 로잘린을 얼렀다. 그저 몽유병이 다시 시작되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발은 다치지 않았어요?”
로잘린은 낯설지 않은 품에 안긴 채,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 모든 것이 말하고 있는 건 굳이 밖으로 내뱉어 말하지 않아도 불안이었다.
“밤마다 찾아오시는 거 알고 있어요.”
혹시라도 놓칠세라 그의 품에 강하게 끌어안긴 상태라, 가슴팍에 대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대체 왜 그래요?”
그러나 로비엔이 로잘린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푸는 순간, 자연스럽게 날카로워진 목소리가 그의 귀를 찔렀다. 로잘린의 목소리는 그를 비난하고 있었다.
아이를 잃고도 변함없는 그의 삶을, 찾아오지 말란 말을 거부한 태도를. 그래 놓고도 조심스럽게 밤마다 스며들어 얼굴만 지켜보다 떠나는 안타까움과 미련을.
“뭘 원하는 건데!”
그리고 얼핏 이중적으로도 느껴지는, 애틋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그의 행동과는 달리 단 한 번도 털어놓지 않는 마음을.
사실 그를 원망하면서도 그의 생각을 알고 싶어 했던 순간부터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으면 몰라. 당신도 나도. 그러니 차라리 끝을 보자.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대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않는 대로. 다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몸짓이 거짓이라면 배신감은 느끼겠지만, 끊임없이 기대하고 당신의 마음을 유추해 나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