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모든 생활이 익숙한데 익숙하지 않았다. 고작 6개월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밤마다 붙어 있었다고 침대가 이토록 널찍한 것도, 사락사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다양한 이야기를 읊어 주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지나치게 방심하고, 그의 친절에 익숙해진 탓이다. 로잘린은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모로 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제 날마다 제 방에 찾아오셔야 할 이유는 없겠어요.’
그녀가 먼저 그렇게 말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로잘린에게만은 고분고분, 요구하는 대로 따라와 준 사람답게 그는 로잘린을 찾아오지 않았다.
가끔 무언가 울컥할 때마다 그저 의식적으로 그 생각을 흘려보냈다. 그에게 찾아오지 말라 요구한 사람이 자신이니 그에 불만을 느끼거나 그를 원망해선 안 된다는 걸 알아서였다.
언젠가는 이렇게, 원래 그랬던 데면데면한 사이로 돌아가겠지. 그거면 됐다. 그거면 충분한 일이었다.
“…….”
그러나 오래지 않아 로잘린은 다시 눈을 떴다. 온종일 먹은 거라곤 물뿐이었는데 구역질이 치밀었다. 다급하게 설렁줄을 당기자 하녀들이 달려왔다. 열린 문 너머로 토악질을 하려는 로잘린을 발견한 하녀가 둥글고 큰 그릇을 그 아래로 갖다 바쳤다.
고통스럽게 위액을 토해 내자 기진맥진해졌다. 로잘린이 지친 숨을 몰아쉬는 동안, 마리가 입을 헹굴 물과 수건을 가져왔다. 이후 로잘린을 다시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는 내내 하녀들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서려 있었다.
“쉬고 싶으니 모두 나가 줘.”
로잘린의 부탁에 하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침실을 빠져나갔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력감과 동시에 몸이 침대로 빨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지쳐서 잠이 든 탓인지 옅은 수면은 금세 의식을 두드렸다. 로잘린은 문 앞에서 어른거리는 인기척을 느끼며 몸을 뒤척였다. 경비병들이 교체되는 시간에는 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문이 열리고 인기척이 점점 가까워졌다.
‘누구지?’
자연스레 침입자에 대한 경계로 눈이 뜨였다. 그러나 의문은 잠시였다. 로잘린은 문을 등지고 누운 채,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달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잠이 든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느릿하지만 꼿꼿하고 정갈한 걸음걸이가 그대로 느껴지는 발소리. 그녀는 이미 이 발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전하께서 의식이 없으실 때도, 항상 여기 계셨어요.’
‘많이 걱정하셨어요.’
아이를 잃은 이후 그가 로잘린을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그건, 전하…….’
아니, 처음이 맞나?
로잘린은 그간 거의 하루의 반 이상을 잠들어 있었다. 신체적, 정신적 회복을 위해서였다. 회복을 위한 약에 수면제 성분이 포함되어 있기도 했지만, 눈을 뜨고 있는 게 그다지 즐겁지 않다는 점도 한몫했다. 뭐가 되었든, 잠들어 있는 시간 동안 로비엔이 왔다 갔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심을 한 건, 기울어진 침대 가장자리에서 뻗어 온 손 때문이었다.
“…….”
그러나 자연스럽게 뻗어 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낯설었다. 이전처럼 깊게 쓸어내리는 손길이 아니었다. 깃털처럼, 만지는 듯 아닌 듯 스쳐 가는 느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손길마저 떨어져 나갔다. 이제 그들은 그 정도의 접촉에도 어쩔 줄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 아이를 갖기 전에는 몸을 섞었고, 같이 잠든 밤에는 몸을 겹친 채로 체온을 나누었다. 한데 내외하듯 조심스러워하다니.
“로잘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로잘린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도 모르게 대답할 뻔해서였다. 다행히도 로비엔은 그녀의 동요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당신이 더 이상 의식 없이 돌아다니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좋은데.”
“…….”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도 좋은데.”
정신이 있음에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고, 낮은 목소리였다.
“겁이 나요.”
겁이 나? 무엇이? 얼핏 서글프게도 들리는 목소리에 가슴이 저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 행간에 고인 감정은 가슴에 돌을 얹은 듯 무거웠다.
비명보다 더 지옥 같은 침묵이 고였다. 그동안, 로잘린은 자신이 의식이 있음을 고백할까 생각했다. 그가 찾아온 이유를, 방금 전까지 털어놓던 이야기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워졌다. 그날처럼 로비엔의 눈에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을까 봐.
결국, 그 두려움이 모든 것을 이겼다. 로잘린은 눈을 감은 채 자는 척을 지속했고, 한참이나 지켜보던 로비엔은 조용히 침실을 나섰다. 찾아온 적이 없는 것처럼,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처럼.
한때는 그렇게 로잘린을 잡아먹고 싶어 하더니, 궁 안은 스산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로잘린의 부정에 대한 이야기는 더는 나오지 않았다. 자신들이 생각해도, 그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만은 가여웠던 모양이었다. 물론 로비엔의 강한 위압으로 로잘린과 관련해 함부로 입을 열 수 없는 탓도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원인이 무엇이건, 이제 소문의 쟁점은 클로티 부인이 로잘린을 계단에서 밀쳤느냐 아니냐로 옮겨져 있었다.
“클로티 부인도 정말 무섭지 않니? 왕세자비 전하를 계단에서 떠밀다니.”
“난 밀치진 않았을 것 같아. 그렇게까지 나쁜 분은 아닌걸.”
“내 생각도. 그냥 누구에게라도 책임을 묻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아이를 잃었잖아.”
클로티 부인을 믿는 이들은 사고로 아이를 잃은 것을 탓할 사람이 필요해서였을 거라고 주장했다.
“난 밀친 거 맞는 것 같은데. 그날 크게 말싸움이 있었다며. 클로티 부인은 원래 왕비님께 충성하던 사람이었잖아. 에밀리가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왕비님을 붙잡고 계단 근처에서 휘청거리니까 불안해서 떨쳐 버린 모양이던데.”
반대로 클로티 부인이 로잘린을 밀쳤다는 것을 믿는 이들은 대개가 왕비에 대한 충성을 꼽았다. 그녀가 로잘린의 시중을 들게 되기는 했지만, 로잘린의 사람이 아니란 것은 궁 안의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도 클로티 부인이 범인 맞는 것 같은데. 만일 아니라면 왕비님께서 왜 아무런 의견 표현도 안 하시겠어?”
설왕설래하던 이야기가 하나의 주장으로 뚝 멈추었다. 왕비가 클로티 부인을 아끼는 것 역시 궁 내에서 몹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비는 로비엔이 클로티 부인에게 왕족 시해 혐의를 씌우고 독방에 가두어 버려도 유감 표시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땅한 결과라는 듯 클로티 부인을 외면했다.
“그거야 그렇지.”
“게다가 클로티 부인은 왕세자 전하의 유모였잖아. 왕세자 전하께서 이유 없이 그런 이를 가두었겠어?”
“그것도 그렇지.”
고개를 주억이는 한심한 치들을 바라보며 마리가 스산한 얼굴을 했다.
“일이나 해. 전하께 일러바치기 전에.”
그제야 하녀들이 직전까지 클로티 부인의 유죄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던 이가 마리임을 깨닫고 펄쩍 뛰었다. 이내 그들은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고쳐 묶고, 허겁지겁 제 일터로 달려 나갔다.
로잘린의 하녀인 마리가 같은 궁 안에서 하녀로 있음을 알면서도 주둥이를 놀리는 것들이 많았다. 그러잖아도 로잘린의 상태가 빠르게 좋아지지 않는 것이 걱정인데, 걱정해야 할 것은 하지도 않고.
“마리?”
“예!”
로잘린의 세탁물을 받아 들고 막 입구를 통과하던 마리가 하녀장의 목소리에 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왕세자비 전하께서 찾으시니 어서 올라가 보렴.”
전하께서?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이던 마리가 허겁지겁 계단을 올랐다. 아이를 잃은 이후 로잘린이 궁 안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자신뿐임을 마리는 잘 알고 있었다.
“전하, 마리예요.”
“들어와.”
혹시라도 무언가 잘못되었을까 걱정했지만, 침실 입장을 허락하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또렷하고 부드러웠다. 어디가 아프거나 다급하게 필요한 목소리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마리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늘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것과는 달리, 로잘린은 커다란 쿠션에 등을 기대어 앉은 채였다.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물어볼 게 있어서.”
근래에 로잘린은 무언가를 질문할 만큼 인생에 열의가 있지 않았다. 지난 일주일간 로잘린이 제 인생에 보인 태도를 잘 아는 마리가 로잘린의 눈치를 살피며 침대 앞에 섰다.
“내가 자고 있는 동안 전하께서 오셨니?”
“네?”
뜻밖의 질문에 마리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어제 잠들지 않았어.”
아. 마리가 작게 탄식했다. 몽유병 증상을 보이며 떠돌던 로잘린이 어제는 침실 밖으로 나오지 않아, 모두가 로잘린이 이제 어느 정도 회복이 된 모양이라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나서였다.
“회복된 게 아니라 주무시지 않은 거예요?”
“자다가 깼는데 전하께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계시더구나.”
“…….”
“혹시 그동안 계속 그렇게 찾아오셨니?”
로잘린의 질문에 마리가 당황한 눈동자를 굴렸다.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는 로비엔이 명령한 것이 있었고, 대답하지 않자니 제 주인인 로잘린의 질문을 무시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로잘린은 여전히 거짓을 고할 줄 모르는 마리의 당혹스러움을 면밀히 관찰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나를 많이 걱정하셨다고 했지.”
행동 하나하나에서 내포된 의미를 찾고 있는 예민한 태도가 이전의 로잘린과 같았다.
“내가 그래 봤자 오지도 않는 사람이라고 할 때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았고.”
마리는 어차피 로잘린을 속일 수 없었다. 그러나 머뭇거리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로비엔이 자신을 보러 침실에 들렀다는 사실에도 로잘린이 조금도 기뻐하지 않아서였다. 오히려 로잘린에게서는 얼마쯤의 원망이 비쳤다.
“찾아오셨던 게 맞아?”
결국 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능 없는 거짓말로 로잘린을 속이려고 해 봤자, 속지 않을 것을 알았다. 이렇듯 평소와 같이 또렷한 로잘린이라면 유도심문을 해서라도 마리를 꾀어내고 말 것이다.
“몇 번이나?”
“매일 밤이요. 매일 밤 찾아오셔서 전하께서 잠든 모습을 지켜보다 가셨어요.”
마리가 차분히 지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한동안 자신을 가누지 못했던 로잘린과 매번 달려왔던 그의 이야기를. 깨어질 무엇을 다루듯 세심했던 손길을. 시중드는 이들도 모두 물리고 손수 더러워진 발바닥을 닦아 주었다던 사내의 이야기를.
“한데 왜 내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니?”
“전하께서 마음 상하실 거라고, 모두 함구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어요.”
늘 그랬다. 로비엔은 항상 대놓고 무얼 드러내고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토록 그의 마음을 유추하고, 상상하고, 기대했다가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이번에도 그런 것일까.
겁이 난다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겁증도 옮는 모양인지, 초조함에 목이 조였다.
아니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