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고작 6개월가량이었다. 크게 대단할 것도 없는 시간이었고, 모든 인생이 비탄에 잠겨 슬플 만큼 공유한 것도 없는 순간이었다.
짧은 만남만큼 짧은 이별이었다. 아이는 이르게 태어났고, 죽었다. 그게 다였다.
로잘린은 무기력하게 침대에 늘어져 눈을 깜빡였다. 며칠째 침대에서만 누워 생활하고 있는 터라 마리가 걱정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그저 쉬고 싶었다.
“전하, 식사라도 좀 하세요.”
식사 거리를 가져온 마리가 천장만 보고 누운 로잘린을 어르고 달랬다. 로잘린은 대답 없이 눈을 깜빡였다. 한참 뒤에야 입이 열리고 나온 말은 네 성의를 봐서 식사하겠단 얘기가 아니라 질문이었다.
“마리. 자식을 잃고 멀쩡한 부모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어?”
로잘린의 질문에, 마리가 말문이 막힌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런 부모 얘기는 건너서도 들어 본 적이 없지만, 마리도 결혼하지 않은 아가씨라 그런 일은 몰랐다. 마리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로잘린의 마음에 위로가 될까를 궁리했으나, 로잘린은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중얼거렸다.
“왕세자 전하께선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어.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 한 방울도, 비통함도 없이 나를 위로하시더구나.”
여전히 눈앞에 그릴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자신의 눈을 문질러 닦아 주던 손길은 언제나 그랬듯 다정했지만, 얼굴만은 초상화 속 인물처럼 무표정했다.
“그땐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었는데, 그 순간이 지나고 나니까 나도 아무 생각이 안 나.”
“…….”
“하긴, 생각해 보면 함께한 시간보다 함께하지 않은 시간이 더 긴데. 그렇지?”
그게 원망스럽게 느껴졌는데, 며칠 지나고 나니 이젠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가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도 오히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조차도 죽은 아이를 찾으며 울부짖지 않고, 계속 애도하지도 않았으니까. 그저 자고 일어나면 생각이 잠깐 나고, 종일 피곤한 게 다였다.
“클로티 부인은 베르타 궁으로 돌아갔니?”
“클로티 부인은 왕세자 전하께서 독방에 가두어 두었다고 하셨어요. 심문하실 거라고 들었는데, 일단은 전하께서 기력을 좀 찾으신 후에…….”
“그건 왕세자 전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
로잘린이 마리의 말을 툭 끊었다. 그의 일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살길이나 찾아야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마리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가 그녀의 목숨 줄을 위협하느냔 듯이. 다른 사람들이 볼 때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자신을 위협했던 존재들은 모두 사라지고,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낙상으로 부주의하게 아이를 잃은 왕세자비.
“루드 백작 부인은 어떻게 되었니?”
“최근 재판이 열렸대요. 이혼 소송 때 증언했던 하녀가 말을 바꾸었고, 존 비테의 딸 역시 아비의 위증을 용서해 달라며 증인으로 참석했다고 해요.”
존 비테는 늘 우아하고 친절한 루드 백작 부인을 사랑했다. 그러나 루드 백작 부인은 오로지 존 비테의 가엾은 딸에게만 관심을 기울일 뿐, 존 비테의 멀쩡한 거죽에 휩쓸리지 않았다. 오히려 존 비테가 연심을 표현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존 비테의 딸에게 보내던 편지마저 끊어 버렸다고 했다. 그나마 주기적으로 전달하는 돈이 그들 사이의 전부였다.
“그래서 앙심을 품고, 루드 백작의 증언 요청에 응했다나 봐요.”
나태했던 변호사 역시 루드 백작으로부터 돈을 받은 자였다. 그러니 쓸모없는 증인을 부르고, 그녀의 처지 역시 대변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로잘린은 루드 백작 부인이 이상하도록 신경 쓰였던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지금 자신과 찍어 놓은 듯 같은 상황이었다. 과거의 자신은 미묘한 불안을 알아채고 있었다.
루드 백작 부인은 아이를 잃었다. 로잘린도 아이를 잃었다. 루드 백작 부인은 이전부터 무엄한 소문에 시달렸다. 로잘린 역시 추문을 경험했다. 루드 백작 부인의 하녀가 위증했다. 클로티 부인도 왕비에게 거짓을 고했다. 존 비테는 증거로 편지를 제출했고, 다미안 래비어트는 증거로 에메랄드 귀걸이를 남겼다.
“결과는?”
“루드 백작 부인이 승소했대요. 감히 명망 있는 가문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왕이 주관한 혼인을 깨뜨린 죄로 둘의 혼인 자체가 무효가 되었다고 들었어요. 루드 백작은 작위를 빼앗겼고요.”
“다행이구나.”
그나마 루드 백작 부인의 승소 소식에 마음은 다소 편안해졌다. 유사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루드 백작 부인이 누명을 벗을 수 있었던 것은 로잘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은 누가 도와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전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 왔다고 들었어요.”
“…….”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알현을 요청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리가 머뭇거리며 설명했다.
“일단 편지를 먼저 보내왔는데, 전해 드릴까요?”
“그래, 가져다주렴.”
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며칠째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았으니 한 술이라도 뜨라고 종알거렸다.
하녀로만 두었을 뿐인데 언제 이렇게 거래를 청할 정도로 머리가 컸을까? 로잘린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알았어. 이리 줘.”
마리가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달려왔다.
마지못해 식사를 시작하긴 했지만, 이미 모든 욕구가 바닥인 터라 그마저도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로잘린은 대충 수프를 몇 번 뜨고, 잘게 찢은 눅눅한 빵 조각을 우물거리다가 음식을 물렸다.
“바로 편지를 가져올게요, 전하.”
“그래.”
마리는 고스란히 남은 음식을 받쳐 둔 쟁반을 들고 침실 밖으로 나섰다가, 편지 하나를 든 채 돌아왔다.
“누가 편지를 먼저 봤니?”
“아뇨. 왕세자 전하께서 철저히 금하셨어요.”
로잘린의 질문에 마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하께서 의식이 없으실 때도, 항상 여기 계셨어요.”
“…….”
“많이 걱정하셨어요.”
칼을 받아 편지 봉투를 여는 로잘린에게선 아무 말도 없었다.
“정말이에요.”
“그러면 뭐 하니? 의식을 차리자마자 한번을 들르지 않는데.”
마리는 이번 일로 로잘린과 로비엔 사이가 멀어질까 봐 어찌할 줄 모르며, 발을 동동 구르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신경질적인 대답이었다.
“올 필요가 없다고 말하자마자 한 번도 여기 오지 않잖아!”
그가 아이를 사랑했다면, 진심으로 아이를 잃은 것이 슬프고 안타까웠다면 찾아왔어야 했다. 로잘린이 어떤 날카로운 말을 뱉더라도, 같은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로잘린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발길을 끊었다. 저녁 시간이 지나면 의미 없이 기다리기를 일주일. 이제 로잘린도 로비엔이 찾아오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건, 전하…….”
마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가 다물었다.
괜히 하녀에게 화풀이했다는 걸 깨달은 로잘린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탓을 하려던 게 아니야. 쉬고 싶으니까 그만 나가 주겠니?”
부탁을 가장한 명령에 마리가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조금 뒤, 다소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킨 로잘린이 편지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펼쳐진 종이 위에 루드 백작 부인의 유려한 필체가 보였다.
<왕세자비 전하께.
전하께 큰 은혜를 입은 라나 메르센데티가 인사드립니다.
그토록 따갑던 여름 햇빛이 지나고 나니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입니다. 곧 곡식들을 수확하고 곳곳에서 축제를 벌일 수 있겠지요. 왕실의 은혜 덕분에 많은 이들이 행복하고 즐거울 것입니다. 다만 유일한 슬픔이 있다면, 전하와 제게는 스산한 가을이 될 것이라는 점이지요.
그나마 저는 전하께서 베푸신 은혜로 가을을 얼마쯤 되찾게 되었습니다만, 전하의 슬픔은 어떻게 위로해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아이를 잃어 본 어미로서,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가슴이 먹먹합니다.
누군가는 낳아서 기르지는 않았으니 슬픔이 덜하리라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여섯 달을 한 몸으로 살았던 아이가 어찌 한순간에 없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다음에 태어나는 아이는 같은 아이가 아닐 텐데, 어떻게 다음 아이로 잊힌다고 생각하며 살 수 있을까요?
그 누구도, 어떤 사실도 위로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가고 고통이 풍화된 후에야 잊을 수 있는 것이 되겠지만, 부디 마음을 강하게 먹으십시오. 어떤 것도 전하의 탓이 아니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큰 도움이 될 수는 없겠지만, 필요하시다면 이 라나 메르센데티를 불러 주세요. 언제라도 찾아뵙겠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라나 메르센데티.>
“…….”
로잘린은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편지를 접어 다시 봉투에 넣었다. 침대 옆의 협탁에 편지를 올려 두고, 다시 침대 위에 모로 누웠다. 그저 다시 잠들고 싶었다.
슬픔도, 고통도,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하!”
비명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로비엔이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잠옷 차림의 로잘린이 귀신처럼 복도를 걷고 있었다. 감히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귀한 몸에 손을 댈 수 없는 경비병들은 허둥거리다가 로비엔을 발견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잘린.”
허우적대는 몸을 품에 안은 로비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첫날처럼 멀리 나간 이후에 발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도감이 일었다. 로비엔은 단단히 끌어안은 로잘린의 머리 타래 위로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로잘린이 몽유병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눈을 뜬 상태에서는 무던하게 회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밤에 잠이 들면 의식도 없이 궁을 돌아다녔다. 무언가를 간절히 찾는 사람처럼 맨발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약에 섞인 수면제 성분 탓인지 아침에 눈을 떠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잠옷 차림으로 돌아다니기에는 추워요.”
로비엔은 밤의 일을 철저히 극비에 부쳤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수치스러워할 테니까. 마리가 매일 밤 찾아드는 왕세자 얘기를 할 수 없었던 이유기도 했다.
익숙하게 로잘린을 안아 든 로비엔이 침실 문턱을 넘었다. 로잘린은 반항 없이 순순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로비엔이 침대의 가장자리에 로잘린을 앉힘과 동시에 하녀들이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 왔다.
“발이 더러워졌으니까 닦을게요.”
그가 명령하기도 전에 하녀들이 알아서 물러났다. 왕세자가 친히 한쪽 무릎을 꿇고 더러워진 발을 닦아 주는 걸 알고나 있는지, 로잘린은 희미한 얼굴로 웃고 있기만 했다. 의식을 차리고 있지 않을 때만 볼 수 있는 미소였다.
계속 이렇게 의식도 없는 당신의 미소를 훔쳐보면서 살아야 할까? 언제까지고?
로비엔이 미련이 덕지덕지 묻은 손으로 무릎 위에 올려 둔 로잘린의 발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그의 절망을 위로하듯 뻗어 온 부드러운 손바닥에 어린 짐승처럼 볼을 비볐다. 울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은데 눈물은 나지 않았다.
다만 오래도록 로잘린의 시선과 마음을 바라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