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온통 정신이 혼몽했다. 사람들이 오고 다니는 소리, 날씨, 해가 뜨고 지는 순간, 모든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현실감이 없었다. 어쩌면 눈을 뜨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산 자의 흐름은 그대로 눈을 감고 있게 두지 않았다. 몸은 자연히 회복을 시도하며 로잘린의 단잠을 방해했다.
“……전하!”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부드러이 들렸다. 마침 조심스럽게 로잘린의 얼굴을 젖은 천으로 닦아 내던 마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디에 얻어맞은 듯 몸이 무겁고 상황 파악이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 묻고 싶었으나 목 안쪽에서 비릿한 쇠 맛이 날 뿐이었다.
“내가, 큼, 얼마나…….”
간신히 뻑뻑한 목을 가다듬고 물었으나 마리에게선 즉답이 들려오질 않았다. 로잘린은 마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고장 난 것처럼 삐걱거리는 머리를 굴렸다.
마리는 불안하게 눈을 굴리면서도 착실하게 컵에 물을 따라 로잘린의 입가에 대어 주었다. 보살핌을 받는 어린아이라도 된 것처럼 물을 받아 마시던 로잘린의 머릿속에 하나둘 기억이 찾아들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하나둘 따져 보는 게 좋겠군요.’
왕비가 찾아와 소문의 진위를 추궁했다. 그에 화가 나 쫓아가서 마지막 순간까지 입씨름했고, 배가 아파서 멈칫하는 순간 왕비가 손을 떨쳐 내는 것에 중심을 잃었다. 몸이 비현실적으로 나가떨어지던 느린 순간, 기적처럼 나타난 로비엔이 그녀의 몸을 떠안았다. 그리고 통증을 느꼈다.
로잘린이 재빠르게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아예 임신하기 전처럼 꺼졌다곤 할 수 없지만, 이전보다 내려앉은 배에서는 생명력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리.”
로잘린이 마리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아이는?”
로잘린의 물음에 마리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구겼다. 제 하녀의 반응으로부터 시작된 불안함으로 손이 작게 떨렸다.
“아기씨는…….”
“어디에 있어, 지금?”
마리가 다그쳐 묻는 로잘린에게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무표정한 듯 굳은 얼굴로 들어선 로비엔이 모습을 보였다. 로잘린이 깨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조금 커진 눈이 그의 놀람을 대변했다.
“전하. 아이는 어떻게, 어디에 있죠?”
“……로잘린.”
“분명히 태어났죠? 태어났다고 하는 얘기까진 분명히 들었던 것 같은데…….”
로잘린의 질문 세례에도 그는 멈추어 선 채 대답이 없었다. 그건 단순히 어느 질문에 먼저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망설이는 기색이 아니었다. 조개처럼 꾹 다물린 입을 보던 로잘린의 얼굴에도 불안함이 감돌았다.
“전하, 대답해 주세요.”
로잘린의 채근에 로비엔이 간신히 입을 뗐다.
“……태어났습니다. 여아였어요.”
‘여아였다’니? 매끄러운 바닥에 튀어나온 가시 하나처럼 문장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로잘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로비엔을 바라보았다.
사실 로비엔은 로잘린이 조금 더 회복하기까지 이야기를 피하고 싶었다. 아이는 어차피 이미 죽었고, 로잘린은 살았으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이 화제를 피해갈 수 없음을 알았다.
“비와 얘기를 나누어야 하니 그대는 잠시 나가 있도록.”
로비엔의 명령에 마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침실을 빠져나갔다. 천천히 다가온 그가 침대 가장자리에 내려앉았다. 로잘린은 로비엔의 팔을 붙잡은 채 다음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의 어깨며 등을 고정하기 위해 붕대를 감아 평소보다 불룩하다는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보통의 아이들은 10개월 정도 모체의 태내에 있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요?”
그는 말을 내뱉는 자신의 모습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궁의의 말로는 아이는 너무 빨리 태어나서, 자기 스스로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웠을 거라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기색으로, 로비엔은 로잘린에게 천천히, 하지만 명확하게 아이의 상태를 말해 주었다.
“그전까지 배 속에서 움직였는데도?”
그러나 로잘린으로서는 단박에 인정할 수 없었다. 큰일이 있었던 건 맞다. 하지만 계단에서 떨어지기 바로 직전까지도 아이는 움직이고 있었고, 살아 있었다. 일찍 태어났기 때문에 숨을 쉬지 못해서 죽었다니,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이 있나.
“농담이죠?”
로비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로잘린은 그가 그딴 장난을 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침묵은 인정이 되어 돌아왔다.
“거짓말. 제 눈으로 봐야겠어요.”
로잘린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침대 아래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여전히 중심조차 잡기 힘든 몸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재빨리 움직여 잡아 준 로비엔이 아니었다면, 로잘린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박았을 터였다.
그러나 고마운 줄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를 밀쳐 낸 로잘린이 바닥을 딛고 섰다. 로비엔은 벌컥 문을 열어젖히고 맨발로 나서는 로잘린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대로는 발이 다칠 수 있으니 데려다줄게요.”
로잘린은 제 무릎 뒤로 팔을 넣어 안아 드는 로비엔의 품에 힘없이 안긴 채 낯선 곳으로 향했다. 문득 그의 어깨 쪽을 짚은 한쪽 손 아래로 불편하게 고정된 무엇을 느꼈다. 그때 로잘린의 무게를 끌어안은 채 벽에 그대로 부딪혔으니 문제가 생겼대도 이상할 게 없기는 했다.
그러나 그걸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로비엔이 건물 지하의 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로잘린 역시도 궁 안에서 제법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낯선 공간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이 두 주인을 맞아 문을 열자 어둡고 차게 느껴지는 방 안, 작은 덩어리 하나가 단상 위에 있었다.
이 궁의 새로운 주인이 될 존재인데도, 그 누구도 모시는 이 없이 외로이.
로잘린이 서둘러 움직이는 기색에 몸이 흔들렸다. 로비엔은 혹시라도 중심을 잃어 로잘린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조금 전까지도 막 태어난 송아지처럼 제대로 걷지 못해 휘청거리던 주제에 로잘린은 단상을 향해 머뭇거림 없이 나아갔다.
천에 감긴, 생각보다 더 작은 몸. 평화롭게 잠든 듯 내리감은 눈. 아직은 시뻘겋기만 하지만 자라면 제 아버지를 닮아 어여뻐질 공주님은 그냥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러나 떨리는 그녀의 손끝에 닿은 이마는 머리꼭지가 쭈뼛하도록 차가웠다. 그제야 아이의 몸이 빨갛기보다는 파랗고, 보라색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생의 바스러짐이었다.
“……정말로 죽었어요?”
로잘린이 고개를 돌려 로비엔에게 물었다. 정답을 알면서도 그가 아니라고 대답해 주기를 바랐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그의 침묵은 인정이었다.
로잘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죽은 아이를 눈앞에 두고, 만져 보고도 살아 있다고 우길 만큼 멍청하거나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다. 고작 6개월 남짓 품었다고 아이를 제 생명처럼 여길 만큼 절절하지도 않았다.
다만, 태어나면 서로 사랑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티 없이 행복하게 사는 아이처럼 살게 해 주겠다 보장할 수는 없어도 다정한 아버지와 서툰 어머니 밑에서 그럭저럭 행복하게는 살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생명의 불꽃은 이렇듯 하잘것없이 꺼져 버렸다. 저를 낳아 준 어미를 만나기도 전에.
현실감을 느낀 순간 욱, 하는 소리와 함께 로잘린의 몸이 바닥으로 훅 가라앉았다. 급하게 다가와 그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로비엔이 작게 떨리는 손을 뻗었다.
반쯤 숙이고 있던 로잘린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뜨거운 것이 로잘린의 뺨을 감싼 그의 손등 위로 굴러떨어졌다. 아무리 치욕스럽고 모욕적인 순간에도 그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강하고 똑똑한 여자의 눈물이었다.
“……미안, 미안해요.”
그는 통증처럼 목이 꽉 죄어 오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침을 삼켰다. 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입을 열어 사과했다.
로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어깨 한번 떨지 않고 눈만 쉼 없이 눈물을 쏟아 낼 뿐이었다. 마치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한참이 지나서야 로잘린이 젖은 눈을 떴다. 물기로 앞이 온통 부옇게 보였다. 그러나 그 사이로 지푸라기처럼 쥐어 잡은 로비엔의 얼굴은 낯설지만 선명하게 보였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네.”
“…….”
“원래 왕족들에게 자식 하나 죽은 것쯤은 별거 아닌가?”
축축하게 젖은 속눈썹을 몇 번 깜빡이며, 로잘린이 느리게 물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도 믿을 수 없겠지. 로비엔이 엄지로 속눈썹을 부드럽게 문질러 물기를 닦아 냈다.
로잘린은 선명해지는 시야로 무표정한 로비엔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무언가를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그러나 그는 어떤 표현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다는 편이 맞았다. 그는 왕족으로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감추는 것을 더 배웠고…….
‘비께서 불안해하시면 어떻게 해야 하지?’
‘당연히 정신을 차리시면 큰 충격을 받으실 겁니다. 왕세자비 전하께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일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직 자신을 추스를 시간도 없는 그녀에게 그의 슬픔까지 옮겨 가지는 않기를 바랐으므로. 차라리 단 한 번도 마음 준 적 없는 그를 원망하며, 빠르게 회복하고 일어나기를 바랐으므로.
그의 눈동자 속 감정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기에는 로잘린이 너무 지쳐 있었다. 그녀는 말 없는 그를 노려보며 손을 밀어내고, 축축하게 젖은 얼굴은 제 손으로 직접 닦았다.
당신, 말뿐이었구나.
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그녀가 그에게 느낀 것은 배신감, 그리고 원망이었다.
“전하께서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로잘린이 제대로 땅을 딛고 섰다. 억지로 끌어 올린 미소가 입가에 굳어 있었다.
“본래 아이를 사산하는 경우는 많다더군요. 제가 고의로 아이를 일찍 낳아 죽인 게 아닌 것처럼, 전하의 잘못도 아니니.”
“로잘린, 나는.”
“하지만 이제 날마다 제 방에 찾아오셔야 할 이유는 없겠어요.”
아이는 이미 죽어 없어졌으니까.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허공에 흩어졌다.
로잘린은 비틀거리듯 걸음을 떼 로비엔을 그대로 지나쳤다. 부축하듯 잡아 주려는 그의 손은 맵차게 뿌리쳐 버렸다. 맹렬한 거부였다. 문을 열고 맨발로 나선 뒷모습은 어느 순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걷고 있었다.
아이의 죽음에 눈물 한번 흘리고 돌아서는 뒷모습은 궁 안에서 파다하게 소문이 난 것처럼 독한, 로잘린 보가트 르 칼라브리아로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게 더 처절하게 보였다. 진심일수록 타인에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 로잘린 보가트의 성격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