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노Hano 로잘린 보가트 (55)화 (55/151)

# 55.

막 태어난 그들의 딸은 6개월을 막 넘긴 아주 작은 계집아이였다. 몸속의 장기 하나는 없겠다 싶을 만큼 너무 작았는데, 그게 원인이었다. 아이는 스스로 숨을 쉬지 못했다. 의사는 아이의 폐가 발달하지 못했거나 너무 작았을 거라고 했다. 그게 막 태어난 그의 아이가 죽음으로 향한 이유였다.

그러니까 달리 말하면, 별 탈 없이 자연의 이치대로 제 어미의 태에서 석 달만 더 머물렀다면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을 거란 소리였다. 하다못해 최소 두어 달만이라도 더 머물렀다면 아이는 저 스스로 호흡하는 방법을 알았을 것이다.

“전하, 명하신 대로 클로티 부인을 독방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로비엔은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곱씹었다. 이틀이 지나도록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는 로잘린의 곁을 지키는 동안 생각은 끊임없이 찾아들었다. 그는 아이의 죽음을 끊임없이 상기하며, 자신의 무력함과 안일함을 몇 번이나 절감했다.

잘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던 걸까?

“비께서 기력을 찾는 대로 같이 심문할 테니 그때까지 가둬 둬.”

“왕비님께서 계속 찾고 계십니다만…….”

“클로티 부인은 왕비께서 비에게 보낸 사람이고, 엄연히 펠리에 궁의 소속이야. 답변할 필요 없다.”

밀리언이 머뭇거리며 왕비의 이야기를 꺼냈으나, 그는 일언지하에 왕비의 요청을 잘라 냈다. 그는 지금 얼굴을 보기는커녕 제 어미인 왕비의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도 싫었다.

‘그렇다 해도 그건 처신을 잘못한 네 탓이지, 로잘린 보가트.’

왕비의 얼굴을 떠올리면, 그날 아무렇지도 않게 로잘린을 조롱하고 행실을 탓하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끔찍한 우월감까지도.

“혹시라도 계속 압박하시거든, 라비앵 클로티는 왕족 시해 혐의를 받고 있다고 해.”

왕비는 몰라도 한갓 귀족 하나에게 죄를 묻는 일은 쉽다. 루드 백작 부인의 재판이 그랬듯이, 조작된 증거 몇 개면 영원히 세상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일은 우스웠다.

‘전하, 저는 그저 왕비님의 뒤에 서 있었을 뿐입니다!’

새된 소리를 지르며 자신은 로잘린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목소리가 떠오르기는 했다. 하지만 로비엔에게 라비앵 클로티는 이미 역적과 같았다.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파드득 떨며 공포에 질렸던 라비앵 클로티가 그의 아이와 로잘린을 해치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에 하나 저지르지 않은 죄라고 한들, 알 게 무엇인가?

로잘린 역시 하지도 않은 일로 끊임없이 의심받았고, 더러운 추문에 휩싸였다. 그리고 최대한 조용히 해결하려다가 맞닥뜨리게 된 결과가 바로 지금 이것이었다.

“따르겠습니다.”

밀리언이 짧게 대답하고 로비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조심스러운 손길로 로잘린을 가만가만 매만지며 내려다보는 로비엔의 시선에는 죄스러움, 애처로움, 그리고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 감정들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밀리언은 오랜 시간 로비엔을 주인으로 섬겨 왔다. 로비엔은 잠잠한 호수나 한 자리를 지키는 태산처럼 늘 고요하고 큰 변화가 없는 사람이었다. 크게 열정을 둔 것도, 집착하는 것도 없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로비엔은 붉은색이나 순식간에 불이 붙는 분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나 사실 그것은 그의 무심함에서 발로한 것일 뿐이었다. 크게 집착하는 것이 없던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로비엔이 궁 안에서 자비로운 주인으로 소문이 난 것은 그저 그들의 존재가, 혹은 그들의 실수가 그의 관심을 끌어낼 만큼의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명령하십시오.”

그것은 그의 천성이었고, 그는 여전히 무섭도록 붉게 타오르는 들불은 아니었다.

“입이 무거운 자들을 제외하곤 모두 내보내. 이후 헛소문을 주절거리는 것들은, 그자가 귀족이라 해도 목을 벨 것이라고 전하고.”

그러나 고요하지만 새파랗게 넘실거리며 주변을 태우는 불꽃이었다.

“……잠은 조금이라도 주무셨습니까?”

밀리언은 로비엔의 분노와 절망을 십분 이해했다. 아이를 셋이나 둔 아버지로서 그가 안타깝기도 했다. 나자마자 잃어버린 아이라니, 그것도 태내에서 한두 달만 더 머물렀다면 살 수 있었던 아이라니.

“비께서 눈도 뜨지 못하는데 잠이 올 리가.”

로비엔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 역시 아이를 해친 일당 중 하나일 뿐인데.”

“전하.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십니까.”

밀리언이 저도 모르게 항변했다. 로비엔은 가만히 손을 들어 목소리를 낮추도록 명령했다.

“비께는 다르지 않을 거야.”

갑작스레 자신을 찾아와 아이를 지켜 달라고, 다른 조건을 걸어도 좋다고 말하던 로잘린의 얼굴이 기억났다. 아이의 존재는 둘 모두에게 미약하던 시점이었는데도, 얼굴에 서린 분노와 미묘한 절박함이 인상 깊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알아. 왕비께서 일부러 떠민 건 아니야. 모두가 보았듯이.”

로비엔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결국 아이는 죽었지.”

“…….”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밀리언.”

아무렴 자신이 있는 공간에서 누가 로잘린을 해칠까. 그래서 그렇게 당당하게도 약속했다. 안일하고 어리석었다.

“비께선 늘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모르겠다고, 어머니가 되는 방법을 모르겠다고 했지만.”

그런 의문과 노력 자체가 사랑이었다.

“눈을 뜨면 알게 되겠지. 이미 본인이 어머니였다는 걸, 그 아이를 사랑했다는 걸.”

로잘린은 남편인 로비엔도, 아비인 드마셸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는 사랑했다.

그렇다면 유일하게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로잘린이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묻고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로잘린이 로비엔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아이를 해친 왕비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결단코 아닐 것이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마다 숨이 덜컥 멈추었다. 로잘린이 무탈하게 눈을 떠 주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영원히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잠들어 있기를 바랐다. 그 눈에 자신을 향한 원망이 스미는 것이 두려웠다.

“죄책감과 원망이 공존해.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피를 잡기가 어렵고.”

사랑하던 어머니가 임신한 아내를 해친 상황에 부닥친 그의 혼란은 밀리언이 가늠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밀리언은 그 이상 말을 덧붙이는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제 의도가 아니어도 사랑 한번 하기가 이토록 어렵고, 안온한 가족을 꾸리고 살아가기가 무척이나 힘든 사내를 향한 애도기도 했다.

“모두 내가 감당할 몫이지.”

“전하.”

“다만 한 가지는 궁금해.”

로비엔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밀리언은 자신이 답변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꼭 대답해 주리라 생각하며, 이어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밀리언은 서글퍼졌다.

“아이의 눈동자 색깔은 무엇이었을까?”

로비엔의 떨리는 손끝이 내리감긴 로잘린의 눈두덩을 깃털처럼 부드럽게 매만졌다.

“로잘린을 닮았다면 보석처럼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이었을 텐데.”

남자아이건 여자아이건 제 어미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를 반짝이며 팔에 매달려 부탁하면 아마 허물어져, 소원이 무엇이든 들어주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로잘린은 자식에게 너무 무르다며 그를 혼냈을지도. 그런 면에서는 단호한 사람이니까.

이와 같은 참상이 있기 전에는 서류를 보다가도 종종 그런 상상을 하며 웃었다. 정말이지 더없이 행복해져서 바라는 게 없었을 만큼.

로비엔의 푸른 눈동자에 물기가 맺혔다. 그를 발견한 밀리언은 무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사 한번 남기지 않고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에게는 감히 주군의 눈물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원하는 건 다 해 주고 싶은데, 왜 이렇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지 모르겠어.”

문이 닫힘과 동시에 눈에 고인 물기가 뚝 떨어졌다. 로비엔은 울며 웃으며 로잘린의 이마에 무방비하게 떨어진 물방울을 엄지로 문질러 닦아 냈다.

깨끗하게 정리하고 환기까지 시켰는데도, 코끝에서 여전히 그날의 피비린내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 냄새가 벼락처럼 얼마 전, 이 방 안에서 벌어졌던 비극을 환기했다.

아이가 태어났다고는 믿을 수 없는 고요함과 방 안에서 울먹이고 흐느끼는 사람들.

‘……어여쁜 공주님이셨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사망을 고하던 산파의 목소리도 얼마쯤 떨리고 있었다. 출산 시 사산이나 산모가 죽는 일은 왕왕 있었지만, 생명의 상실은 그녀에게도 적응하기 쉬운 종류의 비극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로비엔은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였다. 그의 시선에 침대 바로 옆에서 피를 닦아 내고 강보로 싼 아이가 보였다. 마치 타인을 보듯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의식도 없는 주제에 아이를 끌어안은 로잘린의 품 안에 있는 아이는, 말 그대로 여전히 핏덩어리에 가까웠다.

지나치게 작은 몸, 시뻘건 피부, 민둥거리는 머리에 눈은 감겨 있었지만, 로잘린을 닮아 있었다.

어리석은 것들이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토록 선명한 존재를 가지고 세상에 있는데. 로비엔은 잘게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아 들었다.

‘태어난 직후부터 숨을 쉬지 못하셨습니다.’

아직은 그의 품에 안긴 작은 몸이 따뜻한데. 믿을 수 없었다. 로비엔은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아이를 들어 올렸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는, 숨을 쉬는 그 단순한 동작조차 이어지지 않는 몸.

모든 건 현실이되, 지독하게 비현실적이었다.

언젠가 로잘린이 작게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콧노래를 부르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좋은 부모가 될 자신이 없다고 말했으면서도 마침내 만나게 될 날을 고대하며 반짝이던 그 얼굴을, 평화로웠던 그날을 낯설게 사랑했다.

로잘린은 아이를 가진 순간부터 사랑이 무엇인지를 계속 알고 싶어 했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어 했다. 로잘린은 몰라도 로비엔은 그게 사랑임을 알았다. 로잘린이 그렇게 아이를 사랑하기에, 그도 얼굴 한번 본 적 없던 아이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으니까. 그것은 운명과도 같았다.

‘아…….’

로비엔은 아이의 둥근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그의 눈에서 소리 없이 터져 나온 눈물이 아이의 이마를 스쳐 방울로 떨어져 내렸다. 어떤 표현도 지금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지독한 통증 앞에 그는 무력했다.

단 한 번, 세상에 울음조차 터뜨리지 못하고 떠난 그의 아이가 가엾고, 이 아이를 사랑하던 로잘린이 가엾고, 지금 이 순간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이 가여웠다.

‘여자아이라면 글로리, 남자아이라면 루스터라고 부르고 싶어요.’

이름조차 듣지 못하고 떠나가 버렸지만, 내 첫아이야.

‘……글로리.’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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