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왕비와 클로티 부인을 대면하고 흔들리는 로잘린의 눈동자를 발견한 순간 마리는 생각했다. 로잘린이 일개 하녀에 불과한 자신을 가르치고 관대하게 품어 주었던 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언젠가 주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 상황을 판단하는 머리를 가지고 행동하라는.
문이 닫히는 순간 마리는 로잘린의 방을 등지고 돌아섰다. 혹시라도 누군가 수상쩍게 여길까 봐 뛸 수는 없었으나,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은 이미 반쯤 뛰고 있었다.
“넌 왕세자비 전하의 하녀가 아니냐?”
“맞습니다. 왕세자 전하께선 어디에 계신가요?”
“일단 지금 여기엔 안 계신다만. 서재로 가 보렴.”
경비병의 답변에 마리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왕세자는 주로 머무르는 공간에 있지 않았다. 벌써 그를 찾기 위해 돌아다닌 곳만 세 군데가 넘었다. 끔찍할 정도로 눅눅한 공기와 높은 온도에 살갗을 타고 땀이 흘러내릴 때가 되어서야 마리는 로비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왕세자 전하!”
마리의 부름에 로비엔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녀는 감히 그를 부를 수 없는 존재였으나, 그게 로잘린과 관련되어 있다면 말이 달랐다. 종종걸음으로 그의 지척까지 다가온 마리가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이야기했다.
“왕비님께서 왕세자비 전하를 만나러 오셨는데, 전하께서 아주 불안해 보이셨어요. 주제넘은 짓인 건 알지만, 왕세자 전하께서 같이 계셔 주셨으면 해서.”
마리의 말을 가만히 듣던 로비엔이 짧게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지나쳤다.
나중에 건방지게 나섰다며 혼나도 좋으니 별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로비엔 뒤로 남겨진 마리는 이미 엉망인 입술을 짓씹었다. 가슴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불안한 예감이 현실화하여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전하, 서두르지 마시고…….”
내리쬐는 뙤약볕이 가시처럼 따가웠다.
로비엔은 진정하라고 말하는 밀리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체면이 상하지 않도록, 절대로 뛰지 않는다는 왕족의 면 같은 것도 집어치웠다. 그는 이미 뛰고 있었다.
로잘린의 시중을 드는 하녀는 제법 영리해서 로잘린에게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불안을 이야기하며 굳이 저를 찾아온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을 터였다.
막 건물의 중앙 계단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렇다 해도 그건 처신을 잘못한 네 탓이지, 로잘린 보가트.”
그의 어머니인, 왕비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게는 무척이나 낯선 목소리였다. 거기엔 혐오와 경멸, 일종의 증오까지도 읽혔다.
왕족은 원래 그래도 되는, 혐오가 당연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인가? 그는 이제 알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불안정해 보였던 로잘린이 걱정되었다. 로잘린이 불쾌해하거나 충격받았거나 상처받았다면 그것은 그의 실책과 다름없었다. 그저 안아서 달래고 싶었다.
로비엔이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오르며 막 2층을 올려다본 순간이었다. 로잘린을 밀어내는 왕비와 시선이 마주쳤다.
로잘린이 2층 계단 끝에서 휘청거렸다. 그 광경을 목격한 로비엔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뜨였다. 만에 하나라도 저 가파른 계단에서 무방비하게 굴렀다간, 허리든 머리든 깨지고 말 것이다.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로잘린이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로잘린!”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계단을 몇 개씩 훌쩍 뛰어올랐다. 끔찍한 비극을 피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었다. 로비엔은 힘없는 종잇장처럼 낙하하는 몸으로 손을 뻗었다.
처절할 정도로 길게 뻗은 손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아주 조금, 아주 조금만 더.
머릿속이 새하얗게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닿을 듯 말 듯, 그의 움직임이 지독하게도 느리게 보였다.
그러나 아주 마지막 순간, 가녀린 어깨가 손끝에 닿았다. 그는 매가 순식간에 먹이를 낚아채듯 그 어깨를 품 안으로 끌어당겨 두 팔 안에 가두었다. 동시에 무게가 겹친 두 몸이 둔중한 소음과 함께 벽에 부딪혔다. 그의 날갯죽지며 어깨가 벽에 정통으로 부딪히고 쓸린 탓이었다. 그 와중에도 로잘린의 몸은 로비엔의 품에 단단히 끌어안긴 채였다.
잡았나? 허상은 아닌가? 불확실한 안도감에 로잘린의 체온을 더듬었다. 로잘린은 숨을 쉬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멈춰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나 시간이 멈춘 듯했다.
로잘린이 간신히 숨을 내뱉고 나서야 시간이 움직였다. 모든 사람이 마치 그림 속의 주인공들처럼 멈추었다가 그제야 무형의 속박에서 풀려났다.
“괜찮습니까?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부딪힌 자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로잘린보다 희게 질린 얼굴로 그가 몇 번이나 로잘린의 몸을 살폈다.
로잘린은 외견상 다친 곳 없이 무사했으나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돌려 로비엔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두 팔이 배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배가.”
로비엔은 로잘린의 숨이 다소 거칠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느리게 움직이는 시선의 끝에, 푹 젖어 든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별일 아니에요. 진정해요, 로잘린.”
별일이 아닐 리 없다. 그러나 로잘린을 더 놀라게 할 수는 없었다. 그가 진정시키듯 속삭였으나, 이내 그 역시 소용없어지고 말았다.
“배가, 배가 아파요.”
로잘린이 통증을 느낀 탓이었다.
어쩔 줄 모르고 덜덜 떨리는 손을 힘껏 움켜잡은 로비엔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2층 계단 끝에 유령처럼 우두커니 선 왕비와 클로티 부인을, 그들 뒤로 늘어선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밀리언! 당장 궁의를 불러!”
그의 시선은 얼굴이라도 외우듯이 그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당황스러운 상황 앞에서도 입을 꾹 다물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밀리언!”
로비엔이 다시 한번 벼락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그의 부관은 명령을 하달하는 데에 시간을 소비하느니 제가 총알처럼 뛰쳐나갔다.
허둥지둥 달려 나가는 뒷모습을 발견한 로비엔은 식은땀을 흘리는 로잘린을 일단 안아 올렸다. 통증을 느끼는 임산부를 딱딱한 바닥에 그대로 누여 둘 수 없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편안한 상황에 이르기를 바랐다.
“비켜.”
로비엔이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며 통로를 막고 선 이들에게 일갈했다. 다들 황급히 몸을 틀어 그가 로잘린을 안은 채 지나칠 수 있도록 했다.
“……로비엔.”
그는 어미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으나, 듣지 못한 척 돌아섰다. 그 행동에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로잘린, 괜찮아요. 곧 궁의가 들 겁니다.”
땀으로 푹 젖은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가 안심시키기 위해 속삭였다. 로잘린은 부모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는 아이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곧 밀리언이 궁의를 끌고 허겁지겁 들이닥쳤다. 그는 로잘린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다급하게 산파를 부를 것을 요청했다.
“산파를 불러와. 최대한 빨리.”
로비엔은 신음하는 로잘린의 곁을 지키며 명령했다. 로비엔의 궁은 이미 발칵 뒤집힌 지 오래였다. 하녀들은 하녀장의 명령을 받고, 이리저리로 우왕좌왕 내달리고 있었다.
“전하께선 나가 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불안한 환경은 산모에게도 좋지 않다. 뒤늦게 달려온 산파가 로비엔을 문밖으로 밀어냈다. 그는 닫히는 문 너머로 침대 위에 늘어진 로잘린의 모습을 눈에 새기듯 바라보았다.
“괜찮으실 겁니다, 전하.”
밀리언이 다가와 나직이 속삭였다.
“그대의 아내도 이런 경험이 있었나?”
로비엔이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일찍이 혼인해서 가정을 이룬 밀리언은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 로비엔은 모든 게 처음이고 낯설지만, 그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괜찮은 이야기를 해 줄지도 모른다. 로비엔은 조금쯤 그렇게 기대했다.
“이렇듯 이른 시기에 출산한 경험은 없습니다.”
그러나 눈을 굴리며 조심스럽게 내어놓는 답은 그가 원한 바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왕세자비 전하께선 강한 분이시니까요. 전하께서도 그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아기씨께서도 분명 건강할 겁니다.”
그러나, 기껏 희망적인 대답을 내어놓고도 둘 사이로는 지옥 같은 적막이 흘렀다. 사실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들 모두 여자들이 겪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상황에 익숙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 상황에서 아이는 태어나도, 태어나지 않아도 문제였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외상으로 이미 아이를 배 속에서 보호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태어나지 않으면 그대로 로잘린의 배 속에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어나더라도, 이 시기에 태어난 아이가 살아날지는 미지수였다.
“힘을 주셔야 합니다!”
닫힌 문 안으로는 로잘린이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가 갇혀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문 안팎의 사람들이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으로 고통스러워하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머리 바로 위에서 미친 듯이 발광하던 햇빛조차 사라지고 밤이 왔다.
로잘린은 숨 쉬기조차 힘들어한다고 했고, 아이는 여전히 태어나지 않았다.
로비엔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사람처럼 복도를 쏘다녔다. 그의 부관인 밀리언조차 도저히 그를 말릴 수 없어 손을 뗀 상태였다.
로비엔은 어깻죽지가 상한 것 같으니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말도 듣질 않았다. 거듭 짓이겨져 씹힌 입술에서는 이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귀찮은 사람처럼 대충 손으로 핏자국을 훔쳐 낸 그는, 언제 돌아온 건지 복도 끝 한쪽 구석에 멍청하게 선 클로티 부인을 발견했다.
무슨 일인지 제대로 본 것도 아니고, 들은 것도 아니다. 화를 낼 자격이 그에게 있는지조차 불분명했으나 그녀를 보는 순간 머리꼭지에 불이라도 붙은 듯 홧홧한 기분이 들었다.
“라비앵 클로티.”
눈이 마주쳤다. 클로티 부인은 제가 있는 방향으로 야차처럼 성큼성큼 걸어오는 로비엔을 발견하고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파드득 떨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전하!”
문 안에서 큰 소리가 났다. 로잘린을 부르는 소리였다. 그는 조금 전까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도 잊은 채 그대로 멈추어 섰다. 영원 같은 기다림이 지나 삐거덕거리는 불편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앞치마 자락이 피로 젖은 산파가 기진한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되었지?”
소식을 묻는 로비엔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산파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비는 무사한가?”
문 앞에 선 산파가 망설이는 얼굴로 로비엔을 바라보다 간신히 입을 뗐다. 그러나 여전히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깐 채였다. 기묘한 불안으로 심장이 미친 듯이 내달렸다.
“……아기씨께서 태어나셨고, 왕세자비 전하께서는 기진하시긴 했지만 무사하십니다.”
그 이상의 언급은 없었다. 그는 법도라는 것도 모르는 무뢰배처럼, 산파를 밀치고 문을 열어젖혔다.
사위가 적막했다. 방 안에는 비릿한 피 냄새, 쿰쿰한 땀 냄새, 고통스러운 진통의 진동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방에 들어 있던 아랫것들이 그의 얼굴을 보곤 고개를 숙인 채 뒤로 물러났다. 잠이 든 건지, 정신을 잃은 건지, 눈을 감은 로잘린의 품에 벌건 핏덩이가 안겨 있었다.
“…….”
그는 발이 묶인 듯 방의 한가운데에 멈추어 섰다.
로비엔은 기묘한 불안의 정체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아이는 제 어미의 태에서 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어여쁜 공주님이셨습니다.”
고요한 울음, 그건 죽음의 소리였다.